광고 천재 명도혁 151화
한국전력공사의 사전 브리핑 현장.
“어, 이거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별고 없으셨습니까?”
“반갑습니다. 팀장님 직접 오셨네요. 지난번 광고 잘 봤습니다.”
“이런 고맙네, 자네 얼굴 좋아졌구만.”
늘 그렇듯 평범한 인사를 반갑게 건네며 광고 회사 직원들이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다들 웃고 있었지만 미소 뒤에는 날카로운 견제의 눈빛을 숨긴 채였다.
평화로워 보이는 광경이었지만 몇 주일 뒤 이곳은 전쟁터로 변할 것이다.
곧 전쟁을 주도할 막후 세력이 나타났다.
한국전력공사의 기획홍보과장이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귀한 걸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의례적인 인사가 이어졌다. 하루 전 미리 와서 광고주와 미팅을 마친 도혁과 차현우가 브리핑에 참가한 회사의 면면을 둘러보았다.
‘대한민국에 광고 좀 한다는 대행사는 다 들어왔구만. 태강이 안 보이네.’
같은 생각을 한 듯 차현우가 고개를 기울이다가 도혁의 플래너에 시선이 닿았다.
잠깐 플래너를 내려다보던 그의 눈빛이 짙어졌다.
차현우가 막 무슨 말을 하려는데 광고주가 자료 설명을 시작했다.
“저희 한국전력공사에서는 이번 기업 이미지 광고에 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창립 이래 최대 캠페인을 기획 중으로 저희로서는 대규모 예산을 투여할 계획입니다. 유례없는 기업 이미지 광고를 진행하는 만큼 여러분에게 거는 기대가 큽니다.”
그 뒤로 쭉 한국전력공사의 회사 소개와 브리핑이 이어졌지만 거의 어제 들었던 내용이었다.
공사의 새 사장이 전문가라는 것과 엄청난 예산을 쓸 것이라는 말을 누누이 강조하며 브리핑이 끝났다.
회의실을 나오자 차현우가 태강애드를 언급했다.
“태강은 요즘 경쟁 PT에 거의 들어오지 않고 있어. 미국 진출 건 때문에 그런가?”
“대표님과 제작국장님이 해외에 상주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기존 광고주는 유지 중이구요. 매출 변동은 없더라구요.”
“정말 미국 시장 쪽으로 가닥을 잡으신 건가?”
“글쎄요.”
회귀와 함께 알고 있는 미래가 완전히 틀어지기도 했는데, 바로 태강애드가 그런 경우였다.
태강의 해외 진출이라니.
눈앞에 있는 차현우 선배가 전생에 해외 나갈 당시에도 불모지와 같은 시장을 개척하는 느낌이었다. 없는 시장 뚫느라고 고생 엄청 했었지.
그보다 십 년은 앞서, 그것도 태강이 미국으로 나갈 줄이야. 덕분에 후배들은 조금 더 편안하게 선배들이 닦은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다.
도혁은 노익장의 용기를 진심으로 응원했다.
“아무튼 잘되면 좋겠네요. 힘든 길일 텐데 대단하네요.”
“명 대표한테 자극받아서 나가신 거라잖아. 한 번뿐인 인생, 명도혁이처럼 도전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싶다고 하셨다더라.”
“멋지네요.”
“그래도 일중독은 조심해야지.”
누구보다 전생과 현생에 일중독자에 가까운 차현우의 말에 도혁의 웃음이 터졌다.
“선배야말로 일하는 시간은 줄이고 있는 거예요? 우리 회사 사람들 죄다 일에 미쳐 있는 사람들 같아요. 오죽하면 퇴근 시간 엄수를 게시판에 써 붙여뒀겠어요.”
“써놓으면 뭐 하나. 아무도 안 가는데. 재밌어서 하는 일이지만 일에 파묻혀서 죽어버릴 수도 있겠다 싶고 요즘 그렇다. 참, 그래서 말인데.”
차현우가 도혁의 플래너에 대해 말했다.
“아까 브리핑 때 명 대표 다이어리를 봤거든. 보려고 한 건 아니고 우연히 봤어.”
“봐도 상관없어요. 딱히 비밀도 없는데요.”
“얼핏 보니까 해야 할 일 리스트에 휴식 시간이 따로 적혀 있더라고. 설마 쉬는 것도 계획을 세우는 건가?”
“맞아요. 계획표에 꼭 휴식 시간, 노는 시간을 적어두고 알람도 걸어놔요. 이렇게라도 쉬어줘야지, 안 그럼 일만 계속하는 성격이라서요.”
회귀 후, 초등학생 시간표처럼 쉬는 시간을 꼭 기재하고 있었다. 계획적으로 쉬지 않으면 전생처럼 몸도 망가뜨리고 일에만 몰두할 게 뻔한 인간이라서.
인간은 보통 같은 실수를 반복하니까 말이다.
차현우가 한숨을 내쉬면서도 따라 하겠단다.
“처음 TO Do List에 휴식이 적힌 걸 보고 서글픈 생각도 들었지만 막상 나도 저렇게 강제적으로 쉬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해보세요. 생각보다 리프레쉬 시간을 정기적으로 가질 수 있어서 좋습니다. 능률도 오르구요. 우리 같은 사람은 이렇게라도 쉬어야 해요.”
“그래, 인생 뭐 있나, 쉬엄쉬엄 가자고.”
차현우의 다짐과 달리 사무실에서는 벌써 AE들이 한국전력공사 아이데이션을 시작하고 있었다.
“벌써 회의 중이었어? 브리핑이라도 듣고 시작하지.”
“새 아이템이지 않습니까? 신규 프로젝트는 초반이 제일 재밌잖아요.”
“인정. PT 막바지쯤 가면 정말 토할 거 같아요. 시작할 때는 신나죠. 도화지에 그림 그리는 것 같고.”
“으이구. 이 워커홀릭들아. 대표 없을 때 농땡이라도 치고 있지 브레인스토밍 중이냐?”
“그러네. 우리가 왜 그 진리를 까먹고 있었지?”
농땡이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탁기준이 브리핑 자료에 대해 물었다.
“어제 다녀와서 준 자료랑 대동소이하지? 그 자료는 분석 완료했어.”
“네. 거의 똑같습니다. 미리 들어가길 잘한 것 같아요. 오늘 보니까 기획홍보과장 특징을 잘 모르겠더라구요. 간단하게 설명만 하고 사라져 버렸거든요.”
“맞아. 관공서는 특히 팀장급 담당자가 중요하니까 미리 가보는 게 좋아. 민원이 중요한 곳이라서 문전박대도 못 하고 잘 알려주는 편이지.”
“아무튼 결론은 이번에 바뀐 공사 사장이 홍보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담당이 엄청나게 까다롭다는 것, 그리고.”
도혁의 말을 받아 차현우가 강조했다.
“예산을 퍼부을 거라는 점이야. 확실히, 아름다운 현상이지.”
“와우. 아름답기는 한데, 특별히 더 요구하는 건 없었어? 또 두루뭉술 말하던가?”
“한국전력공사의 이미지를 제고할 수 있는 기업 이미지 광고. 전 국민이 유구히 기억할 명작을 만들어 달라고 수차례 강조했어.”
“와우, 거창하네.”
예산만큼이나 굉장한 광고주 브리핑이긴 했다. 유구한 명작이라.
도혁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러 기업 이미지 광고를 떠올리며 책상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그러는 사이 AE들이 계속 브레인스토밍을 이어갔다.
“대소비자 설문을 돌려야겠지? 당신이 생각하는 한국전력공사의 이미지는 무엇입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이번엔 설문, 별 소득 없을 거라고 봐. 한국전력공사가 딱히 이미지랄 게 있어?”
“그렇긴 하지. 일단 생각나는 대로 말해볼까?”
“전기, 공사, 감전, 전기세, 주식, 전봇대…….”
“크으. 전봇대 나왔다. 전봇대까지 나왔는데도 쓸 게 없네. 없어.”
“그러니까 한전에서 이미지 광고를 만들고 싶은 거겠지?”
하얀 백지에서 시작하는 것과 다름없는 기업 이미지였다.
탁기준이 팔짱을 끼고 앞뒤로 몸을 흔들었다.
“아무것도 없는 게 새까만 거보다는 낫잖아? 나쁜 이미지는 없으니까.”
“하긴. 지금부터 만들어가면 되지. 계속 생각나는 단어 나열해 봐.”
도혁이 앞으로 걸어 나가 보드판에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전기, 빛, 아이디어, 따뜻함, 혁신, 기업 이미지, 깐깐. 마케팅 전문가. 한전, 공사, 전력…….]
“슬슬 쓸 만한 단어가 몇 개 보이기 시작하네요.”
“어! 빛. 혁신. 마케팅. 전기.”
“흠, 아직 아이데이션 초반이긴 하지만 큰 방향성부터 잡아 나가볼까요?”
도혁이 몇몇 단어들을 가지고 조합을 시작했다.
“앞에 놓인 건 한국전력의 강점과 약점 등을 분석하고 강조 방향을 정리한 자료에요. 어제 수철이가 정리해 둔 건데 다들 공유하고 있죠?”
“보고 있습니다. 대표님.”
“특별한 점은 보이지 않습니다. 대소비자 마케팅을 적극적으로 하는 기업도 아니고, 매출이 중요하긴 하지만 이번 광고에 판매점을 깊이 고려할 필요도 없구요.”
“결국은 백지에 이미지를 그려내라는 건데.”
“네. 오늘 큰 그림은 그리고 찢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따뜻하게 갈 건지, 차갑게 갈 건지.”
“혁신을 강조한 이성 소구 쪽은 어때? 사장이 혁신 노래를 부른다고 누차 강조했잖아.”
차현우의 말에 도혁이 끄덕이며 동감했다.
“광고주와 담당자가 모두 이성적인 스타일이라서 그쪽도 일리는 있어요. 결국 최종 컨펌은 그 둘이 하게 될 거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전에 명 대표가 얼핏 감성 소구 쪽을 언급하지 않았어?”
“네. 머리가 차가운 쪽일수록 가슴이 따뜻한 무언가에 흔들리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타깃이 워낙 넓기도 하구요.”
도혁이 타깃층을 꼼꼼히 적어 내려갔다.
“이성 소구로 주요하게 어필할 수 있는 연령대는 3050 남성인데, 범위가 너무 좁아요. 어쨌든 광고주가 강조하는 주 타깃은 전 국민이니까요.”
“크으. 그 말이 얼마나 어려운 요구인지 광고주는 모르겠지?”
“전 국민 타깃이라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타깃이 없다는 말과 대동소이할 정도로 아이디어 짜기 힘들다는 건 절대 모르겠죠.”
도혁이 보드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빛으로 이어지는 따뜻한 감성, 혁신을 강조한 차가운 이성.]
“일단 양쪽 다 고려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모두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도혁이 고민하는 직원들에게 툭 말을 던졌다.
“일단은 둘 다 고려하도록 하죠. 시간이 없으니까 이틀 안에 소구 방향성은 확정하는 쪽으로 진행하구요.”
“그럽시다. 이렇게 책상머리에만 있으니까 더 머리가 안 돌아가는 것도 같고. 난 좀 나가서 한전 직원들 인터뷰도 해보고 설문 문항도 짜봐야겠다.”
“각자 아이디어 정리해서 이틀 뒤에 뵙겠습니다.”
회의가 끝나고 도혁과 한수철이 회의실에 남았다.
“우린 커피나 한 잔 더 마시고 찢어집시다.”
“그럽시다. 이걸 어떻게 조합을 하나.”
인스턴트커피를 머그잔에 털어 넣으며 도혁이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광고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눈빛을 번뜩이는 도혁을 보고 한수철이 입매를 끌어올렸다.
“벌써 계획이 다 있는 눈빛인데? 맞지?”
“없는 건 아니지. 다만 어느 쪽이 더 괜찮을까, 고민하고 있을 뿐이야.”
“올~ 나는 아직 감도 못 잡고 있는데. 힌트 좀 줘봐. 나도 머리 굴려보게.”
“그럼 나하고 같이 좀 굴려보자. 혼자보다 둘이 낫지 않겠어?”
“그럽시다. 이미지 광고는 너무 포괄적이라 할수록 어려워.”
도혁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곤 천장의 조명을 올려다보았다.
“빛이 참 따뜻하구만.”
“딱히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건조하기 짝이 없는 흔한 회사의 조명을 보고 한수철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빛이 있으니까 세상이 밝고, 따뜻한 거지.”
“그렇기는 한데 저걸 보고 그런 생각은 딱히 안 들지 않아?”
한수철이 천장의 납작한 조명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럼 다른 실물을 보면 조금 생각이 달라질 거야.”
“실물? 무슨 실물?”
“내가 방금 떠오른 광고가 있는데 말이야. 그 광고에 맞는 모델을 데려올게. 그걸 보면 소구점을 찾아낼 수 있을 거야.”
“모델? 갑자기?”
한수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혁이 미소 지으며 창고에서 무언가를 가지고 들어왔다.
“바로 이분이지.”
“엥?”
“내가 생각한 광고의 모델은 사람이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