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120화
칼퇴근을 앞둔 DW애드 코리아에 불길한 신호음이 울렸다.
-삐…….
-삐…….
“뭔데요. 뭔데 그러십니까?”
“AT텔레콤에서 경쟁 PT 들어오란다. 하반기 마케팅 제안서 받는다는데?”
“네? AT면 국내 1위 통신사잖아요. 와, 거기서 경쟁 PT에 들어오라고 했다구요?”
“응. 잠시만.”
때맞춰 도혁의 전화가 울리고 직원들의 시선이 그의 입술에 집중되었다.
“명도혁입니다.”
-나 태강애드 이정민이야. 혹시 AT텔레콤에서 연락받았나?
“방금 팩스 받았습니다.”
-역시 DW애드였구만. 한 업체가 신생이라고 들었는데 명 대표가 떠오르더라고. 이야, 드디어 우리 한판 붙는 건가.
“아, 태강애드도 이번 PT에 참여하는군요.”
-그럼. 아마 메일도 도착했을 거야. 상세 사항은 메일 참고하라고 하더라고. 그럼 모레 사전 브리핑에서 봅시다.
“곧 뵙겠습니다, 팀장님.”
전화를 끊은 도혁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직원들을 바라보았다.
묘한 기분이었다. 독립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태강애드와 경쟁 PT라니.
AT텔레콤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자 최고의 통신사였다. 워낙 훌륭한 캠페인을 진행하기로 유명한 회사이기도 하다.
도혁이 이메일을 확인하기 위해 껐던 PC를 켜자, 황도준이 머리를 긁적였다.
“결국 우리 팀 야근인가요. 하아.”
“아니. AT텔레콤에서 보낸 메일만 확인하고 회식하러 나가자.”
“메일도 보냈어?”
도혁의 주위로 직원들이 몰려들었다.
[귀사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하반기 AT텔레콤 마케팅커뮤니케이션 제안서를 경쟁 공모하고자 하오니 참여를 희망하시는 경우 사전브리핑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장소: AT텔레콤 본사 4층 소회의실]
공문을 뽑아 들고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혁이 일단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회식하러 갑시다. 나도 뭘 좀 먹어야 생각이 좀 정리될 것 같아서.”
“좋은 생각입니다, 대표님. 먹으면서 어떻게 할지 계획을 세워봅시다.”
“그럽시다요. 이왕 먹는 것 소갈비 뜯읍시다. 에너지 비축해야지.”
근처 고깃집에 도착해서 술을 따르면서도 도혁이 표정을 풀지 않자 탁기준이 다가왔다.
“명 대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AT에서 연락 온 건 어느 정도 인정받았다는 뜻이야.”
“그렇죠. 그 점은 고무적으로 생각합니다. 다만 현재 인력으로 어디까지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어서요.”
“아무래도 덩치 큰 건을 맡으면 외주로는 한계가 있지.”
차현우도 다가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도 해운대 광고 건이랑 지자체 선고 광고로 찍어내다시피 양산하고 있는 판이라 디자이너들 갈려 나가고 있어.”
“그렇죠. 제가 그 부분이 제일 염려되는 거예요.”
탁기준 역시 한숨을 내쉬었다.
“점점 경쟁 PT 들어오라는 연락이 이어질 거야. 업계에서 DW애드 소문이 워낙 좋기도 하고 광고 집행 총액 20위권 들어갔잖아?”
“아, 광고주들이 순위로 걸러서 연락하겠군요. 그래서 AT에서 이번에 입질이 들어왔구나. 흠.”
침음성을 삼키며 도혁이 고기를 집어 들었다.
“언젠간 몸집을 불려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그 시기가 올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술술 풀릴 때 팍팍 치고 나가는 게 좋다고 봐. 그리고 우리 좀 더 갈려도 돼. 튼튼한데, 뭐.”
팀장급이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기는 하지만 직원 보강은 해야겠다.
도혁은 팀장들을 바라보며 강조했다.
“현재 팀별로 업무를 나누고 있잖아요. 좀 더 구체적으로 다시 업무 분장을 해야겠습니다. 탁기준 선배 팀이 지자체 캠페인이 통째로 들어온 건을 전담하고, 차현우 선배 팀은 건설 광고와 지자체 브로슈어 작업을 할게요. 그리고 이번 AT텔레콤 기획 건은 우리 팀과 팀장급들이 기획안을 짜도록 합시다. PT하는 동안 직원 공채 진행하구요.”
“크으. 팀별로 인원이 충원되는 건가.”
“인터넷 쪽도 보강했으면 좋겠어요. 점점 온라인 광고가 강화되는 추세니까. 의견 어떠십니까?”
“이왕 공채하는 김에 같이 진행하면 좋지. 그런데 명 대표.”
강태오가 소주를 따라주며 팩트 폭행을 했다.
“AT텔레콤 광고 벌써 따놓은 것처럼 말하네.”
“아, 당연히 우리가 따는 거 아닙니까? 우리 DW 역량으로 PT 정도야 통과할 걸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집행 걱정하고 있죠.”
“하여간 패기 하나는 알아줘야 돼. 경쟁 PT 어디 어디 들어오는데?”
“아까 태강애드 이정민 팀장님이 전화 주신 거였어요. 태강 들어올 거고 뭐 두어 군데 대기업 들어오겠죠.”
“잠시만 명 대표, 지금 어디서 들어오는지도 모르고 자신만만한 거냐?”
탁기준이 어이없다는 듯 입매를 비틀었다.
“그럼요. DW는 확실하니까 누가 들어오든 걱정 안 합니다.”
“신생은 우리 정도일 거고 나머지는 쟁쟁할 거다, 아마.”
“그렇겠죠. 어차피 내일 탁 선배님이 알아보실 거 아닙니까? 마당발이시니 금방 파악하실 듯요.”
“벌써 물어봤지.”
핸드폰을 흔들어 보이며 탁기준이 부연했다.
“태강, 우리, 그리고 대일기획이랑 원래 하던 강일 커뮤니케이션까지 네 군데래.”
“이야. 전쟁 시작이구만.”
“이건 광고대행사끼리의 전쟁에 진입하는 것도 있지만 대통신 전쟁에 참전한다고 볼 수도 있어요.”
“그렇지. 통신 쪽 캠페인 아주 난장판이야.”
최근 들어 ‘통신 전쟁’이라고 불리울 만큼 마케팅 전쟁 중이었다.
굴지의 투톱 AT텔레콤과 KK이동 통신, 둘 다 피 튀기는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폭발적으로 광고를 쏟아붓는 중이었고.
그 한가운데, 그것도 맨몸이나 마찬가지인 신생 업체가 뛰어들 생각을 하니 오소소 소름까지 돋아왔다.
“직원 뽑고 최대한 외주 돌리고 진행하면 못할 것도 없어. 사실 집행이 문제가 아니라 기획이 문제지.”
“기획은 걱정 없습니다. 우리 팀장님들이 계신데 무조건 잘 뽑힐 거라고 확신해요.”
“이런, 대표님이 이렇게 믿어주시니 우리도 그 뭐시기냐, 도준아 너 만날 하는 말.”
“넵! 뼈를 갈아서 충성을 다한다구요!”
“그래. 분골쇄신하겠습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거국적으로 한잔하시죠!”
“짠!!! 이멤버 포에버다.”
“AT텔레콤 씹어 먹어버립시다!”
광고주를 삼키겠다는 야심 찬 출사표를 던지며 모두 잔을 높이 들었다.
* * *
AT텔레콤 사전 미팅 당일, 반가운 얼굴들과 마주했다.
“명 대표 왔구만. 기준이도 잘 있었지?”
“네. 이 팀장님. 잘 지내셨지요?”
“둘 다 신수가 훤하구만. 특히 명 대표는 태강 있을 때만 해도 학생티 못 벗었는데 이제 완연한 청년 사업가야.”
“감사합니다.”
탁기준이 태강애드 이정민 팀장을 보자 공손히 인사하곤 청첩장을 건넸다.
“벌써 희주 대리한테 받았지. 이거 탁은 태강 가족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모호하구만.”
“에이, 한번 가족이면 가족이죠. 우리 희주 잘 부탁드립니다.”
“부탁 안 해도 알아서 잘하고 있어. 이제 곧 예식이네?”
“네. 일이 겹쳐서 신혼여행은 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바쁘다는 농담에 이정민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AT는 우리 태강에서 하면 되지 않겠나? 양보를 해.”
“에이, 왜 이러십니까, 팀장님.”
“DW애드에서 양보 안 하면 따기 쉽지 않아 보이니까 그렇지. 요즘 백전백승이라고 업계에 소문이 자자하다고.”
“뭐, 실패한 건 없는 것 같습니다.”
“어이구, 이거 명 대표 벌써 사업가 다 됐구만. 말투는 겸손한데 아주 자기 PR이 당당해!”
도혁의 어깨를 두드리며 이정민이 대회의실 문을 열었다.
“일단 들어가십시다. 벌써들 와 있구만.”
대회의실에 들어서자 대일기획과 강일커뮤니케이션 사람들이 보였다.
탁기준은 아는 얼굴인 듯 도혁에게 메모를 내밀었다.
[대일기획은 팀장급인데 강일커뮤니케이션에서는 부사장이 직접 왔네.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거지.]
기존 AT텔레콤 광고를 강일이 해왔던 만큼 부사장이 직접 브리핑에 참석했다.
결기가 서린 눈빛으로 강일의 부사장이 도혁을 바라보았다.
“소문이 자자하더니. 오늘 뵙네요. 탁기준 씨도 DW에 있었구만.”
“네. 반갑습니다.”
살짝 엉덩이를 들어 가볍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곧 광고주가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AT텔레콤 홍보팀장입니다. 이쪽은 실무자이구요.”
“반갑습니다.”
“저희가 네 군데 컨택했는데 모두 참석하신 거죠?”
홍보팀장이 강일의 부사장과 먼저 악수를 나누었다.
“어떻게 부사장님께서 직접 오셨습니까?”
“중요 사안이니 당연합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쪽이 대일기획, 태강도 오셨고. 이 팀장님 오랜만입니다.”
서로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 모양이었다.
홍보팀장이 도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DW애드 코리아에서 오신 것 맞죠?”
“네. 맞습니다.”
“신생인데 어떤 기성보다 야심 차게 캠페인 진행 중이시라고요. 추천 많이 받았습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쪼록 기대가 큽니다.”
팀마다 명함을 돌리며 인사를 마친 홍보팀장이 유인물을 나눠주었다.
“이렇게 모신 건 올 하반기부터 내년 상반기까지 AT텔레콤의 마케팅커뮤티케이션 제안을 받기 위함입니다. 이 부분은 충분히 알고 계실 거니까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렸다.
홍보팀장이 한 장을 펼쳐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바로 가장 크게 성공했던 AT텔레콤 광고의 한 장면이었다.
“이 광고를 모르시는 분은 안 계실 겁니다. 기존 저희가 진행했던 ‘핸드폰은 끄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캠페인을 통해 저희가 시장을 선점한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이 상승세를 계속해서 이어갈 만한 후속타가 필요한 실정입니다.”
도혁이 아주 좋아하는 광고였다.
AT텔레콤의 이미지를 강조하며 시장 1위로서의 공익성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도 상당히 세련됐다.
무엇보다 톤이 도혁이 무척 선호하는 스타일이었다.
‘역시 강일커뮤니케이션, 만만치 않아.’
강일에서 진행했던 이 ‘핸드폰은 끄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광고는 유수의 광고제에서 상을 타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시장에서의 평가도 아주 좋았고.
하지만 이렇게 잘 만들어도 차기작에서 PT를 붙이는구나.
도혁은 시장의 비정함을 다시 한번 느끼며 홍보팀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번 커뮤니케이션 제안은 각 회사에서 방향성을 잡아서 가져오시면 되겠습니다. 현재 저희로서는 특별한 안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기존의 이미지를 유지할 수도 있겠구요, 파격적으로 갈아엎을 수도 있겠지요.”
‘파격이라고?’ 도혁은 미간을 말았다.
정말 파격적인 광고가 이때쯤 등장하고 AT텔레콤 캠페인은 사회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다.
소녀에게 토마토를 던지던 티저 광고를 떠올리며 도혁이 브랜드 브로슈어를 내려다보았다.
‘알고 있다고 그대로 하면 반칙이잖아? 재미도 없고. 이번엔 어떻게 좀 틀어볼까.’
변칙을 주며 기존의 캠페인에서 한 걸음 나간 광고를 만드는 재미가 쏠쏠했다.
머릿속에는 수십 가지의 통신사 광고들이 스쳐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