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112화
DW애드 사무실에 반가운 얼굴이 찾아왔다.
배우 전서윤과 경수현이었다. 양손 가득 간식 꾸러미와 꽃다발까지 들고 왔다.
도혁이 달려가 짐을 받으며 그들을 맞았다.
“기획사 사무실로 간다니까 두 분이 직접 오셨네요.”
“진작 한번 와보려고 했어요. 오늘 둘 다 스케줄 없어서 빈둥거리다가 들러봤죠. 키즈 오디션, 오늘이 결승전이죠?”
“네. 곧 시작합니다. 오늘 우승자와 준우승자가 전서윤 씨와 함께 방긋토이 CF에 출연할 거예요.”
“누가 나랑 합을 맞추게 될지 지켜볼까요?”
결승전은 생방송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DW애드 직원들과 두 배우가 TV 앞에 모여 앉았다.
아역 배우 출신인 경수현이 꼬마들을 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저 나이 때 저도 오디션 많이 불려 다녔었죠. 아우, 밤 엄청 새우고 애라고 봐주는 것도 없고. 저것도 못 할 짓이에요.”
“그래도 수현이는 성공했잖아. 저렇게 유년시절부터 사춘기까지 다 바치고 포기하는 애도 많아.”
“그렇죠. 행운이라고 늘 생각하면서도 아쉬운 마음이 들 때가 있어요. 나 학교에서 사귄 친구 한 명도 없어. 단 한 명도 없다구요.”
“…….”
밝고 반듯한 데다 서글서글한 성격의 경수현이었다. 그런 그가 학창 시절 친구가 한 명도 없다는 말에 모두 한숨지었다.
“모든 일이라는 게 시기가 있잖아요. 어린 시절엔 학교를 가고 20대에는 연애를 하고 그런 것들 말입니다. 이 일 하면서 제일 아쉬운 게 그런 평범한 생활을 못 해봤다는 거예요.”
“하긴. 배우에게 평범한 일상은 사치지. 그래도 모든 선택에는 포기가 따르는 법이니까.”
“아역의 문제는 그 선택을 부모님이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게 문제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결국 아이 자신이 져야 하구요.”
경수현은 말을 멈추고 찻잔에 입술을 대었다.
대화를 이어오던 전서윤이 쿨하게 맞받아쳤다.
“연기는 다 팔자에 있으니까 하는 거야. 소질 있어야 뜨고. 예술혼이 피한다고 피해지니?”
“하긴. 결국은 본인이 연예인 일을 즐겨야 이 바닥에서 살아남긴 해요. 부모님 탓할 것도 없긴 하지만 뭐 평범한 일상을 누리지 못하고 산다는 거지.”
“으이구. 누가 들으면 경수현 연애도 안 하고 사는 줄 알겠다?”
“어! 누나!”
“내가 지금 입 열면…….”
“누나 뭐 먹고 싶어요. 누님!”
비밀을 누설할 듯 말 듯 장난을 치는 전서윤이었다.
위기를 맞은 경수현이 목소리를 높이며 화제를 돌렸다.
“지금 방송 시작하는데요? 저기 평생 연기하고 살 것 같은 꼬마 나오네. 강민경이요!”
“오! 아, 귀여워. 어쩜 좋아.”
“웬일이니. 꺄!!”
전서윤과 최민아가 프로그램이 시작하자마자 소리를 질러댔다.
탁기준이 한마디도 안 들린다고 투덜대며 볼륨을 높였다.
후원사에 방긋토이가, 공동 주최사에 DW애드 코리아의 이름이 자막으로 찍히자 경수현이 감탄했다.
“도혁이 형은 DW애드 오픈했다고 인사 오기도 전에 몇 가지 캠페인을 한 거예요. 일레라 가구 때부터 알아봤지만 도혁이 형은 진짜 불도저 같아.”
“두 배우님들이 많이 도와주신 덕분이죠. 잘되면 잊지 않겠습니다.”
“이미 완전 잘되신 것 같은데요? 부산 해운대 쪽 일도 엄청 따 오셨잖아요.”
“그래?”
전서윤의 말에 경수현이 혀를 내둘렀다.
“나 요즘 해운대 마린시티녀잖아. 이미 진행한 거만 해도 몇 건인데.”
“광고주분들이 선호하셔서요. 이 자리를 빌려 서윤 씨께 감사합니다.”
고급 아파트와 주상복합이 즐비한 마린시티였다.
우아한 미모의 전서윤은 건설 광고주들에게 인기가 아주 많았다.
“참, 내가 해운대 쪽 일 작업하면서 부동산 정보를 좀 얻었지. 바닷가에 세컨 하우스 하나 장만하려고.”
“그래? 부럽다. 난 아직 누나처럼 잘 벌지를 못해서.”
“웃기시네. 나보다 훨씬 잘나가는 거 알거든?”
두 분 모두 대한민국 대표 배우가 될 거니까 걱정 말고 이제 좀 조용히 해줬으면 좋겠다.
정말 결승전이 시작했거든.
도혁은 두 배우에게서 시선을 떼고 오디션 결승전으로 눈을 돌렸다.
“어차피 우승은 강민경이구나. 그래. 그게 맞지.”
“아직 결정도 안 됐는데 성급하기는.”
“저기 ARS 투표 현황 좀 봐. 참, 우리도 투표할까?”
“주최 측에서 투표 참여하면 안 되지. 한 표라도 공정하게. 안 그래?”
직원들의 갑론을박이 이어지는 가운데 ARS의 숫자가 가파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제1회 투니 채널 키즈 모델 선발 대회 대망의 우승자는 바로!”
모두의 예상대로 우승은 고깔모자 소녀 강민경이었다.
준우승은 두 살 어린 남자아이가 차지했다.
감격한 아이들이 눈물까지 보였다.
미스코리아를 패러디해 왕관을 쓴 꼬마 둘이 손을 흔들며 피날레를 장식했다.
“마지막까지 너무너무 귀엽다. 둘이 손잡고 걷는 것 좀 봐. 웬일이니.”
“이 피디. 아이 둘 다 메인으로 갈 거지?”
“그래야겠죠? 벌써 그림이 예쁘게 그려집니다.”
이진우가 손가락으로 네모를 만들어 보이며 미소 지었다.
TV를 끈 도혁이 보드판 앞으로 걸어갔다.
“두 분 오신 김에 방긋토이 CF 컨셉 회의 마지막으로 정리할까요?”
“에이~ 대표님! 벌써 6시 다 됐다고요.”
“오디션도 성황리에 마쳤는데 놀러 가요. 놀러 가! 놀러 가!”
“그럴까?”
사실 더 정리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아이들이나 동물이 출연하는 CF의 콘티는 단순하기 짝이 없다.
간단해도 제시간에 끝내기 쉽지가 않기에 최대한 심플하게 뽑게 마련이다.
강박적인 성격 탓에 한 번 더 보려고 했는데, 그냥 놀지 뭐.
늘 그랬듯 자발적 회식을 추구하며 빠져도 좋다고 말해봤지만, 아무도 빠지지 않는 DW애드의 회식이 시작되었다.
“직원끼리 놀러 가시는데 저희가 괜히 낀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눈치 보인다 그치, 누나?”
“별말씀을요. 저희야 좋죠.”
말은 그렇게 해도 전혀 눈치를 보지 않는 두 배우도 함께였다. DW애드도 술자리에서는 굉장히 오랜만에 모인 듯했다.
“매일 보는 얼굴인데도 술집에서 보니까 더 식상하다.”
“그러니까, 이 자식아. 한잔해.”
강태오가 차현우에게 술을 따르는데 둘이서 뭐라고 계속 속닥거렸다.
“저기 두 분은 원래 저렇게 친해요? 볼 때마다 딱 붙어 있네요.”
“동아리 시절부터 붙어 다니긴 했죠. 징그럽게.”
도혁이 대충 대꾸했다.
저 표정, 둘 다 일할 때 얼굴인데. 술자리에서도 일하나 보네.
탁기준도 뭔가 눈치챈 듯 도혁에게 속삭였다.
“저 둘 심상치 않아, 요즘. 뭔가 꾸미고 있는 느낌이란 말이지.”
“그래요? 약간 기대해도 좋은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쁜 일은 아닐 거예요. 저래 봬도 둘이 붙으면 시너지가 장난 없거든요.”
“흠, 그래? 우린 어때?”
느끼한 탁기준의 말에 도혁이 소스라쳤다.
“떨어지시죠. 진심 소름 돋았습니다.”
“그러냐? 왜, 우리 캐미도 장난 없지. 태강 때부터 딱 붙어서…….”
“결혼 언제 하십니까?”
도혁이 딱 말을 잘라 말을 돌리자 탁기준이 놀란 기색을 보였다.
“어! 명 대표 나 결혼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
“모르는 것 빼고는 다 알죠. 빨리 청첩장 주세요.”
“어! 뭐야. 탁기준 팀장님 결혼하십니까?”
“올~ 누구예요? 네?”
“너네도 알 법한 사람?”
쑥스러운 듯 탁기준이 청첩장을 꺼내 들었다. 카드의 한가운데 찍힌 결혼사진을 보고 모두 경악했다.
“악! 서희주 선배? 어머 웬일이니. 선배 진짜 연예인 같다.”
“잠시만요. 이건 탁기준 씨예요?”
전서윤이 사진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경수현도 사진 속 남자와 탁기준을 번갈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보통 신부 얼굴에 뽀샵을 하지 않나요? 무슨 신랑 얼굴을 이렇게 열심히 보정했습니까?”
“내가 좀 와이프에 비해서 외모가 딸려서.”
“악! 와이프래.”
축제 분위기에서 최민아만이 죽을상이었다.
“내가 탁기준 팀장님 포샵한다고 야근했잖아요. 청첩장 부탁하면서 자기 얼굴 보정만 신경 쓰더라니까요. 잡티가 얼마나 많은지 지금도 손가락이 다 아프네.”
“우리 민아 씨가 애 많이 썼지. 고맙다.”
“어, 잠시만. 아직 날짜 여유 있네요. 이날 스케줄 좀 볼게요.”
잠깐 일정을 확인한 경수현이 탁기준을 돌아보았다.
“혹시 축가 불러 드릴까요? 부를 사람 있어요?”
“오! 정말입니까? 해주신다면 저로서는 영광이죠.”
“아니지. DW애드 직원들 다 같이 부르면 어때요? 선창은 대표님이 하고.”
“잠시만. 잠깐만 여러분.”
도혁이 급히 맥주를 들이켰다.
“수현이가 그냥 해. 음반도 냈잖아.”
“에이, 그러면 의미가 덜하잖아요.”
“내가 못하는 거 빼고 다 잘하는데 노래를 못해. 음치라고.”
결혼은 탁기준이 하는데 땀은 명도혁이 흘리고 있었다.
* * *
“미소도 슬픔도 함께하는 길. 언제나 힘이 되어준 당신과 함께라면~”
방긋토이 CF 촬영의 날. 현장으로 향하는 도혁의 차 안에 노래가 울려 퍼졌다.
돼지 멱을 따도 이거보단 나을 거다.
친절한 경수현 덕분에 엉겁결에 축가 선창을 맡아버렸다. 물론 탁기준보다 서희주 선배 때문이었다.
전생에선 제일 친했던 선배였는데 이번에는 그러지 못해 조금 아쉬워서.
‘그래도 축가는 끝까지 거절했어야 했는데. 아, 미치겠네.’ 다행히 미치기 전에 촬영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촬영 현장 역시 어질어질하긴 마찬가지였다. 물론 각오는 하고 들어왔다.
아역이 주인공인 CF 촬영은 여간 일이 아니다. 돌발 상황도 많고 아이들이 쉽게 지치기도 하고.
아직 전두엽이 채 자라지 않은 아이들은 어른보다 끈기가 없는 편이었다.
도혁은 힘들 것을 각오하고 현장에 들어섰다.
이미 한창 촬영이 진행 중이었다.
“대표님 오셨습니까?”
“진우, 잘하고 있냐? 일찍 오고 싶었는데 광고주 미팅이 늦게 끝났어.”
“네. 잘되고 있는데 아역들이 좀 힘들어합니다.”
“원래 애들 데리고 촬영하는 게 힘들어. 고생 많다.”
“그래도 저 강민경이라는 아이 대단합니다. 감독님한테 다시 찍고 싶다는 말까지 하더라구요. 더 완성도 있게 연기하고 싶다고 말입니다.”
“뭐? 애가 그런 말을 했다고?”
저 아이는 이미 프로구나. 외모를 타고났을 뿐 아니라 악착같은 노력까지 타고 났구만.
기특해하며 촬영 현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역시 아이는 아이인지라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아이템이 승용 완구이다 보니 아스팔트 위에서 그대로 작업했는데, 조명을 받아 뜨거운 열기가 올라왔다.
“컷. 1분만요. 이 장면만 좀 확인하고 바로 이어갈게요. 쉬면 오래 걸리니까 그냥 쭉 갑시다. 민경이도 그게 낫겠지?”
강민경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한숨을 내쉬었다.
지친 아이의 곁으로 엄마 역할인 전서윤이 다가갔다.
“이리 와. 다리 아프지? 언니 무릎 위에 앉아.”
전서윤이 털썩 바닥에 앉더니 아이를 무릎에 앉혔다.
털털한 줄은 알았지만 여배우가 체면 불고하고 바닥에 주저앉은 모습이라니.
무릎에 앉은 아이에게 부채질까지 해주고 있었다.
아스팔트가 많이 뜨거울 텐데.
도혁은 성큼 여자 둘에게 다가가 생수를 건넸다.
“둘 다 물이라도 좀 마셔요.”
“어! 도혁 씨 왔네요. 고마워요.”
아이에게 먼저 물을 먹이며 전서윤이 도혁에게 눈인사했다.
“예쁘면 됐지 뭘 인성까지 좋고 그럽니까?”
“네?”
두 천사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