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109화
“헐.”
“……뜻밖인데?”
강태오와 차현우가 멍하니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도준이 그린 레이아웃이 너무 전형적이었기 때문이다. 단정하고 심플한 선이 돋보이는 전형적인 기업 광고였다.
“외모랑 전혀 안 어울리는 차분함이네요. 굉장히 의외네요.”
“세련된 제품에 제 색깔만 담을 수는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전 남들이 보면 정신 나간 그림 그리는 사람이지만 광고가 그러면 안 되잖아요.”
“디자인 회사에서 일한 경험 있구나? 그쵸?”
“네. 뭐 여기저기 그림 알바는 많이 했습니다. 간판집 일도 하고. 홍대 앞 사거리 간판 그거 제가 다 그린 거예요.”
“올~ 허세도 마음에 들고. 면접 준비하고 왔네. 그쵸?”
“그럼요. 귀인을 만났다는데 열심히 해야죠.”
강태오가 무릎을 한번 탁 치며 종이를 한 장 더 내밀었다.
“마인드 좋고. 한 장 더 구경합시다. 그 정신 나간 그림이라는 거 궁금해졌습니다.”
“그렇지. 우리 그런 거 좋아하거든. 어질어질하게 한번 그려봐요. 마음대로 내키는 대로, 손 가는 대로.”
차현우의 말을 듣자마자 황도준이 자신 있게 펜을 다시 들었다.
그리고 곧 두 크리에이터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이런 미친!”
“오우야. 손은 또 왜 이렇게 빠르냐.”
“대박. 벌써 끝난 건가.”
놀랍게도 단 오 분 만에 그림이 완성됐다.
면접관 세 명, 그리고 방금 잠깐 마주쳤던 최민아의 캐리커처까지 네 귀퉁이에 그려내며 황도준이 펜을 놓았다.
세 남자가 눈빛을 교환했다.
“황도준이라고 했죠? 귀인은 우리가 만났네.”
“어! 그 말씀은? 그럼 저 투팍처럼 돈 벌 수 있는 겁니까?”
“네. 우리랑 같이 가시죠. 완전 DW애드 스타일입니다.”
“오! 대박. 감사합니다. 형! 아니, 대표님. 감사해요! 오 마이 갓!”
황도준이 갖은 오버액션을 곁들여 가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귀여운 자식. 도혁이 황도준을 보고 물었다.
“궁금한 건 없어요? 연봉이라거나, 근무 조건은 계약하면서 알려줄 거고 추가로 물어보고 싶은 거 있으면 지금 말해요.”
“아, 궁금한 거 있어요.”
황도준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저 뭐 보고 뽑으신 거예요? 도혁이 형, 아니, 대표님 캐리커처 한 장 그린 것밖에는 없는데요.”
“디자이너야 그림 보면 감이 오지. 지금 그린 저 그림 한 장으로도 감이 팍 오듯이. 천재 과구나 생각했어.”
도혁이 황도준이 그린 그림을 가리키며 얼버무렸다.
회귀해서 네 능력이 어디까지 승천하는지 안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단순한 황도준은 천재라는 말을 되뇌며 엄청나게 기뻐했다. 그러곤 한 가지 더 물어왔다.
“면접관님들. 이건 진짜 궁금한데 제가 그린 저 두 장의 그림 중에 어느 쪽이 DW애드 스타일인가요?”
“둘 다.”
차현우가 딱 잘라 대답했다.
“상업성과 예술성. 광고주와 크리에이터, 그리고 그 경계.”
“우와, 뭔 말인지 모르겠지만 엄청 거창하네요.”
“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우린 이 둘을 섞어서 광고다운 광고를 예술처럼 하는 게 목표에요. 지금 그린 두 장의 그림을 섞는 것. 대중성 위에 예술을 얹는 거지. 교묘하고 영리하게.”
“진심 뭔 말인지 더 모르겠지만 멋지기는 하네요. 참, 돈은 얼마나 준다고 했던가요?”
거침없는 황도준의 성격 또한 DW애드 스타일이다.
세 남자의 눈이 다시 허공에서 부딪혔다.
도혁이 황도준에게 다가가 악수를 건넸다.
“우리 회사 편하게 일하는 분위기라서 금방 적응할 겁니다.”
“넵!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재밌을 것 같아요.”
회의실 밖에서 이진우와 최민아가 귀를 기울이다가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꺅! 우리 드디어 디자이너 후배 들어오는 거예요?”
“저도 후배 생기는 겁니까?”
“어. 둘 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이 친구 손이 엄청 빠르니까 작업 맞추기 편할 거야.”
“오! 감격이다. 신입! 신입이라니!”
최민아가 감격에 젖어 황도준을 돌아보았다.
“난 최민아, 이쪽은 이진우. 우리가 제작팀 직속 선배예요.”
“잘 부탁드립니다! 황도준이라고 합니다!”
“혹시 오늘 바로 일할 수 있어요?”
“그럼요. 시켜만 주십시오. 선배님!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말에 최민아와 이진우가 눈짓을 나누었다.
“그럼 여기 이 시안부터 좀 손볼래요? A, B 안 중에 A 안으로 가기로 했는데, 대표님이 이걸로 또 3가지 버전 만들래요.”
“네? 잠시만요. 컨펌된 시안을 3가지 버전으로요?”
“3가지가 싫으면 5가지 버전으로 추가해도 되구요. 아무튼 알아서 예쁘게 만들어주세요.”
“어. 잠시만. 최민아 선배님. 아니, 명 대표님! 도, 도혁이 형!”
디자이너들이 제일 싫어하는 말 ‘알아서 예쁘게’를 강조하며 최민아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렇게 대한민국을 움켜쥘 디자이너 황도준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 * *
전장의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간다.
장난감 전쟁이 한창인 가운데, 어느덧 꽃을 샘내는 바람이 부는 2월이 되었다.
[식약처 어린이 장난감 전수 조사 실시 발표, 완구 업체 비상.]
[대한민국 장난감 이대로 좋냐던 방긋토이, 자신만만.]
[국내 완구 전수 조사 결과 발표. 관계부처 ‘무독성 기준 마련 고심’.]
[유해 물질 검출 D사, P사 등 23개 업체 경고 처분.]
[장난감으로 장난질이라니. 엄마들 뿔났다.]
[아이들이 물고 빠는 장난감, 옥수수에서 해답 찾았죠. 방긋토이 최인수 대표 전격 인터뷰.]
승리는 언제나 달콤한 법이다.
도혁은 오랜만에 아메리카노가 아닌 캐러멜 마키아토를 마시며 달달한 승리를 만끽했다.
신문 기사를 읽던 탁기준이 입매를 끌어올렸다.
“결국 진실이 가십을 이겼구만. 우리가 이겼어.”
“어제 방긋토이 대표님 인터뷰 봤어요? 눈물까지 글썽이시는 거 보니까 뭉클하더라구요.”
언론의 관심이 방긋토이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지고 유해 물질이 검출된 업체들은 모두 철퇴를 맞았다.
“조덕현 쪽에서 낸 해명 기사 때문에 엄마들이 더 화났더라구요. 자기네는 대형 승용 완구라나 뭐라나.”
“애들이 용도 따라 입에 안 넣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전선도 입에 넣는 게 애들인데.”
“그 회사는 빨리 조덕현을 손절하는 게 답이야. 김철준 대표님도 그렇고.”
김철준 얘기가 나오자 탁기준이 소식을 전했다.
“안 그래도 손절하신대. 참, 김철준 대표님 해외로 가신대. 미국으로 활로를 뚫으신다던데.”
“뭐라고?”
도혁이 의자에 기대었던 몸을 일으켰다.
김철준 대표가 해외 진출한 적은 없었는데?
“우리 독립하는 거 보고 뭔가 도전하고 싶어지셨대. 피가 다시 끓는다고 하시더라고.”
“아. 그러셨구나.”
“명도혁 대표가 김철준 대표님 피를 끓게 했구만.”
도혁의 회귀로 한국 광고계의 판도가 제법 바뀌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의 행보도 달라졌고.
DW애드로 사람들이 모였고 직원들의 미래가 당겨지고 바뀌었다. 특히 최민아는 전생에 황도준 팀장의 팀원이었지.
게다가 태강애드 김철준 대표가 해외 진출을 하다니.
나비효과처럼 변하는 미래가 조금이라도 더 긍정적으로 바뀌길 바라며 도혁은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자, 그럼 우리 본격적으로 방긋토이 캠페인 시작해야지?”
“우리 대표님 빡빡한 거 봐. 지금까지는 방긋토이 아니고 싱글토이 했냐?”
“그냥 전쟁터에서 구른 거지. 판 깔렸을 때 빨리 치고 나가야 돼.”
“우리 명 대표님이 이 정도 말할 때는 머릿속에 그림이 다 있는 거겠지? 회의 시작합시다.”
“그럽시다.”
순식간에 회의 모드로 바뀌고 직원들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어린이날 캠페인 전에 시험적으로 크리스마스 프로모션을 기획했던 것 기억할 거야.”
“맞아. 부산 경남만 묶어서 축소판으로 진행한다고 했었잖아. 그런데도 애견 루돌프 대회는 전국적인 관심을 모았지만 말이지.”
“성공적으로 실험이 완료됐다고 봐야겠지. 그래서 말인데 이번엔 진짜 대회를 개최하려고.”
진짜 대회라는 말에 차현우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방긋토이 어린이 모델 뽑으려는 거지?”
“빙고. 역시 차현우 선배 눈치 빠르네. 대대적으로 어린이 모델 공모전을 할까 해. 물론 전국구로 말이지.”
“타깃들이 아주 솔깃해하겠구만. 화제성 모으기에도 좋고.”
“공모전 자체가 광고나 마찬가지니까 전국적으로 2, 3월에 집중 홍보하고 모델 뽑은 뒤에 촬영 들어가면 일정은 대충 나올 거야.”
“그거 재밌겠는데?”
즉석에서 카피 경쟁이 펼쳐졌다.
“우리 아이가 모델 됐어요. 어때?”
“키즈 슈퍼 모델 선발 대회, 별로냐?”
“키즈 모델 오디션, 새싹처럼 빛나는 어린이들의…….”
“잠시만.”
한창 진행 중인 아이데이션을 끊으며 도혁이 눈동자를 빛냈다.
오디션?
“어우 나 대표님 저런 표정 지을 때 좀 무서워. 판이 커지거든.”
“나도.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실까.”
직원이 쑥덕거리는 소리를 도혁의 목소리가 뚫고 나왔다.
“오디션 보자. 어린이 모델 말이야.”
“엥? 오디션이야 당연히 보는 거 아니야? 선발 대회 공고를 길게 내자면서.”
“TV에서 진행하자고.”
“TV??”
아직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인기를 끌지 못했지만 2000년대 후반에 이르면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우후죽순 생겨난다.
김철준도 해외 나가는 마당에 오디션 붐을 몇 년 당긴다고 큰일 날 것 없겠지.
그리고 이건 어린이 프로그램이니까.
도혁의 말에 차현우가 무릎을 쳤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공영방송에서 어린이 동요 대회도 하잖아.”
“맞아. 그쪽이 뚫기 어려우면 케이블도 괜찮아. 아니, 케이블이 나을 것 같아. 공중파는 봄 편성 끝났을 거고 절차가 복잡해.”
“하긴. 어차피 화제성이 중요한 거니까.”
“케이블이라. 어린이 채널 말하는 거지?”
“맞아. 일단 내가 공중파 알아볼게. 현우 선배랑 탁기준 선배는 바로 투니채널 쪽 알아봐 줘. 아마 하겠다고 할 거야.”
도혁의 말에 최민아가 빙그레 웃었다.
“봐, 판이 막 커지잖아. 여성지에나 나갈 법한 키즈 모델 선발이 오디션 방송되게 생겼어.”
“그러네요. 장난감 전쟁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질어질합니다.”
황도준이 벌써 다이어리에 그림을 그려댔다.
그걸 본 이진우가 종이를 들이밀었다.
“키즈 모델 오디션 로고랑 캐릭터 만들어봤습니다. 어떻습니까?”
“아이데이션할 때 혼자 코 박고 있어서 혼내주려고 했더니, 이놈의 자식.”
도혁이 이진우의 머리를 헝클며 강조했다.
“시간이 또 촉박하지? 신문 잡지 공고 빨리 나가야 하니까 제작팀은 시안 뽑고, 기획팀은 프로그램 기획안 준비하고. 여기서 세팅해서 들어가야 편하지.”
“알겠어. 기획안 내가 작성할게.”
“컨셉 나오면 즉시 넘겨주세요. 그림 받아야 하니까.”
번개처럼 업무 분장이 완료됐다.
도혁이 재킷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공중파 봄 편성이 끝나서 오디션 프로그램까지 넣을 수는 없겠지만, 포기하긴 조금 아까우니까.
일단 방송국 앞에 도착한 도혁이 명현진의 부서를 찾고 있었다.
‘그래도 누나랑 진행하는 게 낫겠지? 피가 물보다 진하다고 하잖아?’
“명도혁 대표님! 뭘 그렇게 찾고 계세요? 도와드려요?”
익숙한 목소리가 다가왔다.
도혁이 핸드폰을 든 손을 내리고 미소를 머금었다.
‘물이 더 진할 수도 있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