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141화
“그럼 준비해 온 샘플 CF를 통해 후발 주자의 도발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시겠습니다. 아마 한눈에 저의 말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한수철이 리모컨을 클릭하자 샘플 CF 영상이 펼쳐졌다.
세련된 인테리어의 카페. 점심시간인지 줄이 길고 분주한 모습이다.
카페의 유니폼을 근사하게 차려입은 공찬혁이 카운터에서 주문을 받고 있다.
긴 줄을 한번 훑어보는 공찬혁. 빠르게 주문을 받으며 매력적으로 미소 짓는 공찬혁이 다음 손님을 맞는다.
“카페 테오도르입니다. 어떤 걸로 준비해 드릴까요?”
습관적으로 주문을 받던 공찬혁의 눈이 커다래진다.
손님은 다름 아닌 건너편 별다방 유니폼을 입고 얼굴까지 초록색으로 분장한 아르바이트생이었던 것.
별다방 로고 분장을 한 전서윤이 멋쩍은 미소를 보이며 수줍게 주문한다.
본인도 민망한 모습이다.
“카페라떼 주세요. 라떼는 여기가 신선해서 말이죠.”
여기까지 CF를 본 좌중에 웃음이 터졌다.
껄껄 호탕하게 웃어젖힌 회장이 한수철에게 물었다.
“이거 사이다 한 사발 들이켠 것처럼 속 시원하기는 한데, 저 정도로 별다방을 공격해도 되는 겁니까?”
“공격이라기보단 사실인걸요. 농원에서 즉시 배송한 신선한 원유와 국내 생산 원두를 사용한 신선한 라떼를 그들이 따라갈 수 있을까요?”
“하하, 그렇다 해도 저 유니폼을 입은 아르바이트생이 우리 카페에 줄을 서서 먹는다니. 완전 별다방 뒤통수 제대로 때리는데요?”
“그래서 1등은 절대 못 하는 광고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1등의 이미지를 이용해 너네보다 우리가 더 잘나간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캠페인이니까요. 해외에서는 블랙 코믹 소구로 흔히 사용하곤 합니다.”
한수철이 이해를 돕기 위해 해외 광고의 예시를 보여주었다.
“여기 자판기를 본 어린아이가 P사의 콜라를 뽑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키가 닿지 않죠. 한숨을 내쉰 아이는 P사의 콜라 대신 C사 콜라를 뽑아요. 그러곤.”
“이런, 먹지 않고 콜라를 버리는군요. 어허, 지금 C사 콜라 캔을 밟고 올라서네요.”
“맞습니다. 그걸 밟고 올라서서 P사 콜라 버튼을 누르는 겁니다.”
“하하. 이거 C사에서 보면 많이 열받겠는데요? 꼬마한테까지 밟힌 거 아닙니까?”
“꼬마가 포인트입니다. 아직은 우리가 2등이지만, 다음 세대는 P사가 우위를 점할 거라는 무언의 암시라고나 할까요? 그러니 우리 광고 정도면 양반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오늘유업에서 만든 라떼는 분명히 신선할 테니까요.”
한수철의 말에 회장이 손바닥으로 탁자를 탁, 쳤다.
이미 만족한 표정의 회장의 눈앞에 옥외광고 시안이 이어서 펼쳐졌다.
CF에서 분주했던 장면을 뒤에서 찍은 한 컷의 사진.
상단에 ‘카페 테오도르’의 간판이 보이는 가운데, 별다방 유니폼을 입고 초록 얼굴로 분장한 여자가 테오도르 매장에서 줄을 서 있는 모습이다.
주변에서 힐끗대는 사람들의 표정까지 생동감 있게 표현된 장면이었다.
“한 장에 메시지가 다 담겨 있군요. CF를 보지 않고 이 광고만 봐도 직관적으로 이해하기에 어려움이 없겠습니다.”
“그것을 노리고 찍은 컷이니까요. 다음은 제품력을 상세히 어필할 신문 및 인쇄 광고 시안 보시겠습니다.”
커피 장인이 원두를 양손으로 가득 들어 올려 향을 맡는 모습. 아래로 카페가 펼쳐진다.
“당신의 라떼는 신선합니까?”
국내산 스페셜 원두 한 시간 내 로스팅, 국내산 1등급 원유의 신선함.
카페 테오도르
바리스타 월드 챔피언 테오도르, 그 장인의 숨결을 만나보세요.
“아래 바디 카피를 통해 테오도르 브랜드와 제품의 강점을 직접적으로 설명할 예정입니다. 앞선 별다방을 타깃으로 한 광고가 티저처럼 코믹한 방향으로 나간다면, 이 광고를 이어 게시함으로써 이성적 소구를 강화할 생각입니다.”
“좋습니다. 좋아요.”
오늘유업 회장이 홍보팀장을 보곤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곤 곧바로 도혁을 돌아보았다.
“명도혁 대표. 마케팅 제안서 감명 깊게 봤습니다. 기대한 이상을 보여줬습니다. 기존에 하던 대행사도 아닌데 CF까지 만들어 오시고. 열정이 넘치는구만.”
“감사합니다. 회장님.”
“다만 이 사안은 프랜차이즈 사업을 확장하는 것인 만큼 쉬이 이 자리에서 결론을 낼 수가 없어요. 충분한 시장성 검토를 거쳐 최대한 추진하는 방향으로 해보지요. 결과는 홍보팀장 통해서 고지할 겁니다.”
“네. 회장님.”
“이건 차세대 사업이라 그렇다 치고. 명 대표.”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던 회장의 눈빛이 진지하게 굳어졌다.
“우리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게 있습니다.”
“우유 시장, 말씀이십니까?”
“역시 척 하면 척 통하는 친구구만. AT그룹에서 극찬할 만해.”
젊은 사람이 말이 통한다며 끄덕인 회장이 도혁에게 또 하나의 숙제를 던졌다.
“우유도 커피처럼 좀 살려봐 주시오. 이 주일이면 되겠나?”
* * *
“그래서 우유 캠페인 제안서를 이주 만에 가져가기로 하신 겁니까?”
“아니, 삼 주. 일주일만 더 달라고 했어.”
이진우가 도혁에게 처음으로 볼멘소리를 했다.
“광고주들은 성격이 모두 급한가 봅니다.”
“아버님은 어떠셔? 엑슨도 만만치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아, 저희 아버지 말입니까? 하아, 뜨거운 차도 못 드십니다. 성격이 너무 급해서 입을 여러 번 데셨다고 합니다.”
“원래 성공한 사업가들은 급해. 월급쟁이랑 다르게 시간이 돈이거든.”
카피라이터를 하던 때는 도혁도 이진우처럼 광고주들 성질 급하다고 욕 많이 했었다.
하지만 월급쟁이로 평생 살았던 전생과 달리 사업을 하면서 광고주들의 심정을 백번 이해하게 되었다.
내 손에 딸린 회사 식구들, 그들의 가족, 그 책임감에 24시간이 모자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이진우의 심정도 누구보다 이해되었다. 대표가 아닌 한 사람의 크리에이터로서.
“샘플 CF 만들기 벅차지? 이렇게까지 PT에서 만들어가기는 쉽지 않은 거 나도 알아.”
“최종 CF 시안처럼 디테일까지 챙기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최선의 완성도를 내려다보니 힘들긴 합니다. 기간이 항상 너무 짧습니다. 대표님!”
다른 대행사에 비해 가장 고생하는 게 바로 영상팀일 거다.
PT 때는 콘티 정도만 들어가는 회사도 많은데, DW애드에서는 샘플 CF를 어떻게든 완성해 왔기에 강태오와 이진우가 갈려 나가고 있었다.
샘플이라기엔 퀄리티도 상당한 수준이었고.
“샘플 CF 찍는다고 프레젠테이션 일정을 더 길게 잡아 오는 것도 아니고 정말 수고가 많다. 그치만 우리 승률이 이렇게 높은 데는 영상팀의 사전 CF 작업이 가장 크게 기여한다고 생각해.”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당연하지. 진우가 콘티를 잘 그리긴 해도 광고주 입장에서는 직관적으로 CF를 보는 게 제일 설득하기 쉽거든.”
“야! 이진우. 명 대표한테 그만 징징대!”
멀찌감치 강태오가 다가오며 이진우를 혼냈다.
“대신에 PT 붙고 나면 훨씬 편안하잖아. 편집하고 디테일 손만 보면 되니까. 어차피 할 일 당겨 하는 건데 뭘 그렇게 징징대나.”
“죄송합니다. 팀장님. 삼 주라는 말에 잠깐 울컥했습니다.”
“아니야. 당연히 할 말을 한 거야.”
연신 죄송하다는 이진우를 다독이며 도혁이 강태오에게 물었다.
“프로덕션 쪽은 어때요? 일하기 불편한 점은 없어요?”
“아직까진 훌륭해. 큰 데랑 해봐야 삐걱거리기만 하지. 여기는 손발 맞추기 편해서 좋아.”
“다행이네요. 문제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아예 인수해 버릴까요?”
여력이 닿는 대로 프로덕션을 인수할 생각도 진작에 하고 있었다. 외주가 효율적인 면도 있었기에 좀 더 따져봐야겠지만.
강태오 역시 도혁과 같은 생각인 듯했다.
“좀 지켜보고. 아직은 외주가 편해. 그때그때 팀 꾸리는 편이 나을 수도 있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음향도 조명도 감독마다 결이 조금씩 달라서 말이지.”
“하긴. 우리처럼 광고 톤이 다양한 회사도 별로 없기는 하죠. 태오 선배가 잘 맞춰서 팀 꾸려주세요. 돈은 얼마든지 댈 테니까.”
“크으. 달달하구만. 돈 준다는 사람이 제일 좋아.”
강태오가 직원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명 대표가 또 돈을 뿌린답니다! 흩날려 준다니까 다들 모여보세요. 이번엔 우유 팔아야 한다는데요?”
“우유요?”
“이번엔 파트라슈 되는 건가요?”
직원들이 하나둘 회의실로 모이고 도혁이 오늘유업 유제품에 대한 브리핑을 시작했다.
“우유 소비가 점점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회장님이 우유도 좀 살려달라고 말씀하셨을 만큼.”
“애초에 커피 시장에 뛰어든 것 자체가 라떼 만들어서 우유 소비량 늘리려고 한 거니까요.”
“맞습니다. 그래서 프랜차이즈에 라떼 부분을 강조한 게 주요하게 통하기도 했고.”
포문을 뗀 도혁이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우유 시장의 축소는 쌀 소비가 줄어든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어요. 먹을 게 너무 많아진 거죠.”
“맞아. 예전과 달리 세상에 맛있는 게 너무 많아. 예전에야 밥심으로 살고 아이들은 키 크려면 우유 마셔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으니까.”
탁기준이 제 앞에 놓인 오늘유업 우유 팩을 손끝으로 잡아 한 바퀴 돌렸다.
“그래도 성장기에 이만한 식품이 없는데 말이지. 나도 우유 먹고 큰 거라고.”
“성장기뿐 아니라 전 세대에 필요한 건강식품이죠. 요즘은 여러 연구를 통해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래도 당질 가득 들어간 음료보다는 훨씬 나은 건 사실이니까.”
“근데 다른 음료수에 비해서 너무 건전한 맛이 난다고 해야 하나? 솔직히 공부 같은 이미지입니다.”
황도준의 말에 도무진이 세차게 고개를 주억였다.
“엄마가 자꾸 먹어라 먹어라 하니까 먹기 싫은 느낌요. 공부해라 해라 하면 하기 싫은 것처럼.”
“오호. 계속 말해봐. 아무 말이나 좋으니까.”
“범생이 같아서 싫다는 말이죠. 급식으로 나오면 버린 적도 많았어요.”
“이런 악덕 부르주아지를 봤나.”
“아무 말이나 하라면서요.”
투덕거리면서도 다들 메모지에 생각나는 아이디어를 열심히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한참 동안 자유로운 브레인스토밍이 이어지고 각자 조사할 사항과 업무 분장을 완료했다.
“자, 대략적으로 1차 브리핑과 아이데이션은 끝내겠습니다. 직원 여러분들 회의실 나가기 전에 한 가지 고지할 사항이 있어요.”
“네! 말씀하세요, 대표님.”
“우리 이번 삼 주 프로젝트까지만 하고 워크숍 한번 갑시다. 그동안 다들 고생했는데 여행 삼아서요.”
“오!! 대표님! 완전 좋아요!”
“굿 아이디어다. 가끔 리프레시도 필요하지.”
직원들이 환호성을 지르는 가운데 최민아가 물었다.
“혹시 어디로 가는 거예요? 또 강릉 가서 시장님 만나고 업무 겸해서 보고 오는 건 아니겠죠?”
“참, 지난번에 강릉 가서 지자체 일 또 가져왔지? 설마 그런 거야?”
“아닙니다. 이번에는 철저하게 직원 단합을 위해서 가는 거예요. 장소는 의견 받을게요. 어디가 좋겠습니까?”
전국 방방곡곡의 지명이 쏟아지는 가운데 책상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있던 강태오가 툭 말을 뱉었다.
세상 둘도 없이 시크한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스코틀랜드, 어때?”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