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115화
사무실에 도착하니 익숙하지만 반갑지 않은 얼굴이 앉아 있었다.
도혁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갔다.
불청객은 군대에서 만난 이진우의 원수, 박성철이었다.
군 생활 내내 참 어지간히도 이진우를 괴롭혔는데. 도혁의 부탁으로 타 부대로 전출 갔었다.
덕분에 이번 생에선 이진우가 살았고.
‘저 미친 자식이 여기는 무슨 일이야. 도대체 어떻게 알고 왔냐.’
박성철의 한쪽 팔뚝을 가득 메운 뱀 문신이 꿈틀거렸다.
그가 특유의 허세 어린 표정으로 입꼬리를 비틀며 도혁을 보며 벌떡 일어섰다.
“명도혁 병장님! 행님! 반갑습니다. 찌라시 회사 대표님 되셨다고 소문 듣고 와봤지. 어! 이진우!”
“내가 언제부터 박성철 형님이냐. 그리고 목소리 좀 낮춰라. 여기 일하는 곳이야.”
“에이, 행님 왜 이러십니까. 내 지나가다 신문에서 보고 신나게 뛰어왔지요. 그, 무슨 게임 회사 사장이랑 악수하는 거 대문짝만하게 났더만요.”
업무 제휴 때 기사 나간 걸 본 모양이다.
박성철의 시선이 이진우에게로 이동했다.
“이야~ 이진우도 여기 있었구만. 이게 얼마 만이야. 행님은 회춘하셨는지 더 젊어지셨네요.”
“너는 왜 이렇게 삭았냐. 나보다 열 살은 많아 보여서 형님 소리 듣기 민망하다.”
“에이, 틱틱거리시기는. 우리 행님 내 팔에 뱀 쳐다보네. 큰일 하나 칠 때마다 뱀도 한 마리씩 박아봤는데 행님, 마음에 드십니까?”
형님 같은 소리 하네. 우리가 그렇게 끈끈하지 않았을 텐데?
도혁이 대충 대꾸했다.
박성철이 과장된 액션으로 이진우를 끌어안고 흔들어대더니 도혁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거 나는 반가워서 달려왔는데, 이거 영 반응이 걸쩍지근하네.”
“박성철! 목소리 낮추라고 했지? 네 눈에는 여기 사람들 일하는 거 안 보이나?”
도혁이 경고를 날렸다. 박성철은 도혁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이진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이진우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마치 부대에서 누가 불러도 눈을 피하던 그때처럼 당황한 모습이었다.
진우가 한동안 눈 맞춤이 잘됐었는데. 태도도 많이 당당해지고 주변 직원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중이었다.
다시 예전 이진우의 모습이 비치자 가슴이 아렸다.
도혁은 한숨을 내쉬며 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진우가 이 순간을 스스로 이겨내길 바라면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챈 최민아가 박성철을 안내했다.
“일단 대표실로 들어가실까요? 대표님 손님이신 거잖아요.”
“이야, 아가씨, 이 회사 경리인가 보네. 행님 경리 하나는 잘 뽑았네요. 경리는 이렇게 빠릿빠릿해야지. 아가씨 저기, 믹스 하나, 아니, 두 개 섞어서 좀 말아주소. 얼음은 이빠이 넣고.”
“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최민아가 당황해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직원 한 명이 박성철 앞을 가로막았다.
놀랍게도 이진우였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이쪽으로 앉아요. 박성철 씨가 함부로 대할 사람 아니니까. 민아 씨는 얼른 자리로 돌아가서 일하시기 바랍니다.”
“네. 정말 웃기는 분이네요.”
“올~ 저 여자 이진우 이건가? 어, 직장에서 연애질이나 하고 말이지, 많이 컸네.”
박성철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뭉툭하고 짤막한 새끼손가락을 천박하게 흔드는 꼴이 더럽기 짝이 없었다.
이진우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종이컵에 믹스커피를 타 왔다.
“빨리 이거 드시고 용건이나 말씀해 보십시오.”
“나야 신문에서 우리 반가운 명도혁 행님 얼굴 보고 기뻐서 달려왔지. 내 지금 출근하는 사무실이 요 근처거든. 이진우, 이거 뭐라고 불러야 하나. 아무튼 진우도 반갑고.”
박성철은 이진우의 후임이었지만 언제나 하대했었다.
도혁은 훅 한숨을 뱉으며 박성철을 노려보았다.
“진우한테 예의 갖춰. 여기 사회고, 네가 진우보다 한 살 어리잖아.”
“뭐, 예에. 그러지요. 명도혁 행님, 샤프한 얼굴 여전하네. 이 뱀 대가리처럼 눈빛이 날카롭다 아닙니까.”
“헛소리 그만하고 용건이 뭐야.”
“아! 그게 제가 코딱지만 한 회사를 하나 하고 있는데요.”
박성철이 명함을 내밀었다. 아주 낯익은 상호였다.
도혁은 퍼뜩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전생에도 박성철은 일본계 대부업체의 한국 지사에서 일했었다. 대대로 3대째 대부업을 하고 있다고 했던가.
주식으로 떼돈을 번 후 TV 광고까지 진행했었지.
지금 시점보다는 훨씬 뒤의 일이었는데, 현생의 시간이 꼬이며 이 인간이 일찍 나타나 버린 거다.
당시 태강애드는 열심히 대부업 광고를 고사했지만 무슨 압박을 받았는지 울며 겨자 먹기로 박성철의 일본계 업체 캠페인을 진행했다.
최대한 크리에이티브하게, 코믹하게 만들어냈지만 욕도 참 많이 먹었던 광고였지.
도혁은 박성철이 내민 명함을 바라보며 한숨지었다.
“그래서 이 회사 광고를 우리와 진행하고 싶다?”
“그럼요. 아무래도 아는 사람이 대표로 있는 광고 회사가 낫지 않겠습니까? 명도혁 병장님이야 믿을 만하죠. 이진우는 왜 데리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박성철. 방금 예의 갖추라고 했을 텐데?”
“네이. 이진우 씨.”
돼지같이 불룩한 입술을 씰룩거리는 꼴이 매를 버는 모습이다.
저 입을 한 대 때려주고 싶다고 생각하며 도혁이 칼같이 거절했다.
“우리 올 하반기까지 일이 꽉 차 있어. 그런 광고할 여유 없다.”
“내 구멍가게라고 소개해서 그러십니까? 우리가 사회적 지위는 낮아도 돈은 많아. 얼마면 되는데요.”
“시간 없어. 돈도 아쉬울 거 없고.”
“난 많이 아쉽네요, 행님. 회사도 요 앞이고 딱 좋겠다 싶었구만.”
도혁이 딱 잘라 말하자 박성철이 입맛을 쩍쩍 다셨다.
양 입술 가에 허연 침 거품이 더럽게 고여 있었다.
그 꼴이 보기 싫어 도혁이 비뚜름히 고개를 기울이다가 문득 빅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내가 광고 회사 하나 소개해 줄까?”
“어! 괜찮은 데 있습니까? 행님이 소개해 주면 좋지요.”
박성철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최근에 태강애드에서 독립해서 좋은 회사 차린 사람 한 명 알아. 조덕현이라고 아주 유능하신 분이지.”
“오! 그래요?”
“무려 S대 출신이고 영국 유학파야. 알아두면 든든할 거다. 무엇보다 너희 회사랑 참 잘 어울려.”
“이거 회장님께 낯이 서겠는데요? 행님 감사합니다!”
조덕현과 박성철의 콜라보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바퀴벌레 한 쌍의 왈츠인가.
도혁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이진우를 바라보았다. 두 남자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부딪혔다.
둘은 소리 없이 웃었다.
* * *
달달한 입금의 시즌이었다.
엑슨에서 받은 대규모 투자금은 광고공사 보증금으로 들어갔기에 실질적인 정산은 이제 시작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속속 입금되는 광고료에 도혁은 자꾸만 광대가 승천했다.
솔직히 DW애드 코리아의 현재 규모에 비하면 엄청나게 큰 금액이었다.
혼자 휘파람을 불고 있는데 차현우가 다가와 광고공사에서 발행된 책자를 보여주었다.
“우리 DW애드 이제 첫 페이지에 들었어. 소위 1페라고 하지? 전국 20위권 안이라고!”
“크으. 드디어 순위권이군요. 직원분들 모두 정말 고생 많았습니다.”
“그게 뭡니까?”
귀염둥이 제작부 막내들이 광고공사 책자를 보며 물었다.
“광고 회사는 매달 성적표 나오잖아. 책자 후반에 매달 방송 광고 매출액 순위가 발표돼.”
“어우, 살 떨리네요. 고3 때도 매달 성적표를 붙이지는 않는데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잠시만, 그런데 지금 우리가 이달에 20등을 기록했다는 거예요? 와, 대단하다.”
“맞습니다. 막내님. 그것도 전국 20등이야. 장난 아니지?”
차현우가 황도준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피식 웃었다.
순위를 유심히 보던 최민아가 미간을 좁혔다.
“잠시만요, 이거 TT 기획이에요? 순위가 왜 이렇게 떨어졌지?”
“많이 주춤하네. 여기 소문 안 좋더니 하향세 탔나 보다. 광고 회사는 캠페인 망하면 나만 아는 게 아니라 전국에서 알아봐.”
“그렇지. 이 성적표를 우리만 보는 게 아니라 광고주들도 보거든. 제작사들도 그렇고, 방송국은 말할 것도 없고.”
“이야, 우리 회사라서가 아니라 DW애드 코리아 약진이 정말 눈에 띄네요. 이게 몇 계단 오른 겁니까? 불과 두 달 전엔 4페이지에 있었습니다.”
“이게 다 모두 열심히 뛰어준 덕분이야. 정말 고맙다.”
“대기업 부럽지 않은데요? 아니, TT 기획은 식구가 몇 명인데 저 매출로 유지가 됩니까?”
“남의 식구 일은 내 알 바 아니고 난 우리 식구 좀 챙겨야겠다.”
도혁의 말에 직원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왜요, 우리 떡볶이 사주시게요? 회식하려나. 헤헷. 삼겹살?”
“에이, 아무리 그래도 폼 떨어지게, 우리 전국 20위라고. 떡볶이에 순대도 같이 먹읍시다.”
“그럼 난 튀김 추가요. 김말이도 꼭 사 와라.”
“넵!”
이런 소박한 사람들을 봤나.
도혁은 간식을 사러 가려는 막내들을 불러 세웠다.
“민아 씨, 간식보다는 현금이 낫지 않겠어?”
“현금이 뭐라고요? 내가 잘못 들었나?”
“조금 기다려 봐. 순서대로 미팅할 거니까.”
도혁이 큰 소리로 탁기준부터 불렀다.
“유지비 많이 드는 사람부터 미팅 좀 하시죠?”
“이거 왜 이래. 명 대표, 나 밥 많이 안 먹어!”
“돈은 많이 받으실 걸요? 들어오시죠.”
“뭐?”
처음 회사를 꾸릴 때부터 생각했던 거였다.
대한민국에 둘도 없는 회사를 만들자. 또라이 없고 월급 루팡 없는 회사. 대신 일한 만큼 공정하게 대접받는 회사 말이다.
그래, 바로 ‘공정하게’가 포인트였다.
그리고 도혁은 지금 결심했던 공정한 수익 배분을 하려 한다.
탁기준이 회의실 의자에 앉자마자 벙긋거렸다.
“설마 진짜 돈 주려고 부르셨습니까? 우리 명 대표님.”
“그럼요. 처음 선배님 모시고 올 때 PS(Profit Share) 드릴 거라고 했잖아요. 우리 DW애드는 회사 규모에 비해 수익이 현저하게 많습니다. 모두 직원들이 뛰어준 덕분이니 나눠 가져야죠.”
“올~~~!”
예비 신랑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인생에서 목돈이 가장 많이 들 시기이니만큼 신이 났다.
“오! 명 대표님! 돈 봉투에 넣어 주는 겁니까? 완전 두둑하구만.”
“처음이라 서로 기분 좀 내보려고 아날로그 방식으로 준비했습니다. 다음 달부터는 계좌 입금 해드릴게요.”
“헉! 잠시만 명 대표! 뭘 이렇게 많이 넣었어. 오만 원짜리만 있는 줄 알았더니 수표도 있잖아!”
“뭘 이 정도 가지고. 말은 안 했지만 이번에 기획 쪽에서 참아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디자이너 먼저 충원했잖아요.”
“에이, 한눈에 봐도 제작이 더 힘들었는데 뭐. 기획도 필요하면 말하긴 할 건데, 지금 멤버 좋잖아?”
“맞아요. 현우 선배나 태오 선배까지 기획력을 갖추고 있어서 당분간은 이대로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럼그럼. 사람 더 뽑지 말고 그 돈 지금처럼 우리 나눠 줘. 이야. 이게 다 얼마냐. 은행부터 가야겠다. 다음은 누구 부를까?”
생활고에 시달리던 차현우의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