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146화
“그래서 우리가 모델로 확정이 되어버렸다구요? 샘플 CF만이 아니라 본 CF의 모델로 말입니까?”
“그렇다니까. 회장님이 아주 마음에 들어 하시더라고. 저 사람들보다 더 자취생다운 얼굴은 찾기 어려울 거라고 하셨어.”
차현우의 말에 황도준과 도무진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마주 보았다.
“어째 칭찬을 받았는데 기분이 거시기합니다.”
“회장님이 정말 좋아하셨다니까? 전문 모델보다 훨씬 더 실감 난다고 무릎까지 치셨다고. 참, 그리고 자취방 소품은 누가 챙겼었지?”
“접니다.”
“아, 진우가 했구나. 소품 칭찬도 많이 하셨어. 아주 돼지우리를 제대로 표현했다고 혀를 내두르셨다고. 쓰레기통 위에 매트리스, 그 위에 널브러진…….”
“돼지 두 마리라고요?”
도무진이 소리를 지르자 도혁이 다가와 둘을 달랬다.
“우리 돼지들 모델료 열 배 더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본 CF 촬영이니까 그 정도는 지급해야지.”
“열 배! 이참에 공중파 데뷔도 하고 진심으로 기쁩니다. 대표님!”
“저도 엄마한테 막 전화 걸려던 참이었다니까요.”
열 배의 지폐에 곧바로 태세를 전환한 둘이었다.
도혁이 웃으며 차현우에게 감사를 표했다.
“차 팀장님 감사합니다. 정말 대단해요. 발표 준비 하루밖에 못 했는데. 저라면 절대 팀장님처럼은 못 했을 겁니다.”
“별말씀을. 결과가 좋아서 수철이 볼 낯이 서서 다행이지.”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한수철로부터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다. 위독하던 할머니가 끝내 돌아가신 것이다.
도혁이 연락을 받자마자 지시했다.
“일단 회사 이름으로 조의 화환부터 보내고 부산으로 출발하자. 사무실에 업무에 필요한 최소 인원 남기고, 아니, 최소 인원도 남기지 말고 가도록 합시다. 일은 나중에 해도 되니까.”
“지금 바로 출발하나요?”
“그래. 개인적인 사정 있으면 어쩔 수 없이 빠져야겠지만 가급적 참석하면 좋겠어. 경사는 몰라도 흉사는 마음에 남더라고.”
탁기준이 빠르게 문구를 작성해 전화를 걸었다.
“조의 화환은 내가 바로 주문 넣을게. 진우 씨 차량 조 좀 빨리 나눠줘.”
“교통비 등 일체 비용은 회사에서 출장 처리할 테니까, 좀 멀지만 다들 장례식에 가주면 좋겠습니다. 30분 내로 출발하도록 하죠.”
창립 멤버를 비롯한 대부분의 직원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경황이 없는 중에도 한수철이 고마워 어쩔 줄을 몰랐다.
“이 멀리까지 어떻게 이렇게 많이들 왔어. 회사는 어떡하고.”
“하루쯤 비워도 잘 돌아가니까 걱정 마. 정신없지?”
“장례가 그렇지 뭐. 바빠서 슬퍼할 틈도 없다. 참, 차 팀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발표 무사히 마치고 계약했다는 말 전해 들었어요.”
“별말을 다 한다. 고생 많았겠다.”
“괜찮아요. 그래도 주무시다가 편히 가셨어요. 다행이죠.”
다행이라.
도혁은 전생에 갔던 수많은 장례식장을 떠올리며 한숨지었다.
남겨진 가족들에게 가장 아픈 말이 호상이라고 했던가.
“좋은 상이 어디에 있겠나. 언제 돌아가시건 마음 아픈 건 매한가지인데. 좋은 곳에 가셨을 거야.”
“고마워. 다들 정말 감사합니다.”
향을 꽂고 할머니께 절을 올리자 한수철의 부모님이 고마움을 표했다.
“서울에서 이렇게 다들 와주고 정말 감사합니다.”
“당연히 와봐야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어! 도혁이 오빠다!”
멀리서 한수철의 동생 한수아가 도혁을 보고 달려왔다.
아직은 죽음의 무거움을 모르는 아이는 천진한 얼굴로 반가워했다.
장례식과는 어울리지 않는 밝은 미소가 퍽 아렸다.
“수아야, 잘 지냈지? 어른들 바쁘시니까 오빠하고 밥 먹자.”
“좋아요! 와! 이분들은 수철이 오빠 친구예요?”
“꼬마 수철이 동생이구나. 엄청 귀엽네!”
도혁은 수아를 곁에 앉히고 밥을 먹였다.
바쁜 장례식장에서 혼자 외로웠는지 수아는 쫑알대며 즐거워했다.
도혁은 바빠서 슬퍼할 틈도 없다던 한수철이 장례식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럴 때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주고 싶어 밤새 수아를 돌봐주기로 했다.
직장 동료는 한솥밥을 먹는 식구라고 했던가.
전생의 도혁은 저 말을 참 싫어했다.
직장 동료는 가족도 친구도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별 소용없는 인간관계라고 선을 긋고 살았었지.
하지만 하루에 9시간이 넘도록 함께 시간을 보내는 직장에서 서로를 아끼고 진심을 나눌 수 있다면, 삶이 한결 편안해지지 않을까.
직장에서 보내는 쓸데없는 감정 소모만 없어도, 일은 해버리면 그만 아닌가.
멀찌감치 한수철을 위로하며 장례식의 일을 묵묵히 돕고 있는 직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도혁은 이번 생에서만큼은 지금처럼 마음을 다해 서로를 아끼고 다독이는 회사를 만들고 싶다고 다짐했다.
비록 그 일이 회귀보다 더 판타지 같은 꿈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 * *
연일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카페 테오도르 돌풍, 해외 프리미엄 브랜드에 도전장 내밀어.]
[토종 프리미엄 카페 통했나. 후발 주자 카페 테오도르의 역습.]
[해외 경쟁업체 겨냥한 광고. ‘유쾌한 뒤통수’.]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가맹점. 토종 프리미엄 카페 시장 열리나.]
도혁은 느긋하게 사무실 1층에 오픈한 카페 테오도르의 테라스에 앉아 기사를 읽고 있었다.
한수철과 마주 앉아 라떼를 들이켜며 감탄했다.
“이 맛이지. 그래, 이 맛이야. 이거라고.”
“우리 명 대표, 십 년 만에 만난 엄마표 김치찌개 먹는 표정이다?”
“정말 라떼는 이 맛이야. 크으. 우리 광고주님 제품이 이렇게 탁월해요.”
도혁이 다시 입속에 라떼를 가득 머금은 채 미소 지었다.
부드러운 거품과 향긋한 원두의 향이 기가 막히게 어우러진 좋은 커피였다.
“참, 후속 기사 소스는 슬쩍 흘렸지?”
“응. 아마 내일쯤 기사 나갈 거야. 오늘유업 자회사라고 대문짝만하게 실어준대.”
“잘됐네. 오늘유업 목장 체험 프로모션 건의도 들어갔지?”
“응. 목장 아저씨가 아주 좋아하시더라. 치즈 요리 체험 수업 코스도 짜고 있다고 하셨어.”
“잘됐네. 우유 CF 재촬영도 마쳤고, 그럼 이제 굵직한 건 대충 정리가 된 건가?”
도혁이 일어서며 신문을 접었다.
“자, 그럼 출발합시다. 제주도로.”
드디어 오늘유업 건이 마무리되고 제주도 워크숍을 가게 되었다.
기사 등 후속 조치 때문에 도혁과 한수철은 늦게 출발했고 다른 직원들은 이미 하루 전에 제주도에 도착해 있었다.
제주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직원들이 둘을 맞아주었다.
[I LOVE 명도혁♡, 한수철♡]
[제주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스케치북에 환영 메시지까지 써 와 유난을 떠는 직원들을 보자 웃음이 터졌다.
“누가 보면 현지 가이드라도 되는 줄 알겠다.”
“재미로 해본 거죠.”
“카피 누가 썼는지 모르겠지만 재미없어. 카피 연구 모임이라도 만들어야 할 판인데?”
“아니, 빵 터지셨잖아요. 거짓 웃음이었습니까?”
“이 자식! 진짜 카피 누가 썼어! 빠져 가지고.”
황도준의 목에 헤드락을 걸며 도혁이 장난을 쳤다.
멀찌감치 진짜 오늘의 가이드 도무진이 나타났다.
“제가 대표님의 특별 지시로 제주도 코스를 빈틈없이 준비했습니다. 따라오시죠!”
“어릴 때 제주도 살았다고 해서 안내 맡겼더니, 깃발 무슨 일이냐.”
“우리가 해외 관광객이니? 왜 여권도 달라고 하지!”
“모두 조용히 해주시기 바랍니다. 인솔이 안 되는군요.”
아무튼 왁자지껄 개성 넘치는 DW애드의 첫 번째 워크숍이 시작되었다.
야무지게 코스를 준비했다는 도무진의 안내로 숙소로 이동해 짐을 푼 후, 첫 번째 장소로 이동했다.
대형 렌터카에서 마이크를 잡은 도무진이 큰 소리로 외쳤다.
“여러분 첫 번째 코스는 바로!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바로 이번 주에 오픈한 따끈따끈한 장소. 카페 테오도르 제주 1호점입니다!”
“뭐? 으…… 트라우마 올라오려고 하네. 여기까지 와서 오늘유업 카페에 가야겠냐?”
“후회 없으실 겁니다. 커피 한잔하시고 시작하시죠.”
여기까지 와서 광고주네 카페에 가야겠느냐던 직원들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환호성을 질렀다.
“어머! 여기 완전 예쁘다. 와!”
“바다 끝내준다. 에메랄드 빛 바다라는 게 이런 거구나.”
“카메라 어딨어. 오늘 사진 누가 맡기로 했지?”
시원하게 뚫린 해변이 그대로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에 위치한 카페였다.
푸른 바다의 빛깔과 넘실대는 파도, 그리고 기분 좋게 불어오는 늦봄의 바람이 코끝을 스치자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노랫소리를 들은 최민아가 도혁의 곁으로 다가왔다.
“보고 싶다~ 이런 곳에 오니 더욱더 보고 싶은 봄날~”
“무슨 노래예요? 처음 들어보는데요.”
“아. 미래에 세계적으로 대히트할 노래. 좋지?”
“음치가 미래의 히트곡을 논하는 거예요?”
“그런가, 아무튼 이렇게 카페 테라스에서 바다 보고 있으니까 속이 확 트이는 것 같다.”
음치이길 다행이다.
저도 모르게 부르고만 미래의 노래에 대해 변명을 늘어놓으며 도혁이 카메라를 들었다.
“민아야. 여기 봐, 이야. 우리 수석 디자이너 옆모습이 예술이십니다.”
“언제부터 수석 디자이너가 됐대요?”
“내 마음속에 대한민국 최고 디자이너는 최민아뿐인데?”
“입에 침이나 바르세요.”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승천하는 광대를 추스르지 못하는 최민아였다.
뷰파인더 속의 최민아는 햇살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전생보다 훨씬 밝아 보이는 모습에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많이 힘들지? 내가 일거리 너무 던지잖아.”
“우리 대표님 양심은 있네. 일 많은 거 알기는 아는구나?”
“뽑아도 뽑아도 모자라는 게 디자이너라더니. 요즘 정말 실감한다.”
전생에 제작국장이 디자이너 기근을 호소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감각이 있으면서도 성실해야 하는 것이 광고 회사의 디자이너이다.
거기다 손이 빠르면서도 최소한의 퀄리티는 무조건 기한 내에 맞춰내야 한다.
일 잘하고 사람 좋고 손 빠르고 감각까지 있는 디자이너가 흔해야 말이지.
최민아가 걱정 말라며 오히려 도혁을 격려했다.
“일은 많아도 우리 디자인팀 괜찮아요. 팀워크도 끝내주고 기획 쪽에서 전폭적으로 믿어주시잖아요. 특히 대표님이나 탁기준 팀장님이 광고주들 무리한 요구하면 잘 막아주시구요. 이런 환경에서 디자인하기 쉽지 않다구요.”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고.”
“무엇보다 제일 편한 건 기획 쪽에서 딱 컨셉을 정확하게 잡아서 가져온다는 거예요. ‘심플한데 화려하고, 단순한데 심금을 울려라’같이 뜬구름 잡는 AE가 없는 것도 복이라고 생각해요.”
“그래. 역시 긍정왕 최민아답네.”
“태강애드에 있었으면 이것보다 백배는 더 갈렸을 걸요?”
태강애드 얘기가 나오자 도혁의 머릿속에 퍼뜩 무언가가 스쳐 갔다.
“우리 인턴을 좀 뽑아볼까? 한두 달 지나면 여름 방학이니까 대학생 인턴십 과정을 개설하는 거지.”
“오! 우리가 태강에서 했던 인턴십이요? 그거 좋은데요?”
“잡다한 일은 좀 인턴한테 줘버리고, 대학생들 톡톡 튀는 아이디어 들어보는 것도 직원들에게 좋은 자극이 될 거야. 그리고 또 혹시 알아? 우리처럼 유능한 인턴이 나타날지.”
도혁이 입매를 끌어올리며 부연했다.
“워크숍 끝나고 서울 가면 천천히 고민해 보자. 그 전에 우리가 워크숍에서 할 일이 많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