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143화
회귀의 쓴맛.
그렇다.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하듯 회귀에도 쓴맛이 있다.
미래를 알고 미리 조심하며 돈길을 열어 가족과 직원에게 흩뿌리는 단맛과 달리, 미래를 알기에 씁쓸한 일도 있다는 것이다.
다름 아닌 우유 시장 말이다.
회귀 전 대한민국의, 아니, 전 세계의 낙농업은 쉽지 않은 길을 걷고 있었다.
인구가 줄어들어 초등학교 급식이나 군 배식으로도 충분히 소비량을 채우지 못했고 기호 음료로서 선택받는 비율도 줄어들었다.
식문화에 유제품이 깊숙이 자리 잡은 미국에서조차 우유 소비 급감으로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었으니까.
‘어떤 주에서는 우유를 쏟아 버린다고 했을 정도로 심각했었지. 후우, 이럴 땐 차라리 모르는 게 약인데 말이지.’
생각에 잠긴 채 활로를 모색하고 있던 도혁의 앞에 한 잔의 우유가 놓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실까. 명 대표 모닝 우유 한잔 마시고 업무 시작합시다.”
“탁 팀장님, 커피 대신 가져오신 거군요.”
“그럼. 태강애드 때부터 수도 없이 강조했잖아? 제품을 물릴 때까지 써봐야 한다고. 오케이?”
탁기준이 탁! 소리가 나게 우유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슬프지만 모닝커피 대신 모닝우유를 마시는 날은 오지 않을 거야.”
“기호 식품군으로 시장을 뚫기는 어렵다는 말이군요.”
“식사용이나 주 식단 이용률을 고려해 봐도 쉽지가 않아요. 우리나라 식단에 우유가 전혀 안 어울린단 말이야. 고작 해봐야 시리얼에 말아 먹는 정도지.”
한숨을 내쉬는 걸보니 탁기준도 머리를 싸매서 고민했지만 쉽지 않은 싸움이라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결국은 가공 유제품의 싸움이 될 거예요. 가공유라든가 치즈, 요거트 등 우유를 이용한 제품군을 다양하게 개발해야죠.”
“맞는 말이야. 그런 면에서 커피 시장 진출은 아주 고무적이라고 생각해. 카페 프랜차이즈도 처음엔 좀 시기상조인가 했는데, 볼수록 지금 진입하는 게 안정적이겠더라고.”
탁기준은 끄덕이면서도 정확하게 팩트를 짚어주었다.
“가공 유제품과 커피로 인한 소비 부분은 마케팅 제안서에 당연히 들어가겠지만 결국, 광고주가 원하는 건 순수한 우유 판매의 촉진인 거지?”
“맞아요. 흰 우유는 오늘유업의 근간이 되는 핵심 사업이니까요.”
도혁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어느 날 전 세계의 광고 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어 다른 분야로 확장해 사업한다고 해도, 광고에 대한 미련을 접을 수 있을까?
도혁은 오늘유업 회장의 심정을 십분 헤아리며 우유를 벌컥였다.
“일단 시작해 봅시다. 머리 굴리다 보면 나오는 게 있겠죠. 팀장급과 AE들 회의실로 모아주세요.”
회의실에 모인 직원들이 자리에 앉자마자 탄식을 내뱉었다.
친절한 탁기준 팀장이 커피 대신 우유를 세팅해 놓은 것이다.
“태세 전환 무슨 일입니까. 카페인이 있다고 일이 잘되는 건 아니지만 없으면 안 된다면서요.”
“그거야 카페 캠페인 할 때 말이구요. 건강에는 우유가 최고입니다.”
“아 정말 이렇게 강요하면 먹기가 싫다고요. 꼭 우리 엄마 같네.”
“잠깐만.”
도혁이 미간을 좁힌 채 직원들의 말을 막았다.
“전에 도준이랑 무진이도 그런 말 한 적이 있어. 우유를 자꾸 먹으라고 해서 싫다, 모범생 같은 느낌이라고 했던가?”
“맞아. 나도 기억난다. 요즘 젊은 애들 다 그렇지, 뭐. 음료수 사 먹을 때 가게에서 우유 집는 애들 손꼽을걸? 집에 가면 1.5리터 우유는 다들 냉장고에 있잖아.”
“집에 가면 다 있다, 집에 있다…….”
입속을 말을 되뇌는 도혁을 보고 한수철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떠오르는 모양인데? 명 대표 저 표정 익숙하지 않아?”
“맞아. 나도 기대 중이야.”
초롱초롱 눈빛을 반짝이는 직원들을 보고 도혁이 뜻밖의 말을 던졌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합시다. 해산하는 게 좋겠어요.”
“네?? 대표님 방금 모이라고 하셨잖아요. 회의를 그만하는 방향으로 기대했던 건 아닌데요?”
직원들이 어리둥절해 눈을 끔뻑였다.
“이번엔 제품 분석을 반대로 한번 해보죠. 우유를 아예 마시지 마세요.”
“뭐? 이건 또 무슨 말이야. 갑자기 우유를 마시지 말라고?”
“제품 분석을 제품 없이 하라는 거야?”
“넘쳐 나서 싫다면서요. 그럼 아예 제거해 보자고요. 우유가 없으면 세상이 얼마나 불편해지는지 실험해 봅시다.”
도혁이 웃으며 부연했다.
“전 직원이 오늘부터 삼 일간 우유 없는 세상에 살아보는 겁니다. 절대로 아무도 우유 마시면 안 됩니다. 절대로!”
* * *
우유가 사라진 도혁의 집.
하품을 하며 주방으로 걸어 나온 명현진이 냉장고 문을 열고 소리쳤다.
“우유 어딨어? 아니, 집에 우유 한 통도 없어?”
“내가 치웠어. 오늘부터 사흘간 우리 집에 우유는 없어.”
“이게 무슨 헛소리야. 시비 거는 법이 다양하기도 하지. 명도혁 너 죽을래? 나 아침마다 우유 마시는 거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거지.”
“우리 누나 천재네.”
매를 벌었다.
등짝을 호되게 두드려 맞고 도혁이 오늘유업 캠페인에 대해 말해주었다.
“회사에서 진행하는 유제품 광고 때문이니까 협조 좀 해줘. 사흘간 우유 없이 지내보면서 아이디어를 짜보기로 했어. 우유 못 먹는다고 당장 죽는 거 아니잖아?”
“진짜 가지가지 한다. 너님만 안 쳐드시면 되잖아요. 나한테 왜 이러세요.”
“나야 원래 우유를 잘 안 먹는 사람이니까 찐 소비자 명현진에게 실험을 해보는 거라고나 할까?”
“내가 오늘 너 죽이고 출근한다. 이리 안 와?”
이번엔 간신히 피했다. 소파 뒤로 재빠르게 피신한 뒤 도혁이 피식거리자 명현진이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야! 시리얼은? 물에 타 먹냐? 아놔, 미치겠네.”
“밥 먹어 밥. 한국 사람 밥심인데, 뭔 미국 사람 코스프레야.”
“안 넘어가니까 못 먹는 거잖아. 아, 너무 짜증 나네. 밥도 안 넘어가는데 바짝 마른 시리얼을 어떻게 먹냐고.”
“그건 누나 사정이고. 이야, 이렇게 FGI(Focus Group Interview 대소비자 심층 면접조사)를 확실하게 할 수 있을 줄이야.”
“야이 자식이 F 뭐? 내가 모른다고 막말하는 거냐? 그거 욕이지!!!”
소란한 도혁의 집처럼 시리얼과 우유가 간절한 집이 또 있었다.
“내 시리어얼이…… 어딨더~ 어라.”
아재처럼 문장에 멜로디를 갖다 붙이며 주방으로 향하던 강태오가 멈칫했다.
“이런, 나 오늘 우유 못 마시네. 하아……. 그러어며언…… 밥이 어딨더어어어~ 라.”
강태오 자취방에 밥이 있을 리가. 밥솥도 없는 주제에 잘도 찾고 있었다.
노래로 허전한 마음을 달래봤지만 속이 헛헛했다.
잠깐 시리얼을 노려보던 강태오가 입속에 우걱우걱 시리얼을 털어 넣었다.
“아, 씨X 목말라.”
물을 마셔봤지만 우유의 빈자리를 메우기엔 역부족이었다.
“맥주 없는 치킨 먹는 기분이네. 아니지 치킨은 목이라도 안 막히지.”
턱턱 막힌 목을 뚫기 위해 가슴을 두드리는 손길이 빨라졌다.
고구마 백만 개를 먹는 기분이었다.
같은 시각 이진우의 집. 이 집엔 진짜 고구마가 있었다.
“아침에 달걀 프라이랑 고구마 먹고 가. 어제 시골집에서 보내주셨는데, 밤고구마가 정말 달더구나.”
“어머니, 왜 하필 밤 고구마입니까? 호박 고구마는 없습니까?”
“얘가 음식 투정을 다 하네. 아침밥 안 넘어간다고 해서 기껏 삶아놨더니. 외할머니가 해남에서 유기농으로 직접 키우신 거야. 너 할머니한테 일러준다?”
“후우. 그럼 외할머니의 성의를 봐서 한 개만 먹어보겠습니다.”
이진우가 고구마 한입을 입에 물고 꿀꺽 삼켰다.
어머니 말처럼 달콤하기 그지없는 밤고구마였기에 고소한 우유 한 모금이 간절했다.
‘하지만 대표님 말씀을 어길 수는 없지. 김치랑 먹는 건 싫은데.’
평소 편식이 심한 이진우는 김치를 잘 먹지 않았다.
다시 달콤한 맛에 이끌려 고구마를 한입 베어 물었다가 금세 후회를 했다.
“으…… 갑갑해. 물. 물 좀 주십시오.”
“진우야. 너 참, 우유 좋아하잖아. 우유랑 밤고구마 같이 먹으면 꿀맛이지. 잠깐만 기다려 봐.”
“아닙니다. 저는 사흘간 우유를 먹을 수 없습니다.”
“얘가 아침부터 이상한 소리를 자꾸 하네. 왜 우유를 못 먹는다는 거야?”
“아무튼 저는 그런 몸이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다음 순간 더 이상해진 이진우를 보고 놀라고 말았다.
이진우가 울그락 불그락 얼굴을 찡그리며 소리친 것이다.
“호박 고구마!!”
“뭐?”
“어머니! 앞으로 저는 무조건 호박 고구마만 먹겠습니다.”
“진우야, 갑자기 뭐라고?”
“호박 고구마요. 호 박 고 구 마!!!!!”
신혼집의 풍경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바쁜 맞벌이 부부의 아침상에 토스트가 올랐다. 물론 식단에서 우유는 빠졌다.
“거기 대표님 독특한 줄은 알았지만 참, 특이하다. 광고할 제품을 사용해야지 사용하지 말라니.”
“몰라. 대표가 까라니까 까고 있기는 하지만 토스트 이거 우유 없이 먹으려니까 아우, 못 할 짓이네.”
“촉촉하게 프렌치토스트라도 해주려고 했는데 그것도 우유 들어가서 못 만들었어.”
“아이 씨.”
투덜거리는 탁기준이 커피를 내리려다 집어치웠다.
“자기 속 쓰려서 아침에 커피 못 마시잖아.”
“그러니까! 아, 짜증 나.”
입속에 우걱우걱 토스트를 욱여넣던 탁기준이 잼을 한 숟갈 푹 퍼먹었다.
“이러니까 좀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자기야. 그만 퍼먹어. 그러다가 당뇨 오겠어…….”
당뇨가 올 것 같은 탁기준과 달리 최민아, 황도준, 그리고 도무진은 저혈당에 시달리고 있었다.
급한 시안 작업을 마무리하느라 사무실에서 밤을 새운 것이다.
“아 속 쓰려. 탕비실에 그, 오늘우유 엄청 많지 않아? 제품 분석한다고 광고주가 잔뜩 싸줬다고 했거든.”
“엇! 대표님이 먹지 말라고 했는데. 우유 끊으라고 신신당부하셨잖아요.”
“아 몰라. 속 쓰려 죽겠는데 좀 갖다 먹자. 그리고 저 우유 상하면 곤란하잖아?”
“이럴 줄 알고 멸균 우유만 남겼다던데? 아놔 철저한 대표님.”
“그러지 말고 몰래 세 개만…….”
“이 자식들 나 몰래 뭘 한다고?”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빨리 출근한 도혁을 보고 셋이 화들짝 놀랐다.
“어우, 놀라라. 대표님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사나운 짐승 한 마리가 날뛰는 바람에 생명 연장하려고 일찍 왔다.”
“네??”
길길이 날뛰던 명현진의 못생긴 얼굴을 떠올리며 도혁이 미간을 좁혔다.
“이 자식들 몰래 우유 먹으려고 한 거냐? 싫어한다며.”
“배가 고파서요. 대표님, 그냥 우유 마시면 안 됩니까? 쇼미더 우유! 네?”
“맞아요. 못 먹게 하니까 먹고 싶어 죽겠다고요.”
“이런 반골 자식들이 있나.”
도혁이 혀를 끌끌 차며 어이없어했다.
“엄마가 먹으라고 해서 그렇게들 먹기 싫었다면서요. 어?”
“집에 당연히 있고 언제나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음식을 못 먹는다고 생각하니까 허전하더라구요. 우유 없는 냉장고의 고통을 깨달았다고나 할까요.”
있으면 좋은 게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될 것.
소비의 시작.
물꼬를 튼 것 같다.
도혁은 냉장고에서 우유 박스를 꺼내 뿌렸다.
“마음껏 먹어라. 대신 너네, 이번 샘플 CF 모델 좀 서줘야겠다.”
“네?? CF요?”
“그래. 본 광고 말고 샘플만 찍는 거야. 부담 없이, 오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