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138화
무려 100번째 카페다.
시장조사를 위해 카페 투어에 나선 것이다.
이번엔 카페 프랜차이즈의 가장 주요한 타깃인 20대 여성 최민아를 데려왔다.
최민아가 지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소비자 조사 쪽으로 배정해 달라고 할 걸 그랬어요.”
“카페 투어 간다는 말에 두 손 들고 지원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내가 백 군데 정도 돌아다닐 거라고 말했을 텐데?”
“진짜 백 개나 갈 줄 알았냐구요. 그것도 전국구로! 하여간 대표님 유난스러운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요.”
“항상 말하잖아. 지나치게 해야 한다고. 그렇게 죽어라 열심히 해도 중간을 못 가요.”
“아우, 그런 말 할 때 보면 꼭 우리 아빠 같아요. 남들이 보기에 미친놈처럼 공부해야 중위권 대학이라도 간다고 만날 잔소리했는데.”
미안하다.
어쩌다 보니 아재의 꼰대력이 튀어나왔나 보다. 하지만 팩트는 팩트니까.
아무튼 지나칠 정도로 집요하게 카페 투어를 진행하고 있었다.
강릉에 이르러서는 최민아가 결국 폭발했다.
“아, 정말 강원도까지 와서 커피를 마시게 될 줄이야. 좋은 카페는 서울에 많지 않아요?”
“그 바리스타들은 서울에서 자기 카페 하고 있잖아. 그런 사람 설득하기 쉽지 않아. 프라이드가 장난 없다고.”
“하긴. 그래서 이렇게 멀리 지방으로 다니시는구나. 날씨도 구리고 비 올 것 같지 않아요?”
“구린 거 생각하지 말고 좋은 일에 집중해 봐. 저기 바다 보이기 시작하네.”
“오! 진짜 바다 보이네요. 물빛이 끝내주네. 드라이브 온 것 같아요.”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고 그제야 최민아의 미간이 펴졌다.
미래에 이 바닷길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카페 거리로 변모한다.
해변을 따라 쭉 카페 거리가 형성되고 강릉은 커피 특화 도시로 발돋움하게 되는 것이다.
자꾸만 산길을 타고 올라가는 도혁을 보며 최민아가 농담을 던졌다.
“저기요, 대표님. 우리 엄마가 남자랑 단둘이 으슥한 데 가는 거 아니라고 했거든요?”
“내가 남자냐?”
“그럼 여자예요? 어디 가는데 자꾸 산으로 올라가는 건데요.”
“창문 열고 식빵이라도 뿌리시든가. 헨델과 그레델처럼 길 잃어버리면 찾아와야지.”
“재미없거든요, 대표님?”
장난인 줄 알면서도 최민아가 창문을 열고 두리번거렸다.
도혁이 웃으며 산 중턱에 차를 대었다.
“내리자. 여기 커피 농장이 있어.”
“농장이요?”
최민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기, 커피 농장은 아프리카에나 있는 거 아니에요? 이렇게 추운 강원도에 커피 농장이 있다구요?”
“일단 따라와 봐.”
산기슭에 숨어 있는 거대한 비닐하우스.
그곳의 문을 열자 등산 모자를 꾹 눌러쓴 아저씨가 고개를 돌렸다.
여기가 맞구나.
겨우 찾아낸 국내 최초의 커피 농장이었다.
“계십니까?”
“거기 누구쇼?”
“안녕하세요. 며칠 전에 연락드렸던 DW애드 코리아에서 왔습니다. 커피 농장 관련해서 취재도 하고 드릴 말씀도 있어서 찾아왔어요.”
“아, 명, 어쩌고 하는 서울 회사 대표님이구나. 저는 여기 농원을 운영하고 있는 이중석입니다. 일단 이쪽으로 들어오시구려.”
온화한 인상의 남자가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전생에 커피 농장의 인근 카페에서 마신 커피가 인상에 남아 찾아온 것인데, 생각보다 농장 주인이 젊어 보였다. 삼십 대 중반 정도?
명함을 주고받으며 도혁이 인사치레를 했다.
“강릉에서 직접 커피를 재배하는 분이 계시다고 해서 찾아왔습니다. 대표님 굉장히 젊으시네요. 농사짓는 분이라서 지긋한 연배를 예상했거든요.”
“저야말로 깜짝 놀랐는데요? 서울에 있는 광고 회사 대표라고 하니, 행님인 줄 알았제.”
도혁과 최민아를 번갈아 보며 이중석이 물었다.
“이 두메산골에 커피 농사짓는 사람이 박혀 있는 줄 어떻게 알고 오셨소?”
“제가 커피에 관심이 많아서 이것저것 자료 조사를 하다가 한국에도 농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남부 지방이 아니라 강릉에 있는 비닐하우스라는 걸 듣고 한번 가봐야지, 하다가 오늘 방문하게 됐습니다.”
“그 정도면 커피 매니아시구만. 아무튼 잘 왔습니다.”
이중석이 손수 커피나무를 구경시켜 주었다.
잎사귀를 돌보는 그의 손길에 애정이 가득 묻어났다.
“커피라는 친구가 보기보다 아주 새침해. 예민하기도 하고 깍쟁이여 깍쟁이.”
“어머, 열매가 꼭 체리처럼 생겼네요?”
“예쁘장하지요?”
이중석이 커피 열매 하나를 툭 떼어 보여주었다. 빨갛고 신선한 열매를 최민아에게 건넸다.
“씨알이 굵은 놈이네. 한번 드셔보소.”
“먹어봐도 돼요?”
“그럼. 농약 같은 건 안 치니까 걱정 말고 드쇼.”
최민아는 커피 열매를 받아서 입속에 쏙 넣고는 깜짝 놀라 눈을 끔뻑였다.
“엄청 새콤하네요? 생각했던 맛이 아닌데요?”
도혁이 그 모습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그렇죠? 우리가 마시는 커피는 씨예요. 씨를 볶아서 만들지.”
“커피는 씨로 만드는 거구나. 기억할게요!”
최민아가 방긋 미소를 짓자 이중석이 흐뭇하게 둘을 바라보았다.
“젊은 사람이 커피에 관심도 많고 아주 조예가 깊구만.”
“커피가 가진 매력은 마력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끊고 싶지도 않고, 끊을 수도 없는 향기롭고 풍부한 마력이요.”
“크으. 광고 회사에서 나왔다고 하더니 멘트가 좋네요. 커피의 깊이에 대해서 그렇게 표현을 하다니. 자, 앉읍시다. 내 찐하게 한잔 끓여 줄 테니.”
이중석이 손수 커피를 만들어주겠다며 둘을 앉혔다.
그런데 도구가 퍽 독특하다.
숯불 위에 얹힌 모래통과 길쭉한 손잡이가 달린 쇠주전자, 그리고 원두 가루를 가져왔다.
“좀 전에 갈아둔 거요. 원두 향부터 맡아보시죠.”
“어머! 이 커피나무에서 재배한 원두인 거죠? 웬일이니, 완전 신선해요.”
최민아가 감탄하며 원두 가루를 도혁에게 건네주었다.
그윽한 향과 코끝을 기분 좋게 감도는 향취가 감미로웠다.
“역시 현지에서 직접 키운 원두라서 향부터 풍부하네요. 엄청난데요?”
“그럼요. 한참 전에 따다가 배 타고 건너온 거랑 같겠나. 왜 김치찌개도 갓 끊인 게 맛있잖소.”
“직접 만들어주실 커피, 정말 기대됩니다. 그 주전자는 터키식 커피 만들려고 하시는 거죠? 그런데 모래는 어떻게 사용하시는 겁니까?”
터키 여행을 갔을 때 드립이 아닌 터키식 커피를 마셔본 적이 있었다.
숯불에 주전자를 직접 얹어서 끓여주었던 기억이 있는데 이건 모래네?
도혁이 모래를 바라보며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자 이중석이 급히 말렸다.
“모래가 뜨거워요! 조심하십쇼! 이 뜨거운 모래의 열로 아주 천천히 커피를 끓일 겁니다. 이 ‘제즈베’라는 커피 주전자에 원두와 물을 넣어 끓이는 터키식 커피예요.”
“모래로 커피를 끓이다니 신기하네요. 낭만적이기도 하고.”
“드리퍼로 내리는 거랑 다르게 손맛을 제법 탑니다. 조금 기다려 보시오. 이게 맛깔나게 만들기가 쉽지 않아.”
쉽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이중석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넘쳤다.
힘찬 손길로 주전자를 움켜쥐고 모래 속에 제즈베를 꽂아 넣다시피 얹었다.
천천히 커피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보글보글 거품이 솟아오르자 이중석이 손잡이를 쥐고 주전자를 천천히 돌렸다.
“와, 엄청 신기해요. 향이 엄청 진하네요.”
“아마 저어기 비닐하우스 문 앞까지 향이 퍼졌을 거요. 자, 다음 잔 갑니다.”
다시 모래 속에 제즈베를 꽂아 넣은 이중석이 신중하게 커피를 끓여 내어놓았다.
때마침 투두툭, 비닐하우스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 니임이 오시는구만~.”
이중석이 터벅터벅 걸어가 끼이익 하우스의 출입문을 열자 녹색의 풍경이 펼쳐졌다.
물기를 머금은 나뭇잎과 고요히 일렁이는 물안개 그리고 흐드러진 빗소리.
그윽하게 풍겨오는 커피 향과 산골 마을의 풍광이 어우러지며 멋진 오후의 장면을 만들어냈다.
도혁이 커피를 입속에 머금으며 감탄했다.
“오랫동안 이 순간을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오늘의 빗소리. 터키식 커피 향. 그리고 이런 좋은 시간을 선사해 주신 이 대표님께 감사합니다.”
“저도요. 이렇게 편안하고 고요한 시간이 얼마 만인지. 힐링 제대로 하는 기분이에요.”
“그렇게 말해주니 내가 더 뿌듯하네. 인생 뭐 있나. 비 오면 비 구경하고 눈 오면 눈 맞으면서 커피나 말아 마시면 거기가 천국이지. 나도 원래 외국도 살고 서울도 살면서 대기업도 다녔었죠.”
“아, 그러시군요. 귀농하신 건가요?”
“맞아요. 커피가 좋아서 커피에 미쳐서 살고 있죠. 이 동네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부르는지 압니까?”
이중석이 다시 터키식 주전자에 원두를 부으며 물었다.
“‘커피탄 리’라고 합디다. 만나면 커피만 타 준다고요. 커피에 미친 놈이라나 뭐라나.”
“이런 말 아부 같지만, 정말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에 몰두해서 집중하며 사는데, 또 즐거우시잖아요.”
“젊은 친구들도 그렇게 사는 거 같은데요? 느낌이 팍 오는데?”
도혁과 최민아가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우린 커피 아니고 광고지만, 그런가?
꿈과 목표를 향해 가면서도 소소하게 즐거운 DW의 오늘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도혁이 커피 잔을 들었다.
“술은 아니지만 잔 한번 부딪힐까요?”
“그럴까요?”
머그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쨍하게 울리자 젖어 있던 감상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참, 명도혁. 섭외하러 왔었지.
분위기에 취해서 본론까지 잊어버린 거다.
도혁이 자리를 고쳐 앉고 이중석에게 제안했다.
“이중석 선생님. 아니, 커피탄 리 님이라고 해야 할까요. 선생님의 좋은 원두와 노하우, 그리고 커피에 대한 열정을 나누어주십시오.”
“흠. 찾아온 목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일단 들어나 봅시다. 그래, 어떤 사업입니까?”
“바리스타가 필요합니다. 이중석 선생님, 국제 바리스타 대회 수상자시잖아요.”
“아니. 스페인에 있을 때 수상 경력을 어떻게 알고 오셨소? 한국 이름으로 참여한 것도 아닌데.”
이중석이 놀란 듯 도혁을 돌아보았다.
“숨겨진 커피 장인을 열심히 찾아다녔습니다. 아직 저희도 완전히 광고주 컨펌이 끝난 사안은 아니지만, 최선을 다해서 진행할 예정입니다. 제안 사항에 카페 프랜차이즈를 오픈한다면 선생님의 노하우와 함께한다는 기획을 넣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흠. 카페 프랜차이즈라고요? 프랜차이즈라.”
이중석의 미간이 좁혀졌다.
“난 카페 사업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농원에서 소박하게 농사지으면서 좋은 원두 생산하고 커피나 말아 마실 작정으로 귀향한 거고. 이것 참.”
“말씀하셨다시피 국내 생산품은 아프리카나 남미에서 생산한 원두보다 훨씬 귀하고 신선하지 않습니까? 저희가 진행하고자 하는 토종 브랜드 역시 신선함이 가장 강점입니다. 하여 이렇게 멀리까지 부탁을 드리고자 온 것입니다.”
“원두 제공에, 바리스타 이름과 노하우를 빌려달라 이런 말이네요?”
“그렇습니다. 이렇게 좋은 커피를 보다 많은 사람에게 신선하게 제공한다면 더 값진 일일 테니까요.”
도혁이 머그잔을 눈높이로 들어 보였다.
이중석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