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119화
‘서해를 지킬 왕좌의 주인은 누구인가.’
비장한 저음의 OST가 흘러나오고 대한 공화국 성우의 목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이어 등장하는 바다의 왕 장보고, 분장을 한 김선갑이 앞으로 성큼 걸어 나왔다.
“내, 오늘 이 바다를 평정하겠소. 앞을 가로막을 자 아무도 없으니 인천을 위해 다시 한번 나아가리라. 필사의 각오로 참전할 것이오. 모두 길을 열어라!”
“와아아아!!!”
칼을 빼 들고 앞을 향해 달려가는 장보고의 모습이 풀샷으로 잡히고 이내 형형한 그의 눈빛이 클로즈업되었다.
점점 줌을 당기는 카메라. 장보고의 눈동자 속으로 들어가자 인천시정을 살피는 최대현 시장의 모습이 펼쳐졌다.
시청 집무실 내에서 업무를 보다가 헬멧을 쓰고 바쁘게 현장을 뛰어다닌다.
탁 트인 바다와 설계도를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최대현의 모습이 풀샷으로 잡혔다.
다음으로 소탈하게 시민들과 악수를 나누며 선거운동을 펼치는 모습이 마지막으로 카메라에 담겼다.
그런데 최대현의 모습이 처음엔 블러 처리되어 흐리게 보였다가 선명하게 나타났다.
모든 장면에서 마찬가지였다.
화면 속 최대현이 멘트를 시작했다.
“여러분은 저를 볼 수 없었을 겁니다. 어디 숨어 있다가 톡 나타났나 싶으시죠? 저는 인천시의 수호신이거든요. 저, 최대현은 인천시민의 수호신으로서 보이지 않는 모든 곳에서 여러분을 돕겠습니다. 곁에 머물겠습니다.”
다시 인천시장을 클로즈업하다가 그의 눈동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카메라.
장보고가 전장에서 싸우는 장면으로 이어지고 기어코 승리를 쟁취하며 병사들과 기뻐하는 모습.
“인천을 수호하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당신을 지킵니다. 인천광역시의 수호신 최대현.
인천시청 대회의실에서 펼쳐진 시사회였다.
최대현이 박수를 치며 끄덕였다.
“지난번 기획안으로 볼 때보다 느낌이 확 사는데요? 직관적이고 간결하고 시선을 확 끄는 것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네. 말씀하신 부분이 핵심입니다. 어렵고 세련된 크리에이티브를 표현하면 되레 역효과가 날 수 있어서요. 특히 영상물은 20대부터 노인까지 폭넓은 타깃이 이해해야 하니까 쉽게 가는 게 좋다고 판단했습니다.”
“아, 좋아요. 아주 좋습니다. 이 최대현이, 수호신 장보고 되는 건가요?”
“마음에 드십니까?”
“그럼요! 역시 이 카리스마는 김선갑 배우님을 따라갈 사람이 없어. 암. 크으, 다시 봐도 포스가 장난이 아닙니다.”
고개를 주억이는 그에게 이번에는 CM을 들려주었다.
선거 유세 기간 내내 하루 종일 틀다시피 해야 할 중요한 곡이었다.
-최대현, 최대현. 인천의 수호신 최대현
어디서든 보이지 않지만 어디서든 보이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최대현, 최대현. 인천의 수호신 최대현.
최대현 최대현 인천의 수호신 최대현.
“이건 동요 같은 느낌이 드네요? 돌림노래 같기도 하고.”
“의도한 겁니다. 애들이 좀 따라 불렀으면 기원하는 마음으로 만들어봤습니다.”
“오호!”
“그 역사에 관한 유명한 노래가 있지 않습니까? 대한민국을 빛낸 위인처럼 아이들이 재미 삼아 부를 수 있게 간단한 멜로디와 리듬으로 만들었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한 가지 버전을 더 준비했습니다. 들어보시죠.”
-Ye, 최대현, 최대현. 인천의 수호신! 최대~~~현!
보이지 않아도 보이네. YO, 어디서든 안 보여도 어디서든 보이네.
Boy네. 번쩍이는 Boy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삐까뻔쩍 불이 번쩍 인천을 밝히는 수호천사 수호신.
Ye, 최대현, 최대현. 인천의 수호신! 최대~~~현!
“오호, 이건 젊은 층을 겨냥한 랩 버전이군요.”
“맞습니다. 우리 디자이너가 랩 버전도 하나 더 넣어야 한다고 해서 준비해 봤습니다.”
“흠, 랩도 아주 좋지만 동요로 가는 게 어떨까요? 더 화제성이 있을 듯합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브로슈어 외 8종 리플렛 가져왔는데요. 확인하시고 수정 사항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세세한 문구 수정은 우리 홍보 담당이 연락할 겁니다. 큰 산은 넘었네요. 이대로 진행하면 되겠습니다.”
호쾌하게 컨펌을 끝낸 최대현에게 도혁이 당부했다.
“시장님, 저희 DW에서 진행하는 이번 지자체 캠페인은 비슷한 톤으로 갈 겁니다. 물론 사극 톤만 유지하고 컨셉과 카피는 모두 달라지겠지만요.”
“오호! 다른 지자체도 기대가 되는군요.”
“캠페인 전체를 진행하는 시는 인천시를 포함해 몇 안 될 것 같긴 합니다. 지자체 선거까지 시간이 촉박해서요.”
“이런, 우리 명 대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겠군요. 그래도 일이 많은 게 좋지요?”
“네. 맞습니다.”
“그럴 때 신명 나지. 암, 내가 그 기분 잘 알지요.”
인천시장이 격려의 눈빛을 보내며 도혁에게 악수를 청했다.
“끝까지 한번 달려봅시다. 잘 부탁합니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시장님.”
맞잡은 두 남자의 손이 뜨거웠다.
* * *
“아니, 대표님, 어떻게 그 밋밋한 최대현 시장의 컨셉을 수호신으로 포장합니까? 와, 눈으로 보면서도 안 믿깁니다.”
브리핑에 함께 들어갔던 황도준이 혀를 내둘렀다.
“아, 내가 원래 한 포장 하지.”
“세상에.”
황도준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최초 기획안을 휙휙 넘겼다.
“특색 없는 이미지가 약점이다. 무난한 시정 운영이 강점이나 그만큼 개성이 없어 컨셉 도출에 어려움이 있다, 라고 쓰여 있는데 말입니다. 이걸 정면으로 받아서 보이지 않는 수호신으로 만드시다니요.”
“우리 최대현 시장님께서 눈에 띄게 어그로를 안 끄시니 할 수 없지.”
“크으. 그래서 아예 블러 처리했다가 등장하게 하신 거군요.”
“맞아. 인트로는 어땠어?”
도입부 주목도를 묻는 말에 황도준이 큰 소리로 외쳤다.
“도입부가 특히 예술이었죠. 아우, 김선갑 아저씨 목청이 얼마나 큰지 프로덕션 사람들 다 깜짝 놀라 가지고. 조명도 한번 떨어졌지 않습니까?”
“그랬지. 아무튼 결과물이 잘 나와서 다행이다.”
“하, 랩이 좀 아쉽네요. 참, 만 원 주십시오. 제가 말씀드렸죠? 최대현 시장님 젊은 감각으로 만들어 달라고 주문해도 평범한 거 찾으실 거라구요.”
“옜다 만원. 우리 도준이 고생해서 주는 용돈이다.”
브로슈어와 시안 작업으로 며칠을 꼬박 새운 도준에게 만원을 건네며 공치사를 했다.
디자인 컨셉 잡을 때까지 조금 헤맸는데 포스터 하나 완성하더니 쭉쭉 8종 리플렛을 뽑아냈다.
“민아만 손 빠른 줄 알았더니 제법이야?”
“이런 말씀 드리기 좀 그렇지만 제작 중에 손은 제가 제일 빠를걸요?”
“올~ 자신감!”
“홍대 거리 구르면서 그린 그림이 얼만데요.”
“참. 너 학교는 왜 안 가냐.”
말하고는 살짝 후회했다.
일을 산더미처럼 시켜놓은 대표가 할 말은 아니지 싶어서.
“대표님 저 학교 때려치웠습니다. 모르셨구나.”
“야!”
“아이고 귀청이야! 대표님 귀 떨어지겠습니다.”
운전을 하다 말고 도혁이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안 봤는데 학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었습니까?”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네 인생에서 학위는 중요해. DW만 다니다 말 거야?”
“네. 그럴 건데요? 대기업 갈 것도 아닌데 대학은 시간 낭비죠.”
“어유, 이 대책 없는 놈.”
도혁이 핸들을 한번 툭 치며 창문을 열었다.
“적성에도 안 맞았습니다. 등록금도 너무 비싸구요. 그깟 졸업장 뭐라구요.”
“그래도 인마. 내가 네 미래를 이렇게까지 바꾸는 건 좀…….”
“에이, 뭘 또 미래까지 바꿉니까. 결정은 제가 한 거니까 원망 안 해요.”
도준은 전생에 태강애드 최고 엘리트 디자이너 중 한 명이었는데 고졸이 되게 생겼다.
도혁이 인상을 찌푸리자 도준이 장난을 쳐댔다.
“에이, 꼰대. 대표님 보기보다 꼰대네요. 학벌 따지고.”
“난 그런 거 안 따진다니까 인마. 세상이 따지는 거지.”
“세상 눈치 보는 게 꼰대 아니에요?”
“세상의 눈치라.”
도혁이 길게 한숨을 뱉곤 도준의 어깨를 툭 쳤다.
“하긴 황도준이 세상 기준대로 사는 놈은 아니지.”
“대표님도 사실 그러시잖아요. 그러니까 DW애드 같은 회사가 탄생한 거구요.”
“하긴. 인생 독고다이더라. 진짜 세상 눈치 보지 말고 한번 달려봐?”
“네! 죽을 때까지 따라다니겠습니다!”
다시 한번 충성 맹세를 다지며 황도준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귀여운 자식.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사무실에서도 귀여운 자식이 고개를 묻고 일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진우가 중얼거리며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다.
뭐가 잘 안 풀리는지 중얼거리면서 한숨까지 내쉬고 있었다.
그 모습에 황도준이 달려가 말을 걸었다.
“진우 선배님, 뭐가 잘 안 풀리십니까? 어! 와씨, 이거 뭡니까? 대박.”
“실감 나지? 우리 간식 사다리 탈 건데 얼른 골라라. 막내니까 먼저 고를 특권을 줄게.”
“헐. 이 현장감 무슨 일입니까? 3D기법이라도 쓰신 거예요?”
“실감 나지?”
황도준의 호들갑에 슬쩍 이진우가 그린 사다리를 보았다.
그러곤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냐 이게, 광고 시안이야?”
“아니요. 우리 간식 먹으려고 사다리 한번 그려봤습니다.”
“야, 이 자식, 이게 무슨 재능 낭비야. 미친.”
“낭비는요. 몇 분 안 걸렸습니다.”
사진인 줄 알았다. 실사와 같이 반듯하게 그려진 사다리를 보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출장 나갔던 분들 전부 들어오는 중이라고 하셔서 열심히 그리고 있었습니다. 두 분도 얼른 골라보시죠.”
“뭘 사다리를 타. 내가 살 테니까 아무거나 시켜.”
“그래도 그린 공이 있는데 아깝지 않습니까?”
“하긴. 근데 간식 사다리가 이렇게 고퀄일 이유가 있냐? 인쇄해서 가져온 줄 알았네. 부럽다. 금손아.”
도혁은 한 팔을 이진우의 어깨에 올린 채 금손이 그린 황금 사다리의 1번을 골랐다.
“어! 대표님 0원! 하여간 운도 좋으십니다!”
“내가 좀, 그렇지. 그 좋은 운 끌어다가 인천시 컨펌 끝내고 오는 길이야.”
“올~~~ 축하드립니다.”
“우리 도도팀 도준이랑 둘이 완성했지만 샘플 시안이니까 모두 참고해. 사극 톤 컨셉으로 통일할 거니까.”
“예썰! 그래서 간식은 뭘로 할까요?”
화기애애한 오후의 간식 타임이었다.
출장에서 돌아온 직원들과 함께 치킨을 뜯자 황도준이 맥주 타령을 했다.
“술 없이 치킨만 먹으려니 목이 컥컥 막힙니다. 아, 콜라가 밍밍해요.”
“그럼 오늘 다 같이 맥주 한잔할까? 인천시 컨펌도 통과했고 모두 고생했잖아. 6시 다 돼가는데 오늘 야근할 팀 없지?”
“지금 웹하드 하나 걸고 나가면 될 것 같긴 해요. 내일 오전까지 송부해야 해서요.”
최민아가 난색을 표하며 스케줄을 확인했다.
“민아야. 오늘 할 일은 내일로 미루는 게 맛이지.”
“으이구. 그런 말 하는 사장님, 지구 위에 명도혁 대표님뿐일 거예요.”
눈을 곱게 흘기며 컴퓨터 앞에 앉는 최민아게 황도준이 닭 다리를 순살만 발라주었다.
훈훈한 광경에 절로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럼, 민아 씨 시안 넘기는 대로 출발합시다.”
“그럽시다. 짐들 싸요.”
-삐…….
-삐…….
칼퇴근을 도모하던 직원들의 시선이 팩스로 향했다.
“뭐여. 이 불길한 신호음은.”
“그, 그러게 말입니다. 뭐지. 느낌이 싸하지요?”
이진우가 팩스로 다가가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어, 우리 광고주한테 온 게 아닙니다만? 대표님 이것 좀 봐주시겠습니까?”
“왜. 뭔데 그래.”
이진우가 내민 종이를 바라보던 도혁의 눈동자가 미묘하게 반짝였다.
“잠깐만. 저거 명도혁 대표님 일거리 물었을 때 표정인데. 맞지?”
“맞네. 맞아. 내가 공모전 할 때 저 눈빛 많이 봤지. 하아.”
직원들이 술렁이는 가운데 도혁이 고개를 들었다.
“우리 칼퇴근 못 하겠는데?”
“네? 대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