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123화
“안녕하십니까. 태강애드 기획1팀장 이정인입니다.”
도혁은 묵묵히 발표자 이정인을 바라보았다.
한때 상사이자 멘토로 모셨던 기획1팀장이었기에 경쟁자의 입장이 된 지금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이정인은 정면에 앉은 상무를 바라보며 발표를 시작했다.
“대한민국 제1 통신사인 AT텔레콤의 경쟁 프레젠테이션에 참가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저희 태강애드는 가장 먼저 AT의 고객에 주목했습니다.”
[우아한, 세련된, 경쟁력 있는, 구매력 높은, 고학력의, 직장인 주력.]
AT텔레콤의 주 타깃에 대한 형용사들이 주욱 나열되었다.
“기존 AT텔레콤은 차분하고 서정적인 광고로 이른바 고소득층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대와 제품력이 현재의 소비자층을 견고하게 만든 것으로 파악됩니다.”
[번호의 자부심. AT의 자신감.]
011이 통용되던 시절이라 사용했던 캠페인이었다.
도혁은 미간을 좁힌 채 화면을 응시했다.
‘번호는 곧 010으로 통합되니까 의미가 없지. AT텔레콤 사용자의 자부심에 관해 어필하려는 건가.’
도혁의 예상대로 이정인의 발표가 진행되었다.
“AT텔레콤은 기존 소비자의 자부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시장의 선행 사업자이자 1위 업체로서 자신감을 가지고 시장을 견인해야 한다는 의견입니다.”
[통신의 중심. 변화의 중심. 그리고 폭풍의 핵 ‘AT텔레콤’]
“트렌드가 급변하며 유행이 휘몰아치는 통신 시장에서 AT텔레콤은 자신의 자리를 더욱 굳건히 굳힘으로써 안에서 밖으로 타깃을 확대해 나갈 것입니다.”
[가족 요금제, 자녀를 묶어라.]
“젊은 타깃 포섭을 희망하는 AT텔레콤의 욕구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에 저희는 타사에서도 진행하고 있는 가족 요금제를 좀 더 파격적으로 묶어서 공격적인 마케팅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AT의 유통망이 단단하니 유통 쪽으로 밀어붙이려는 모양이다.
요금제 혜택은 일단 현장에서 진행하는 부분이다 보니 시장 1위인 AT텔레콤으로서는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었다.
역시 태강애드다웠다. AT텔레콤의 강점을 짚어내며 조목조목 꼼꼼하게 프로모션 안을 가져왔다.
[자존심을 바꾸시겠습니까?]
[격이 다른 품질의 자부심. AT텔레콤.]
한창 가격경쟁으로 번호 이동 시 혜택을 엄청나게 쏟아붓던 시점이었다.
자신이 쓰던 번호의 자부심을 내세우며 보수적이면서도 품격을 중요시하는 4060 타깃에게 어필한다.
더불어 가족 요금제 프로모션에 집중함으로서 어린 타깃을 공략한다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가족 요금제는 혼자 해지하기 힘듭니다. 따라서 다양한 소비층을 단단하게 묶어 충성도를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파악됩니다. 따라서 저희의 키워드는 가족입니다.”
[가족. 하나라는 이름으로 함께해요.]
[당신의 가족 곁에, 언제나 AT텔레콤.]
“기존 훈훈하고 따뜻한 톤의 광고를 이어가면서 세대를 넘은 타깃에게 적극 어필할 AT텔레콤의 새 프로젝트에 태강애드의 힘을 보태고자 합니다. 이상으로 태강애드의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정인 팀장이 특유의 담담하고 힘있는 톤으로 끝인사를 마쳤다.
짧은 박수가 나오고 다시 잠깐의 침묵이 번졌다.
발표는 무난하게 끝났다. 광고주들의 표정도 밝은 편이었다. 다만 젊은 상무만이 알 수 없는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다음 팀은 기존 광고대행사인 강일커뮤니케이션이었다.
검은 얼굴에 험상궂은 인상을 한 강일 부사장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사생결단!”
화면 가득 결의에 찬 명조체로 쓰인 사생결단. 그리고 부사장이 또박또박 그 글씨를 읽어 내려갔다.
보는 순간 도혁은 저도 모르게 슬며시 웃고 말았다. 지나치게 비장했던 것이다.
광고주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아 여기저기서 숨죽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강일의 부사장이 훅 숨을 내쉬더니 본격적인 발표를 시작했다.
그 모습 역시 대형 차량의 시동을 거는 것만 같아서 도혁은 겨우 웃음을 참아냈다.
“저희 강일은 기존 AT텔레콤 광고를 통해 유수의 광고제에서 상을 받았습니다.”
화면에서는 줄줄줄 포상 내역이 올라가고 있었다.
“그만큼 저희의 크리에이티브가 좋았다는 것이고 무엇보다 AT와의 궁합이 최고였다는 방증이겠죠.”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자기 자랑 빌드업이 이어졌다.
‘부사장이 직접 프레젠터가 된 게 오히려 독이 된 케이스인데?’
이런 경우가 종종 있다. 대기업에서 상위 포식자가 발표를 하게 되면 아무도 딴지를 걸지 못하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 기획안이 산으로 가기도 하지.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광고주 앞에서 실적 자랑이라니. 도혁은 속으로 한숨지으며 발표에 귀를 기울였다.
“저희는 성공한 커뮤니케이션 안이 있는 만큼 이걸 더욱 강화하여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래의 설문 조사 결과를 보시죠.”
설문은 기존 강일 커뮤니케이션이 했던 광고 모델의 선호도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 보시다시피 전 세대를 걸쳐 선호도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우리 AT텔레콤 역시 브랜드 인지도, 충성도 1위를 유지 중입니다.”
[AT텔레콤. 브랜드 파워 1위.]
[고객 타임이 선정한 올해의 브랜드 AT텔레콤.]
또다시 화면에서 줄줄이 AT텔레콤의 자랑이 이어졌다.
“잘하고 있는 방향을 굳이 틀 필요가 있을까요? 사생결단해서 더 달려 나가야지요.”
틀린 소리는 아니다. 이 시장이 트렌드가 미친 듯이 바뀌는 통신만 아니라면 말이다.
아무튼 광고주의 의중이 중요한 거니까.
도혁은 상무의 안색을 살폈다.
역시나 무표정으로 일관한 모습이다. 꾹 다문 입이 고집스러워 보였다.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이네. 저 포커페이스에 미소를 띠게 해야 할 텐데. 보자, 이제 우리 앞에 한 팀 남았나?’
강일 부사장이 몇 번 더 사생결단을 외치고 발표가 끝났다.
다음은 대일기획의 차례였다.
최근 하향 일로를 걷고 있던 대일기획인지라 칼을 갈고 나왔을 거다.
아니나 다를까 앞의 두 팀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컨셉을 잡아 왔다.
“저희가 이번에 제시할 기획은 파격입니다. 대일기획에서는 앞선 두 대행사와 달리 십 대를 타깃으로 한 파격적인 제안을 선보이려 합니다.”
순간 차현우가 도혁을 돌아보았다.
도혁이 눈짓으로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오히려 잘됐다. 계속 보수적인 방향만 나와서 사고가 굳어질까 봐 걱정이었는데 이렇게 바로 앞에서 기획 방향을 새롭게 제시해 주면 고마울 따름이지.’
아니나 다를까, 10대 타깃을 공략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집중 설명 중이었다.
설득이 쉽지 않은 타깃 전략인데 기획안을 잘도 써 왔다.
바로 다음 발표할 DW애드로서는 반사이익이 기대되는 부분이었다.
차현우가 열심히 정면을 바라보며 제안 내용을 머릿속에 담고 있었다.
이어서 대일기획의 시안이 나왔다.
‘아, 이런. 저건 좀 아니잖아?’
십 대를 소구하겠다며 가져온 광고는 상당히 유아적이었다. 큐트한 이미지를 강조한 건 좋았으나 너무 저학년을 겨냥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시안의 완성도 역시 대일의 명성에 비하면 조악한 수준이었다.
‘대일에서 CD가 독립해 나갔다더니 기획보다 제작 쪽이 무너진 모양이구나. 캠페인 방향성은 괜찮은데 결과물이 좀 안타깝네.’
차현우가 이를 놓치지 않고 메모하는 모습이 보였다.
도혁은 차현우를 믿는 마음으로 그의 순서를 기다렸다.
곧 대일기획의 발표가 끝나고 드디어 차현우가 발표에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DW애드 코리아의 제작 팀장 차현우입니다.”
“우리 DW애드 발표자는 제작팀이시네요?”
“네. 최강의 크리에이티브 팀을 지향하는 만큼 제가 발표자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결과물을 먼저 보시겠습니까?”
보통 PT와 다르게 진행되는 순서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제품 분석과 SWOT, 타깃 분석이 이어지고 기획 컨셉을 도출한 후 시안을 보여주는데 CF부터 틀어버렸다.
파격은 벌써 시작되고 있었다.
무표정하던 AT텔레콤 상무의 얼굴에 작은 균열이 일었다.
차현우가 불을 끄고 CF 시연부터 시작했다.
“아니, 잠시만 저게 뭐야.”
“헉!”
틀자마자 탄성이 이어졌다.
푸릇한 배경의 영상에 프로게이머 임한율이 나타났다. 그가 나타나자 경쾌한 락 음악과 함께 토마토가 여기저기서 날아오고 그걸 연속으로 맞은 임한율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마지막으로 날아온 토마토를 한 손으로 잡은 임한율. 그가 멀리 강속구를 던지듯 토마토를 던져 버렸다.
시크하게 입매를 끌어올리며 멘트를 날린다.
“가장 나답게. 나의 ALL을 응원한다.”
[스물 하나의 자유. ALL.]
이어서 두 번째 CF 시안이 이어졌다.
붉은빛이 도는 따뜻한 느낌의 화면. 한쪽 벽에 서 있는 40대 후반 정도의 남성이 풀샷으로 비친다. 곧 색조의 대조를 이루며 푸른색 오렌지가 날아와 남성을 맞춘다.
퉁퉁 터지며 푸른 색깔을 뿜는 오렌지. 남자는 마지막 오렌지를 한 손으로 잡곤 입속에 넣어 맛을 본다.
“마음은 스물하나. 너의 ALL을 응원한다.”
[스물하나의 자유 ALL.]
붉은 토마토와 푸른 오렌지의 과즙이 터지는 파격적인 비주얼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졌다.
“하, 놀라라. 잠시만요.”
“저기, 통신사 광고가 맞습니까?”
“ALL은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이어지는 질문에 차현우가 불을 켜며 답했다.
“네. 저희가 준비한 AT텔레콤의 뉴 캠페인입니다. 지금부터 차근차근 이 캠페인 안에 대해 설명해 드리려고 합니다.”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던 상무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고쳐 앉았다.
사회를 보던 홍보팀장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희 DW의 기획 방향은 앞서 대일기획에서 설명해 주셨던 기획안과 일치합니다. 통신 환경은 급변하고 있고 트렌드는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습니다.”
숨을 고르며 차현우가 좌중을 둘러보았다.
“오늘의 십 대는 내일의 이십 대이며 모레의 삼십 대입니다. 아래의 통계를 보시면 아시다시피 40대가 넘어가면 기존에 사용하던 제품을 잘 바꾸지 않습니다. 이른바 부동층, 그러니까 콘크리트 소비층인 것이지요. 우리는 이것을 충성도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이 고객에 굳이 더 많은 애를 쓸 필요가 없다?”
침묵했던 상무가 드디어 질문을 했다.
차현우가 앞으로 한 발짝 걸어나가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이미 공고한 소비층을 형성하고 있고 이쪽은 유지만 해주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십 대를 공략한다고 해서 섣불리 기존 브랜드의 품격을 해쳐서는 안 되겠지요. 따라서 저희는 ALL이라는 신규브랜드의 론칭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아! 그러면 ALL이 십 대를 겨냥한 신규 브랜드의 이름이군요!”
“그렇습니다. 특히 저희는 십 대와 이십 대 초반을 겨냥했지만 그중에서도 스물한 살을 콕 집어 타깃으로 설정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이미 상무와 문답 형태로 PT가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스물한 살이 되고 싶으니까요.”
차현우의 눈이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