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고 천재 명도혁-121화 (121/252)

광고 천재 명도혁 121화

지옥의 아이데이션이 시작되었다.

DW애드의 팀장급 이상이 마주 앉아 국내 외 통신사 자료를 분석했다.

탁기준이 먼저 포문을 열었다.

“AT텔레콤에서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방향의 전권을 맡긴다는 거지? 상당히 파격적인 제안인데 어떻게들 생각해?”

“맞아. 이런 경우는 드물지. 보통은 대략적인 홍보 방향성이라도 던져주는데 개별 브리핑에서도 별 고지는 없었지?”

“네. 현재로서는 홍보팀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정도만 들었습니다.”

전체 브리핑에서 공개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컨셉일 경우, 회사별 개별 미팅 시간에라도 언질을 주게 마련이었지만 이번엔 전면 자율 제안이란다.

강태오가 턱을 어루만지며 AT텔레콤의 지난 광고들을 훑어보았다.

“크리에이티브적으로 완벽한 광고들이야. 물론 기획적으로도 손색이 없지만, 때깔도 좋고 크으, 연기 좋고.”

“인쇄물인데도 표정이 살아 있어. 캡처본을 봐도 그렇고. 전화를 끄고 싶은 휴식의 순간을 잘 포착했지. 정말 좋은 배우야.”

“동감. 아무튼 그건 그거고. 이 광고는 사실 창작 면에서 우수하지만 좀, 올드하지 않아?”

“그렇지. AT텔레콤에서도 이 부분을 고민하는 게 아닐까?”

역시 DW애드의 팀장급은 감이 좋았다.

아이데이션이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벌써 가닥을 슬슬 잡아가고 있었다.

차현우가 책상을 손끝으로 두드리며 입을 떼었다.

“AT텔레콤이 어려지고 싶은 거구만.”

“어려진다라. 그렇지? 아무래도 브랜드 이미지가 아저씨 느낌이 강하잖아.”

“맞아. 다른 제품군과 달리 통신 쪽은 어린 친구들 잡는 게 굉장히 중요해. 나이 들수록 보수적으로 지출하는 대표적인 품목이거든.”

“그런 점에서 AT텔레콤은 이쯤 해서 젊은, 아니지 완전히 어린 타깃을 공략할 필요가 있어.”

설문과 브랜드 선호도 조사 결과를 검토하며 모두 공감했다.

당시 AT텔레콤은 단연 시장 1위였지만 높은 가격대와 기존 공익광고 느낌의 광고 스타일로 인해 소비 연령층이 높은 편이었다.

시쳇말로 ‘아재 브랜드’.

이걸 깨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브랜드가 젊어지는 건 인간이 회춘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시간을 역주행하는 거니까.

‘회귀한 명도혁에게 딱 맞는 미션인가.’

도혁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툭 말을 던졌다.

“완전히 깨부숴야 됩니다.”

“흠, 파격으로 가자는 건가?”

“십 대부터 이십 대 초반까지. 특히 십 대를 타깃으로 잡는 게 맞을 것 같구요. 이들의 젊은 뇌는 웬만한 충격으로 꼼짝도 안 해요. 이미 머릿속이 질풍노도라서요.”

“하긴. 정신없을 시기지. 낙엽만 굴러가도 빡치잖아.”

모두 말 안 듣던 자신의 사춘기를 떠올리며 씁쓸해했다.

딱 봐도 엄마 말 엄청 안 듣게 생긴 인간들이었다. 특히 강태오는 가출해서 노숙까지 했다고 했던가.

아무튼 지금은 진지하게 아이데이션에 임하고 있는 강태오가 의문을 제기했다.

“근데 굳이 십 대까지 연령대를 낮춘 이유가 있어? 난 이십 대 초반 정도로 생각했거든.”

“네. 지금 십 대를 잡지 못하면 후회하게 될 거예요. 그런 말 있잖아요. 중학교 입학하고 눈 한번 깜빡하면 대입이라구요. 그만큼 아이들은 빨리 크고 그들이 곧바로 미래의 고객이 되는 거죠.”

“하긴 세월이 번개 같으니까.”

“그리고 십 대 때부터 벌써 AT텔레콤을 쓰게 해야 해요. 그래야 계속 사용하는 충성 고객이 되죠. 통신사 바꾸는 건 귀찮으니까요.”

탁기준이 미간을 좁혔다.

“의견은 좋은데 기존 AT텔레콤과 간극이 너무 커. 3060 타깃이던 브랜드가 갑자기 10대를 겨냥한다? 그것도 파격적인 광고로. 이거 잘못하다가는 역으로 아저씨 시장도 뺏길 수가 있다고.”

“맞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브랜드는 따로 가는 게 어떨까요?”

“브랜드를 따로 간다고?”

브랜드를 분리하는 전략은 미래에 굉장히 흔하게 사용되며, 유효한 결과를 창출한다.

“10대 브랜드만 별도로 론칭하고 10대에서 20대 초반까지 좋아할 만한 감성을 쏟아붓는 거예요. 아저씨 라인은 그대로 두고.”

“오호! 솔깃한데?”

“완전히 분리하는 건 아니고 AT텔레콤 로고 정도는 데리고 갈 겁니다. 아이들이 졸라도 지갑을 여는 건 부모 세대니까 신뢰도는 확보해야겠죠.”

“아주 좋아. 합리적이면서도 효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돼. 더불어 AT텔레콤의 이미지도 젊어지고 말이지.”

모두의 의견이 모이고 차현우가 컨셉을 도출했다.

“일단 기본 타깃이 십 대니까 허세? 큐티? 어떤 게 좋을까?”

“전부 다요.”

도혁이 화이트 보드판 위의 단어에 하나씩 동그라미를 그렸다.

* * *

“도준아, 가자.”

도혁은 섭외에 나서기 전 황도준을 불렀다. 오늘의 섭외에 함께하기에 가장 적절한 인물이니까.

“황도준. 너 게임 좋아하지?”

“게임 환장하죠. 어! 혹시 엑슨 광고 진행하는 겁니까?”

“아니, 지금 나가는 엑슨 소재(광고 CF 등의 결과물) 인기 많아서 당분간 교체 없을 거야. 그거 말고 AT텔레콤 때문에.”

“오!! AT텔레콤이 왜요? 아, 그 빅 프로젝트에 저를 끼워주시는 거군요! 역시 대표님!!”

부담스럽게 안기는 황도준을 겨우 떼내고 재킷을 들었다.

“PT 따려면 모델이 좋아야겠지? 우리 DW는 사전 샘플 CF가 강점이니까 미리 섭외하려고. AT텔레콤에 협조 공문도 띄워놨어.”

“오! 멋집니다. 그런데 게임은 왜 물어보신 겁니까?”

“오늘 섭외할 친구가 프로게이머거든. AT텔레콤 소속 임한율.”

“이, 임한율이요!!!!!!!”

대표실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는 통에 밖에서 직원들이 힐끗거렸다.

“황도준! 조용히 해. 누가 들으면 내가 너 고문하는 줄 알겠다.”

“와! 대표님. 와! 나 임한율 실물 영접합니까? 지금요?”

“좋아할 줄 알았다. 너 얼굴에 게임 좋아한다고 써 있거든.”

“제가 잡기에 좀 많이 능한데 게임이 그중 최고입니다. 와. 임한율이라니. 대표님 덕분에 제가 별의별 진귀한 경험을 다 해봅니다. 제가 뼈를…….”

“자자, 또 그놈의 뼈 타령 그만하고 출발합시다. 약속 시간 다 돼가.”

분위기 띄우고 모델 칭찬하기엔 황도준만큼 진심일 수 없기에 절반은 성공했다고 생각하며 차에 올랐다.

도착도 하기 전에 황도준이 방방 뛰며 한 건물을 가리켰다.

“대표님 이쪽입니다! 저기가 AT텔레콤 프로게이머 선수들이 생활하는 건물이에요.”

“나도 듣기는 했는데 잘 아네? 어떻게 숙소까지 알고 있냐?”

“제가 팬입니다. 제가 AT텔레콤 완전 팬이에요!”

모델 섭외도 좋지만 너무 시끄럽다.

“아, 떨립니다. 정말 프로게이머 임한율 선수 만나는 겁니까?”

“그렇게 좋냐?”

“그럼요. 황제 중의 황제잖아요. 세계 챔피언. 아, 떨려. 아, 진정해야지.”

“그래 인마. 일단 진정하고, 우리는 팬으로 온 게 아니라 비즈니스로 온 거 명심해라. 너무 흥분하면 없어 보이지 않겠어?”

“아! 그렇군요. 주의하겠습니다. 점잖게. 네!”

“귀여운 자식. 매니저랑 같이 나오긴 한다는데 저쪽 건물이구나.”

건물 로비 앞 카페에 들어서자 낯익은 얼굴이 그들을 맞았다.

도혁이 염두에 둔 AT텔레콤 광고의 모델이자, 현 AT텔레콤 게임팀 소속 주장 임한율이었다.

“안녕하십니까? DW애드 코리아 명도혁이라고 합니다.”

“네. 연락받았습니다. 최근 엑슨 광고 만드신 그 회사라고 해서 기대하고 나왔습니다.”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한율아, 인사드려. 아까 본사에서 말씀하신 광고 회사 대표님이야.”

“안녕하세요.”

매니저가 의례적인 대화를 하는 내내 임한율은 조용히 미소만 짓고 있었다.

소문대로 낯을 가리는 성격인 모양이었다.

“제가 게임밖에는 몰라서요. 본사에서 협조 부탁한다고 연락을 받긴 했는데…… CF는 언제 찍어도 자신이 없어요.”

“제가 임한율 선수 나오는 CF 몇 편 보고 왔거든요. 말씀만 그렇게 하시지 연기 잘하시던데요? 마스크도 좋으시구요.”

그가 한국 e-sports를 전성기로 이끈 데는 잘생긴 미모도 한몫했다. 여성팬들을 게임의 세계로 이끌었거든. 그리고 워낙 인기가 많다 보니 CF도 다양하게 진행 중이었다.

“샘플 촬영은 간단히 진행될 거예요. 힘드시면 인쇄물에 넣을 정도의 사진만 찍어도 되니 부담 안 가지셔도 좋습니다.”

“알겠습니다. 반나절이면 되겠죠?”

“충분합니다.”

간단히 의견을 조율하는 중 황도준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게임하시는 거 한 번만 구경해도 되겠습니까?”

“아, 저희 연습실에서 말씀이세요?”

“네. 뭐, 저희가 비즈니스 차원에서 참고하려고 하는 거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비즈니스에 어떤 차원으로 참고되는지 대표인 도혁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황도준이 점잖게 부탁했다.

매니저가 조금 망설이더니 연습실을 오픈하겠단다.

“이까지 오셨으니 잠시 가보실래요? 혹시 또 나중에 엑슨 광고 같은데 우리 애들 꽂아주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럼요. 이번 기회에 서로 윈윈 하면 좋겠습니다.”

“오! 연습실 오픈해 주시는 겁니까?”

황도준이 더 감추지 못하고 오두방정을 떠는 가운데 AT텔레콤 프로게이머 연습실로 올라갔다.

연습실 안에서는 프로게이머들이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벌써 오후 세 시를 넘긴 시각이었지만 방금 깬 듯 새집을 지은 머리에 몽롱한 표정, 그렇지만 모두 진지하게 게임에 임하고 있었다.

황도준은 천국에라도 온 듯 감격하며 선수들과 게임 장비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매니저는 선수들 홍보에 열을 올리는 중이었다.

“임한율 선수 외에도 우리 팀에 쟁쟁한 선수들이 많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젊은 친구들 타깃으로 하는 제품에서 프로게이머들을 선호해서요. 저희도 적극 고려하겠습니다.”

도혁과 매니저가 열심히 비즈니스를 하는 중, 정작 비즈니스를 하겠다던 황도준은 게이머들과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품위를 유지한다더니. 휴우.

도혁은 나가서 한 소리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황도준을 잡아끌려던 찰나였다.

“이쪽 분 게임 좋아하시는 거 같은데 한판 하고 가시죠?”

“네? 제가 프로게이머님들과 함께 게임을요? 지금 말씀이십니까?”

게이머 중 한 명이 어리둥절해하는 황도준을 끌어다 앉혔다.

“그럼 잘하지는 못하지만 한 번만 해보겠습니다. 저 누구랑 같이하나요?”

“이왕이면 본진까지 들어왔는데 황제랑 한판 붙으셔야죠.”

임한율이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그의 형형한 눈빛에 소름이 끼쳐올 정도였다.

연습 게임인데도 포스 장난 아니구나.

아까 낯을 가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완전한 프로의 모습으로 눈빛을 빛내는 임한율이었다.

그런데 어라, 황도준은 왜 똑같은 표정이냐?

황도준 역시 비장한 표정으로 헤드셋을 둘러썼다.

게임이 시작되었다.

도혁은 속으로 한숨을 깊숙이 삼켰다.

이놈의 게임쟁이들은 왜 이렇게 아무 데서나 승부욕이 터지는 거냐.

또 게임으로 늦게까지 집에 못 가게 생겼다. 그런데, 잠시만.

황도준 너! 이거 초반 빌드업! 와, 씨. 이거 뭔데??

도혁의 눈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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