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131화
“무슨 소리야. 마을 회관서 한번 물어봐? 누가 더 꽃분 할매랑 어울리는지?”
이게 뭐라고 할아버님들이 발끈했다.
분위기를 살피던 도혁이 평상에 할아버님들을 앉혔다.
“일단 앉으시고 저희가 해장술 마실 건데 함께 드시겠습니까? CF야 천천히 의논하면 되죠.”
“그, 그럴까? 한잔하면서 누가 할매랑 같이 나올지 결정하면 되것구만.”
“좋네. 오늘 논일도 못 하게 생겼는데 잘됐네. 날도 어두워서 한바탕 비가 쏟아질 것 같어.”
그렇게 주연배우 선정을 빌미로 해장 술자리가 다시 시작되었다.
도혁이 눈짓을 보내자 도준이 동이째 술을 내어오고 할아버지들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숙취로 눈이 감겨왔지만 세 분 중 한 분을 모델로 선정해야 하기에 말투, 발성, 수더분한 모습까지 꼼꼼히 관찰했다.
할머니가 갓 끓인 추어탕을 해장국을 안주로 삼고 술이 들어가자 할아버지들은 살아온 스토리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때마침 주룩주룩 비가 내리기 시작하며 정취를 더했다.
“그래 가지고, 내가 재작년에 개량 품종으로 국무총리상까지 받고 돼지를 잡았지 않은가.”
“그려. 그건 대단했지. 저어기 마을 어귀에 현수막 아직도 걸려 있을걸?”
“우리 마누라가 그 상장 봤으면 춤을 추고 온 마을에 자랑하고 다녔을 건데 아파서 보지도 못하고.”
“아직 요양원에 있는 모양이구만, 에휴.”
자랑거리와 그걸 함께 나누지 못한 가족에 대한 아쉬움부터.
“이번에 우리 큰애가 손주를 낳았어. 그 박사 아들. 어찌나 예쁜지, 내 사진 보여줬었나?”
“백번도 넘게 봤지. 귀가 닳것어 이 사람아.”
“그러지 말고 이거 좀 보시게. 나를 닮아 눈이 어찌나 큰지. 거, 서울에서 온 총각들, 우리 손주 예쁘제?”
“자네 닮으면 큰일이지 않은가? 재앙이지, 암.”
자식에 손자 자랑까지. 어르신들의 길고 긴 레퍼토리가 이어졌다.
최선을 다해 어르신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지만.
마음속으로 이미 CF 역할 분장을 마친 후부터는 점점 집중력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가 1.4 후퇴 때 여동생 손을 놓치고…….”
1.4 후퇴까지 나오자 정신이 혼미해졌다. 다시 술이 오르는 모양이었다.
도혁과 황도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는 걸 눈치챈 할머니가 구원해 주었다.
“도핵아, 대충 얘기하고 퍼뜩 들어가서 더 자그라.”
“그래도 될까요?”
“그럼. 할배들은 여기서 퍼질러 더 놀라고 하고.”
할머니가 도혁의 손을 잡고 온돌방으로 데려갔다.
뜨끈한 아랫목에 몸을 누이니 몸이 녹는 듯 따스해졌다.
할머니는 도혁과 황도준의 머리에 베개를 괴어주곤 토닥여 주었다.
“내 저 할배들 동태찌개나 만들어 주고 올 테니까 푹 자고 있거라. 내일 올라간다고 했지?”
“네. 광고 촬영할 때 다시 올게요. 아니, 최대한 자주 내려올게요, 할머니.”
“그래. 내 새끼. 얼굴 좀 더 보자.”
얼굴을 쓸어주시는 할머니의 손등을 잡았다.
거칠고 뭉툭한 손길이 따뜻했다.
도혁은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CF 로케 촬영 현장. 마을에 한바탕 잔치가 벌어졌다.
바닷바람이 차가웠지만 웅성대는 사람들의 열기로 분위기가 뜨거웠다.
온 마을 주민이 구경 나온 것 같았다.
“어이, 김 씨. 거 인상 좀 펴!”
“이런 떨고 있구만. 저 사람 손 떠는 거 좀 봐.”
삼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오늘의 남자 주인공으로 당첨된 김 씨 할아버지가 긴장했다.
“여기 카메라가 몇 대여. 떨 만도 하지.”
“텔레비 선전 나가는 거 아닌가. 어유 난 보기만 해도 다리가 후들거리네.”
촬영장을 둘러싼 카메라며 조명과 음향 장비를 바라보며 어르신들이 혀를 내둘렀다.
평소에 보지 못한 신기한 광경을 본 꼬마들이 촬영장 주변을 뛰어다녔다.
“컷. 김 씨 할아버님 조금 쉬었다가 할까요?”
“으이구, 이 할배. 왜 이렇게 떨어 떨기를!”
도혁의 외할머니가 혀를 끌끌 차며 김 씨 할아버지를 노려보았다.
도혁이 웃으며 다가갔다.
“원래 그렇습니다. 일반인 모델인 만큼 로케 일정에 여유 두고 왔으니까 편안하게 하세요.”
“그려. 저짝에 총각들이랑 막걸리라도 한잔하고 다시 시작할까?”
“일할 때 술은 안 되구요. 커피 좀 마시고 촬영 들어갈게요.”
“그럼 기다려봐.”
할머니가 마을 회관으로 쫓아 들어가 뜨끈한 커피를 만들어 오셨다.
“어! 이거 일반 믹스 맛이 아닌데요?”
“고롬. 우리는 그거 그대로 안 마신다. 쭉 들이켜면 추위가 가실 거구만.”
“어떻게 만드신 거예요? 군대에서 마신 것보다 맛있는 커피는 처음입니다. 군대 커피랑 라면은 이기기 어려운데요.”
“그러면 내 라면도 좀 끓여줄까? 요기를 좀 하고 다시 찍자. 뱃속이 비니까 저 김 씨 할배도 비실거리고.”
역시나 군대에서 먹던 뽀글이 따위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퀄리티의 할머니표 라면이 나왔다.
새우에 전복까지 푸짐하게 들어간 해물라면이었다.
“스태프가 몇 명인데 이렇게 퍼주십니까? 모델료 몇 푼이나 된다고.”
“어때. 한국 사람 밥심이다. 퍼뜩 먹고 또 찍어야제.”
“이야, 국물이 끝내주네요. 이게 해물탕이여, 라면이여.”
함께 온 촬영팀이 모조리 엄지를 척 들어 올리고 구경하던 마을 사람들까지 가세해서 마을 회관 가득 해물라면의 냄새가 퍼져갔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먹는 뜨끈한 라면의 맛이 기가 막혔다.
도혁은 로케에 함께 온 강태오와 황도준의 그릇에 전복을 계속 올려주었다.
강태오가 고개를 기울이며 도혁을 바라보았다.
“이럴 때 보면 내가 동생 같단 말이지. 명도혁 형님, 하고 싶어질 때가 있어.”
“저는 아버님 같을 때가 있습니다. 뭔가 아재 분위기를 내면서 아, 표현이 잘 안 되는데 아무튼 그런 게 있어요.”
“너도 느꼈냐?”
속닥거리는 둘을 보고 도혁이 움찔했다.
속은 나이 먹은 거 은연중에 표시가 나나 보다.
“잘해줘도 이러지. 전복 내놔.”
“뭐, 말이 그렇다는 거죠. 사람의 느낌이라는 게 있는데 좀 들어 보이십니다.”
“네 거부터 내놔라. 어?”
티키타카를 하는 DW애드 직원들 곁으로 할머니가 다가왔다.
“도핵아. 근데 너거 회사는 시꺼먼 남자들밖에 없나?”
“어쩌다 보니 외주팀도 오늘 남자들뿐이네요. 서울 회사에는 여직원도 있어요.”
한 명뿐이지만.
워낙 스스럼 없이 지내다 보니 직원들의 성별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정말 최민아뿐이네.
황도준이 최민아를 떠올렸는지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딱 한 명 있는데, 그게 요즘 좀, 하아.”
“왜? 민아한테 무슨 일 있어?”
“그게 민아 선배. 완전히 물들어 버렸어요.”
“물이 들었다고?”
* * *
서울 DW애드 코리아에서는 한창 최민아가 피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쪽에 본드를 붙이라는 거지?”
“그렇습니다. 타미야 무수지 본드가 천천히 건조되지만 접착 강조가 좋고 얼룩이나 백화가 없어서 좋습니다.”
“아, 정말 그러네. 다 됐다!”
“역시 손재주가 좋으십니다. 금손 인정!”
“오케이! 이야, 완성해 놓으니까 끝내주는데? 내가 만들었지만 멋있다.”
도무진이 완전히 건담의 세계에 최민아를 끌어들인 것이다.
건담 덕후로 거듭난 DW애드의 유일한 여성이었다.
“이게 손맛이 있네. 나 완전히 빠져든 것 같아.”
“제가 곧 밀리터리 덕후의 세계로도 안내하겠습니다. 이른바 밀덕이라고 하죠. 좋은 탱크가 한 대 있는데 킹 타이거라고…….”
“도무진 그만해! 우리 민아 자꾸 물들이지 말라고. 그거 다 돈 많이 드는 거 아니야?”
“대표님!!!”
“와! 대표님 오셨다.”
막내들 눈에 도혁이 정말 아빠처럼 보이는 걸까.
도혁이 들어오자마자 막내들이 아기 새처럼 달려와 맞았다.
그게 귀여워 보이는 걸 보니 영혼은 아재가 맞나 보다.
“커피랑 케잌 사 왔다. 식기 전에 나눠 먹어.”
“잘 먹겠습니다! 편집은 잘 끝났어요? 고생 많으셨어요.”
“응. 집에 가서 좀 쉬려고 했는데 AT텔레콤에서 메일로 뭘 보냈다고 해서 확인해야 해.”
“에이, 거짓말. 커피 쥐여주러 오신 거잖아요.”
같이 야근했던 직원들 퇴근 시키고 커피나 안겨주려고 온 거 눈치챘나 보네?
도혁은 입매를 끌어올리며 직원들이 케이크를 떠먹는 걸 바라보았다.
“이번 CF, 어때요? 각 좀 나왔어요?”
“그럼. 편집실에서 최종 컨펌 봤는데 개인적으로는 이번 광고가 제일 취향이야.”
“어머! ALL보다 더요?”
최민아가 벽에 붙은 ALL 포스터를 가리켰다.
“디자인적으로 ALL을 뛰어넘는 게 쉽지 않을 텐데요.”
“ALL이 크리에이티브하지. 광고 자체로 아름답다고 해야 하나?”
“이걸 넘었다구요? 우와. 나 기대해도 되는 거죠?”
대답 대신 짧게 끄덕인 도혁이 커피를 삼켰다.
“진심 말도 안 돼. 도무진 씨. 이걸 넘는 게 도무지 가능한 걸까?”
“ALL은 한 해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퀄리티인데요. 흠, 이번 광고가 바다 배경이라 비주얼이 잘 빠졌나 봐요.”
“글쎄. 둘이 기대하는 스타일은 아닐 수도 있어. 다시 강조하지만 개인적으로 취향인 거니까.”
“뭔지 모르겠지만 저는 대표님 취향 따라가고 싶습니다.”
“나도!”
세상 확고한 취향을 가진 둘이 도혁을 따르겠다고 하자 픽 웃음이 새었다.
“기존 우리 광고와 톤이 많이 다르긴 해. 말 나온 김에 전 직원 감평회 해볼까?”
“오옷! 좋은데요? 우리 직원 늘어나기 전에는 항상 전 직원이 모여서 옹기종기 감평했었잖아요.”
그러게. 이멤버 포에버 몇 명이 모여 맨주먹으로 시작했는데 이제 제법 규모를 갖춘 광고대행사로 거듭났다.
매출 순위도 꾸준히 안정적이었고.
직원 수에 비해 넓다고 생각했던 사무실이 비좁아 보일 정도였다.
도혁은 사무실을 돌아보며 최민아에게 물었다.
“우리 사무실 이전할까? 좁지 않아?”
“아직 근무하기 나쁘진 않지만 회의실이 좀 아쉬워요. 당장 전 직원 모여서 감평할 곳도 마땅치 않은 상황이에요. 자기 자리에서 목 빼고 봐야 한다고요.”
“직원 충원하면서 회의실 헐어버려서 그렇지? 흠……. 내가 근처로 알아볼게.”
“네. 인근에 외주처가 몰려 있어서 이 근방이라야 할 거 같아요. 우와, 우리 벌써 사무실 확장할 정도로 성장한 거예요?”
“몇 년 안에 이 건물을 사버리든가 해야지! 한 건물 안에선 우리끼리 지내는 게 편하지 않겠어?”
“올~ 대표님!”
최민아와 도무진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기다려 봐. 우리 덕후들을 위한 공간도 만들어줄게. 조립할 수 있는 작업 공간이랑 유리장 하나 짜주면 되나?”
“우와! 우와! 대박. 진심이십니까?”
“어. 그러니까 열심히 해.”
놀라 소리치는 도무진에게 최민아가 강조했다.
“그거 알아? 대표님이 말한 거 모조리 다 실행됐어. 농담 아니라 전부 다. 우리 DW애드 코리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거 알지?”
“와! 진짜요?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죽을 때까지 따라다닐 거예요.”
“제발. 너 이거 각서 써라. 나가면 안 돼!”
“회사에 덕후만을 위한 공간이 생긴다는데 가기는 어디를 갑니까! DW에 뼈를 묻겠습니다.”
도무진이 뼈를 묻겠다고 말하는 순간, 뼈를 갈던 놈이 나타났다.
“대표님. 디지 베타(CF 소재를 담는 베타 테이프) 떠 왔습니다.”
“황도준! 퇴근 안 했어? 집에 가서 쉬라니까.”
“아까 말씀하신 디테일 손보고 편집 최종본 가져왔어요.”
“이런. 아니, 다들 퇴근 안 한 거?”
“최종본 다 같이 확인하고 사우나나 가려고 했죠.”
야근 멤버들이 속속 사무실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럼 모인 김에 전 직원 감평 하도록 할게요. 모두 모여주세요.”
CF 최종본 품평회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