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105화
크리스마스 주간, 거리가 북적였다.
도시는 축제로 들떠 있었지만 DW애드는 여전히 분주했다.
서울 사무실로 올라가 크리스마스 프로모션 안을 모두 확정한 도혁과 한수철이 다시 부산으로 내려왔다.
“지난번 출장 때 방문했던 건설 회사와 서울에 본사가 있는 곳을 제외하고 이제 두 곳 남았네.”
“수철아, 고생 많았다.”
“나보다 민아랑 제작팀이 엄청 고생했지. 방긋토이 작업에다가 샘플 브로슈어 만든다고 힘들었을 거야.”
회사 규모에 비해 제작 물량이 쏟아지고 있는 DW애드였다.
밤샘 작업으로 눈이 퀭해져 있는 제작팀을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도혁은 한숨을 내쉬며 브로슈어를 넘겨보았다.
역시 최강 제작팀답게 간결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디자인이었다.
“그나저나 탁 선배가 서울 업체 하나는 무조건 따 온다고 호언장담했으니 우리도 부산에서 하나 건져가야 할 텐데, 토종 기업들이 꼬장꼬장해.”
한수철 삼촌의 소개가 아니었다면, 문전 박대 당했을 거다.
부산 사장님들 텃세가 어찌나 거친지 겨우 얼굴만 보고 나온 곳도 있었으니까.
“지금 가는 곳이 삼촌이 평면 좋다던 연성이지?”
“맞아. 하도급 업체에 현금 거래를 한다는 곳. 저 언덕 위인가보다.”
차는 비탈길을 미끄러지듯 올라갔다. 겨울이었지만 한낮의 부드러운 햇살이 따사로웠다.
둘을 반기는 대표님의 표정도 연말이라 그런지 훈훈했다.
“아이고 반갑습니더. 앉으이소.”
“감사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명도혁이라고 합니다.”
“박훈명이요. 그냥 박 사장, 하시면 됩니더.”
명함을 주고받으며 도혁은 기분 좋은 예감을 느꼈다.
박 대표의 인상이 산타처럼 푸근했던 것이다. 흡사 방긋토이 사장처럼 든든한 뱃살에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피부색?
방긋토이 최 사장이 북유럽 산타라면 박 대표는 아프리카 산타 같았다.
건설 현장을 직접 다니는지 목덜미까지 피부가 까맣게 그을렸다.
“바쁘신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새는 마 겨울이라 좀 한가하지. 며칠 전에 시청 형님이랑 술 한잔하는데 명 대표랑 한수철 씨 말을 하더라고요. 회사 이름이 엄청 세련됐든데.”
“DW애드 코리아입니다.”
“사장이 어리다 카긴 하든데, 보자마자 놀래 뿌맀네. 그래, 포트폴리오 한번 봅시다.”
도혁이 준비한 샘플 브로슈어와 포트폴리오를 내밀며 설명을 시작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저희 건설 광고 처음입니다.”
“건설 광고는 안 해봤다는 겁니까?”
“네. 광고 공사 공모전과 지자체 슬로건 작업, 그리고 주식회사 엑슨 등 그간의 실적이 있지만, 솔직히 말씀드려야죠. 안 해봤습니다.”
“아인데. 오래 건설 밥 좀 묵은 느낌인데? 디자인도 회사 이름만큼 세련됐고. 역시 서울 회사는 다르네.”
“AE는 건설 광고 경력이 상당하구요, 디자인 팀은 믿으셔도 좋습니다. 어느 대기업과 견주어도 빠지지 않는다고 자신합니다.”
박 대표는 수상 경력과 샘플 브로슈어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온화하던 표정이 싹 걷히고 눈매가 날카롭게 빛났다.
‘역시 만만치 않구만. 동네 아저씨에서 한 번에 사업가로 돌변하네.’
펜까지 들고 꼼꼼하게 동그라미까지 치면서 읽어가는 모습이 여간 깐깐한 게 아니었다.
“시청 행님이 말했는지 모르겠는데, 내 보기보다 까다롭습니데이.”
“믿을 만한 분이라고만 들었습니다.”
“제안서 함 들고 와보소. 안 그래도 내 지금 브로슈어 때매 골이 지끈지끈하던 차였거든. 지금 하는 데가 말귀를 못 알아들어 가지고 찌라시 하나 만드는 데 천년만년이 걸린다 카이.”
“알겠습니다. 해운대 P호텔 옆 사업장이 주력 맞습니까?”
“그렇지요. 이봐라. 한 번에 척, 알아듣네. 명 사장. 어?”
“해운대 연성 사업장이야말로 명품 입지더라구요. 연성에 맞춤형으로 럭셔리하고 품격 있게 준비해 보겠습니다.”
“바로 그거지! 내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돌아 나오면서 한수철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여기 느낌 좋지? 대표님도 좋으시고.”
“수철아, 이런 광고주가 제일 힘들어. 나중에 겪어보면 알 거다.”
“그래? 훈훈하게 인상 좋으시던데.”
웃는 얼굴로 꼼꼼하게 조곤조곤 씹히는 컨펌을 아직 안 받아봤구만.
도혁은 박 사장이 샘플 브로슈어에 적힌 작은 오타를 발견해서 동그라미 치던 걸 떠올리며 한쪽 눈썹을 치켰다.
“뭐, 아무튼 박 대표님이 까다로운지 알려면 일단 수주를 해야겠지? 크리스마스 행사 끝나자마자 올라가서 또 달려야겠네. 방긋토이 후속 광고도 논의해야 하고. 곧 지자체 선거도 있어.”
“탁기준 선배 우리가 이겨먹겠는데? 나 연성 딸 수 있을 것 같아. 느낌이 팍 왔다고.”
“탁 선배도 따 오시겠지. 거기도 도베르만이거든.”
말을 하면서도 도혁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광고 의뢰 물량이 늘어나는 데다 선거전이 시작되면 정치권 광고도 몰아칠 거다.
그쪽이야말로 한 철 장사라 물량 공세인데, 잔손 많이 가기로 유명한 건설 광고까지.
‘보통은 전담팀을 나눠서 운영하는데. 지금 인력으로는 아무리 봐도 무리야.’
제작팀을 생각하면 더 영업을 하지 않고 멈추어야 할 정도였지만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사람을 뽑기는 더 뽑아야겠는데, 좋은 디자이너 찾기가 하늘의 별보다 힘들고.
‘그 자식한테 한번 가봐?’
누군가를 떠올린 도혁이 느리게 창문을 내렸다.
* * *
크리스마스이브의 아침이 밝았다. 무려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물론 서울의 얘기다.
“대표님! 메리 크리스마스! 지금 눈 와요. 화이트 크리스마스!”
“거기 눈 와? 여긴 쨍쨍한데.”
도혁이 호텔의 커튼을 걷으며 직원들의 전화를 받았다.
스피커폰 사이로 직원 여럿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행사 잘하시고 조심해서 올라오세요.”
“그래. 다들 성탄절 잘 보내고 푹 쉬어요. 나 올라가면 일 몰아칠 거 알지?”
장난스레 경고성 멘트를 날리고 서둘러 행사장으로 향했다.
방긋토이 최 대표가 산타가 되어 찾아갈 곳은 부산 외곽에 위치한 보육원.
크리스마스를 맞아 아이들에게 특별한 선물을 주고 싶다며 원장님이 사연을 보내왔다.
성공적으로 진행된 루돌프견 프로모션 덕분에 신청자가 많아 고민하던 차에 반가운 사연이었다.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기업으로 이미지를 각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요. 그건 그렇고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최 대표님 정말 산타 옷이 잘 어울리세요.”
“그런가. 난 입을 때마다 어색한데.”
전혀 어색하지 않은 표정으로 산타처럼 껄껄 웃으며 행사가 진행되었다.
썰매견으로 선정된 말라뮤트, 시베리안 허스키를 대동해서 나타난 산타클로스의 등장에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왔다.
“얘들아, 산타 왔다. 여기 썰매에 있는 것 중 세 개씩.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 가거라.”
“와!!!! 할아버지, 진짜 산타예요? 어디서 왔어요?”
“나? 부산시 사하구…….”
급히 한수철이 뛰어가 장난을 치는 산타의 입을 막고 아이들에게 핀란드라는 나라의 존재를 알려주었다.
아이들은 부산시 사하구든 핀란드든 아무 상관 없다는 듯 신나게 선물을 뜯어보고 산타 할아버지를 끌어안았다. 특히 썰매견들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부산 경남 지역 방송사와 신문사들이 취재를 나와 북새통을 이루는 가운데 원장님이 흐뭇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저거야말로 산타가 현신한 거 아입니까? 우리 보육원 아들 숫자가 몇인데 선물을 이래 챙겨주시고. 고마워서 우짜꼬.”
“아직 놀라시기는 이른데요?”
도혁과 한수철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마주 보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원장님의 곁으로 산타가 다가왔다.
“진짜 산타클로스의 선물은 이제 시작입니다.”
“예? 또 있다고요?”
최 대표가 손짓하자 비서가 달려와 판넬을 건넸다.
[방긋토이 실내 놀이터.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방문 기념 증정.]
“저희가 보육원 내에 실내 놀이터를 선물할까 합니다. 설치에 적당한 장소 말씀해 주시면 저희 직원이 도울 겁니다.”
“어머나, 실내 놀이터라니…….”
“아이들이 산타가 왔다 간 거 오래 기억하라고 남기는 거니까 건강하게 잘 자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세상에.”
말을 잇지 못하던 원장님이 기뻐하며 눈물까지 글썽였다.
지역 언론에서 이를 놓칠세라 빠르게 셔터를 눌러댔다.
‘이 정도면 성공인가?’
재미와 감동, 실리와 명분을 동시에 챙겨간 홍보 전략이었다.
일정이 빠듯했던 방긋토이 크리스마스 프로모션이었지만 제법 완성도 있게 진행되었다.
더구나 5월 어린이날을 맞아 대대적인 프로모션을 진행할 예정인데, 부산 경남 지역에 한정해 시험해 볼 수 있었다는 게 가장 고무적이었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지 않고 아이들을 바라보는 도혁의 곁으로 한수철이 다가왔다.
“도혁아, 크리스마슨데 우리 집으로 가자.”
“괜찮아. 크리스마스는 가족끼리 지내야지. 여친도 없고 가족도 없는 이 황량한 바닷가에서 뭐, 하아. 혼자도 괜찮다고.”
“그러지 말고 같이 가. 수아가 잘생긴 도혁이 오빠 데려오라고 매일 울고 난리도 아니야. 감당이 안 된다니까?”
“나 그 정도로 잘생겼냐?”
“하아, 대표라서 욕도 못 하고.”
그렇게 투닥거리며 한수철의 집 크리스마스 파티에 함께하기로 했다.
어차피 호텔 방에서 혼자 맥주나 마시고 있으면 처량할 거고, 꼬맹이 수아가 보고 싶기도 했으니까.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다다다다! 수아가 맨발로 뛰어나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도혁 오빠야 진짜 데려왔구나.”
“그래, 꼬마 아가씨. 여기 선물 가져왔다.”
“와! 크리스마스 선물도 있어! 흐어어엉.”
눈물을 흘릴 정도로 잘생겼나 보다.
뭐 어쨌든 격하게 반겨줘서 기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수아가 곁에서 쫑알거리고 동요로 각색한 캐롤이 흐르고 있었다.
역시 아이가 있는 집이라 그런지 크리스마스의 풍경이 활기찼다.
한수철의 어머니가 크리스마스 케이크과 치킨을 가져왔다.
저런, 오다가 레고를 밟으셨다.
도혁과 한수철이 급히 일어나 쟁반을 받아 들자 수아가 도혁을 걱정했다.
“도혁이 오빠야 무거울 건데.”
“수아야. 엄마가 지금, 다쳤잖니?”
“엄마는 조심했어야지.”
어린이집에 다닐 나이인데 아주 똑 부러진다.
한수철의 엄마가 멋쩍은 듯 웃으며 맥주를 권했다.
“맥주 괜찮죠? 수아가 진짜 도혁이 오빠야랑 결혼한대요. 어떡해요.”
“이런. 제가 열다섯 살 정도 회귀해야겠네요.”
“회귀라니. 재밌는 분이네요. 하하.”
의미심장한 농담을 버무리며 풍성한 식탁에서 즐거운 식사가 이어졌다.
한수철 아버지가 건배를 제의하며 감격의 멘트를 했다.
“이번에 수철이가 출장으로 부산행이 잦아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어색하던 가족 분위기도 많이 좋아지고.”
“수아 덕분이지 뭐.”
“그래, 우리 수아도 한몫했다. 거기 사위도 한잔할까?”
어느덧 사위가 되어버린 도혁이 머리를 긁적이며 잔을 들던 때였다.
-따르릉 따르릉
“잠시만요, 아버님.”
자리를 비켜 든 핸드폰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기사 보셨어요?
“봤지. 예쁘게 잘 나왔던데? 부산방송 저녁 뉴스에 나온 것까지 확인했어.”
-그게 아니라. 인터넷 기사요. 지금 회사가 왈칵 뒤집혔어요!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