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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천재 명도혁-130화 (130/252)

광고 천재 명도혁 130화

꿈에 그리던 외할머니가 눈앞에 서 계셨다.

“우리 손자 아니가! 도핵아! 우리 도핵이가, 이거 꿈 아니가!”

“할머니! 잘 지내셨지요. 우리 할매 늙지도 않네. 고운 거 봐라.”

“아이고. 아이고 우리 손자. 아이고. 연락도 없이 이게 무슨 일이여.”

할머니는 두툼한 손으로 도혁의 손등을 서른 번 정도 훑었다.

그 손길이 뜨겁고 거칠고, 아렸다.

‘할머니, 저도 꿈같아요.’

전생에서 이 손을 마지막으로 잡았던 건 요양 병원에서였다.

치매가 심하셨는데 그날따라 할머니 정신이 참 맑았더랬다.

-도핵아. 오늘은 할매랑 자고 가면 안 되나? 어? 할매가 오늘 좀 무서워서 그런다.

-할머니…….

-엄마, 마음은 알겠는데 병원 규정이 그렇게 안 돼요. 외부인은 같이 잘 수가 없어.

어머니가 눈물을 훔치며 거절했다.

서운한 기색을 보이던 할머니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우리 도핵이 줄라고 내가 가져왔는데…….

-할머니.

얼마나 가지고 다녔는지 구깃구깃 접힌 과자 봉지를 들고 일어섰다.

쉬이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왠지 오늘이 할머니 얼굴을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일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

도혁은 달려가 할머니의 품에 안겨 주름진 손을 잡았다.

그리고 다음 날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그날을 떠올리자 울컥 눈물이 맺혀와 고개를 돌렸다.

그 틈에 할머니들의 시선이 황도준에게로 꽂혔다.

“그런데 이쪽에 시꺼먼 총각은 누군고?”

“저는 황도준이라고 합니다. 여기 명도혁 대표님의 수제자이자 가장 아끼는 팀원입니다.”

“대표님? 방금 대표님이고 했어? 우리 도핵이가 대표라고?”

겨우 주목을 피해 감상에 젖었던 도혁에게 다시 할머니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외할머니가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물었다.

“아닌데? 우리 도핵이 대학생인데. 그 왜 서울에 들어가기 엄~ 청나게 어려운 학교 다니잖아. 영어 하는 거 보면 혀가 꼬부라진 게 코쟁이 외국 사람 같다니깐!”

“학교 다 다녔구요. 지금은 사업합니다.”

“넵. 할머니! 우리 회사 어~ 엄청 잘나갑니다. 보시겠어요?”

황도준이 할머니의 ‘어~ 엄청나게’를 흉내 내며 노트북을 꺼냈다.

“여기 인터넷이…… 참, 안 되겠구나. 그럼 저장된 광고라도 보여 드릴게요.”

“광고? 광고가 뭐고?”

“왜 드라마 시작하기 전에 제품 팔려고 설명해 주고 하는 거 있잖아요.”

할머니들이 황도준의 말을 듣고 눈을 끔뻑였다.

그걸 본 도혁이 어르신들의 말로 쉽게 풀어주었다.

“선전 말입니다. 선전.”

“뭐? 우리 도핵이가 선전을 한다고? 니 탈랜트 됐나?”

선전은 광고와 다를 뿐 아니라 탤런트 같은 건 할 생각도 없었지만 도혁이 웃으며 끄덕였다.

“일단 한번 보세요. 할머니 손자 이런 거 만듭니다.”

기계적으로 마늘을 까던 손길이 모두 멈추고 노트북에 올망졸망 모여들었다.

황도준이 몇 개의 광고를 보여주자 할머니들이 손뼉을 쳤다.

“내, 저거 봤다. 문어!”

“저저, 벽에다가 도마도 던지는 거 보고 우리가 막 뭐라고 했잖아. 먹는 걸로 장난친다고.”

“그래도 기억하시네요. 원래 어르신들 선전은 넘겨 버리시잖아요.”

“그래. 하도 신기해서 봤지. 와, 우리 도핵이가 텔레비에 나오는 걸 다 만든다니 대단하다!”

“그러니까. 근데 도핵이 얼굴은 언제 나오는 건데.”

얼굴은 나올 일 없이 제작만 한다고 하자 타박이 이어졌다.

“그게 무슨 소리고. 만들기만 한다고?”

“예. 제작만 합니다. 사장이에요.”

“서울에는 그런 일도 있는 갑다. 선전만 만드는 가 보네. 방송국에서 일하는 건가.”

“방송국은 아니고…….”

그 뒤로 한참 동안 방송국이 아니고 광고대행사라고 말씀드려 보았지만 딱히 이해하시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튼 마을 회관에서의 기 빨리는 만남이 끝나고 할머니 집으로 향했다.

“근데 도핵아. 이 멀리까지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인데. 아까는 너무 반가워서 묻지도 못했다.”

“아까 같이 보셨던 광고 있죠? 참, 선전 말입니다.”

“그래, 선전이 왜?”

“그거 찍으려고 왔어요.”

도혁이 웃으며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우리 할머니랑 같이 광고 한 편 찍으려구요.”

* * *

사람이 죽으면 남은 이들은 왜 슬플까.

이 원론적인 질문에 대한 가장 직관적인 해답은 망자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더 이상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어서.

하여 사람들은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 꼭 해야 하는 일로 동영상 촬영을 꼽곤 한다.

두고두고, 보고 싶을 때마다 아쉬운 대로 생전의 얼굴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표정이 담긴 영상에선 사진과 달리 그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법이니까.

그래서 이번에 할머니를 아예 광고로 박제할 작정이었다.

최고의 필름을 써서, 영상미를 가득 실어서 아름답게 말이다.

도혁은 바닷가가 보이는 집 앞에서 밥상을 차리는 할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평상 가득 떡 벌어지는 한 상을 본 황도준이 호들갑을 떨었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시골 밥상인가요! 거기다 멍게에 문어에, 해삼에, 전복까지. 해산물이 어디까지 나오는 겁니까? 와!”

“많이들 먹어. 우리 손자가 얼마 만에 왔는데 뭐든 만들어 줄 테니까.”

“잘 먹겠습니다! 우와!”

푹푹 복스럽게 밥을 먹는 것이 손자의 미덕이므로 열심히 떠먹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할머니의 손맛에 신선한 해산물이 더해져 더없이 풍성한 식탁이었다.

매운탕까지 야무지게 먹은 도혁과 황도준이 뚝딱 밥그릇을 비우자 금세 빈 그릇이 다시 채워졌다.

“장정들이라 잘 묵네. 고기도 있다. 방금 제육 볶아 왔으니까 계속 먹어라.”

“예? 밥을 2차로 또 먹으라구요?”

“와, 안 들어가나. 막걸리 한 잔 주까? 내 얼마 전에 담근 거 있다.”

“막걸리! 직접 담그신 거라구요? 당장 주십시오. 어딨습니까, 제가 가져올게요!”

황도준이 벌떡 일어서 술동이를 가져왔다.

별이 빛나는 밤에 바다를 바라보며 마시는 수제 막걸리의 맛이 기가 막혔다.

거기 좋은 사람들과 할머니의 무한 리필 안주까지.

행복이 별건가. 이런 게 인생의 참맛이라며 부지런히 술을 들이켜는 사이 어느새 술독이 바닥을 보였다.

“세상에 우리 꼬맹이 도핵이랑 막걸리를 다 마시고. 참 세월도 무상하다.”

“왜, 우리 할매 술 좋아해서 만날 만들었잖아요. 술찌끼에 설탕 타서 어릴 때부터 먹었구만.”

“어! 명 대표님 알코올 조기교육의 혜택을 받으셨군요!”

“그때 우리 영감 죽고 내 술 많이 먹었지. 우리 도핵이 데려와서 같이 자는데 어찌 위안이 되던지.”

“제가 위로가 됐다니 영광입니다.”

“당연하지. 영감 가고 대신 선물이 온 것 같았다니까.”

할머니의 주름진 눈가가 촉촉이 젖었다.

돌아가진 할아버지 얘기가 나오자 분위기가 어둑해져 도혁이 화제를 돌렸다.

“저한테도 선물 하나 주십시오. 아까 말씀드린 그 선전. 꼭 할머니 나와야 해요.”

“참, 맞다. 이 시골 할매를 뭘로 텔레비에 내보낼 건데. 우리 멀끔한 총각 둘이나 나갈 것이지.”

“할머니가 꼭 필요합니다. 마을 어르신들도 풀샷으로 들어가면 좋구요. 참, 할아버지 모델도 필요한데 혹시 남자 친구 없으세요?”

“아이고, 남사시러버라.”

할머니가 손사래를 치며 막걸리를 들이켰다.

얼굴이 제법 붉어지신다.

우리 신식 할머니 남자 친구 있으셨잖아요. 방금 할아버지 얘기하다가 말하려니 민망하셨던 건가.

도혁이 모른 척 할머니의 붉어진 볼을 손등으로 식혀 드렸다.

“우리 할머니 술기운 오르나 보다. 아무튼 할아버지 모델도 필요하니까 마을에서 좀 찾아보세요. 우리 광고 컨셉 다 정해져서 바꿀 수도 없어요.”

“그, 그래? 내가 찾아볼게. 늦었다. 씻고 퍼뜩 자그라.”

급히 들어가시는 할머니의 뒷모습이 다급했다. 그리고 귀여웠다.

여자는 나이가 먹어도 마음은 소녀라더니.

황도준이 술동이에서 마지막 남은 술을 따랐다.

“이거 아쉽네요. 너무 맛있는데 하아. 다 마셔 버렸습니다.”

“그래? 술이 어디 더 있을 텐데.”

“정말입니까?”

입맛을 쩍쩍 다시며 일어서는 황도준을 창고로 안내했다.

“여기 할머니 보물 창고. 몰래 꺼내 마시자.”

“오, 이것은 산삼주 아닐까요! 먹고 더덕으로 바꿔놓으면 어떻습니까?”

“으이구.”

둘은 밤새 이 술 저 술 꺼내어 마셔댔다.

분위기도 좋고 공기도 상쾌해 끝도 없이 술이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 창가로 스민 햇살이 따가워 눈을 떴다.

그런데 모르는 얼굴이 빼곡 문을 열고 바라보고 있었다.

“이보시게. 얼른 일어나시게. 뭐시기냐, 선전인지 뭔지 찍어야 한다며.”

“아, 아, 머리야. 으.”

섞어 마신 전통주의 위엄이 밀려왔다. 머릿속이 웅장해졌다.

그런데 눈앞에 사람이 세 명으로 보였다. 술을 너무 먹어서 시야가 흐려진 건가.

눈을 비비며 치뜨는데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도핵이가 선전할 만한 할배 부르라고 해서 불러놨다. 세 명.”

“네? 세 명이요?”

“셋 중에 뽑아 쓰라고.”

할머니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역시 우리 할머니, 여장부답다.

이 좁은 어촌에서 무려 세 명의 할아버지를 몰고 오셨다.

도혁이 서둘러 일어서 어르신들에게 인사했다.

몸을 움직이자 다시 극심한 숙취가 몰려들었다.

찡그린 그의 코앞에 할머니가 꿀물을 내밀었다.

“내 술 창고에 인삼주까지 내먹으니 이렇게 되지, 이눔아.”

“죄송해요, 할머니. 마시다 보니 흥이 나서. 좋은 술이라 끝없이 들어가더라구요.”

“나 닮아 술배 큰 걸 누굴 원망하겠누. 이거나 마시고 퍼뜩 술 깨그라. 참 이 할배들은 어떡할까?”

도혁은 할아버지들을 돌아보며 간단한 CF 컨셉을 말씀드리려 했다.

순간 황도준이 일어나 설명했다.

“저희가 이번에 찍을 AT케이블 광고는…….”

한참 말로 해도 할아버지들의 인상이 펴지지 않았다.

황도준의 추상적인 설명이 이해가 안 되는 표정이었다.

“일단 할아버님들 이쪽으로 앉으시고, 저희가 직접 연기를 해보겠습니다.”

한 살 젊다고 술도 빨리 깨는 모양이었다.

황도준은 빨리도 일어서는데 도혁은 일어서자마자 머리가 다시 지끈거렸다.

그래도 역시 어르신들께는 설명보단 보여 드리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하고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댁에서 TV 보신다고 생각하고 편하게 우리가 연기하는 걸 봐주세요.”

“그려, 그럼 한번 해봐.”

콘티대로 어설프게나마 시연을 해 보이자 세 분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뭐가 뭔지 대충 알겠구만. 저어기 꽃분 할매랑 부부 역할 아니여?”

“맞습니다, 할아버지.”

“그런데 왜 영감이 셋이나 필요한가? 하나면 충분해 보이는구만.”

“주연은 한 분이시구요, 나머지는 조연이나 엑스트라로 출연하실 예정이에요. 마을 회관 어르신들도 함께하실 거구요.”

열심히 역할을 설명을 마쳤다.

할아버지 세 분이 동시에 눈썹을 찌푸렸다.

“그럼 저 할매랑 같이 연기하는 건 우리 셋 중에 한 사람이라는 말인겨?”

“네. 그렇습니다.”

“이런. 누가 할 건가. 김 씨보다는 내가 나은 것 같은데.”

“무슨 소리야. 마을 회관서 한번 물어봐? 누가 더 꽃분 할매랑 어울리는지?”

“어허, 이 사람, 내가 친분이 있어도 할매랑 더 있구만. 할매!!”

이게 뭐라고 할아버님들이 발끈하기 시작했다.

평온한 시골 아침의 묘한 경쟁 구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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