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102화
해운대의 밤바다가 시원했다.
도혁과 한수철은 청사포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고요한 겨울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글지글 익어가는 조개구이를 집어먹던 도혁이 부산말을 흉내 내며 감탄을 뱉었다.
“크으. 부산 바다 끝내주는구만. 술도 달고 안주도 직이네!”
“여기 좋지? 지난달에 왔으면 더 좋았을걸. 부산 국제영화제 보고 여기서 전어 한 접시 하면 끝내주거든.”
“키야. 부산 좋네. 난 그렇게 예전부터 바다가 좋더라고.”
“나중에 잘나가면 부산에 지사 하나 차리셔. 말이 나와서 말인데 방긋토이 어쩔 생각인 거냐.”
한수철이 도혁의 빈 잔에 술을 채워주며 한숨지었다.
“크리스마스까지 한 달 반밖에 안 남았는데 프로모션이 되겠냐?”
“그 점이 바로 우리 DW 같은 작은 회사의 강점이지. 태강이라면 택도 없어. 결재선 통과하기도 까다롭고 절차도 복잡하잖아.”
“그런가? 그런 과정 전부 생략하면 이 일정이 가능하긴 한 걸까?”
“당분간 부산서 죽치고 앉아 있어야지 뭐, 시안이나 제작 진행은 웹하드로 하고. 나는 서울팀 믿는다.”
솔직히 한 달 반이면 간당간당하지만 못 할 것도 없었다.
즉시 해결 가능한 점이 중소 회사의 장점 아닌가.
무엇보다 우리는 DW애드니까.
“민아도 손 빠르고 현우 선배, 태오 선배 다 믿을 만하니까 일을 덥석 받아 올 수 있었던 거야.”
“하긴. 셋 다 사우디 가서도 기름 광고 팔 수 있는 인간들이긴 하지. 기획 컨셉 어그러지는 건 탁 선배가 보면 될 거고 말이지. 그러고 보니 우리 같이 광고한 지도 제법 됐다. 그치?”
“맞아. 깨끗한 참소주 광고할 때 이 부산 지역 소주 얘기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지.”
“그러니까. 세월 빠르다. 그사이에 명도혁 회사를 다 만들고.”
“저기 수철아. 너, 태강애드 때려치운 거 후회 안 하냐?”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던 말이었다.
대학생 신분으로는 파격적으로 정직원 전환이 된 데다 김철준 대표의 인정도 받고 있었고.
아무튼 태강은 대기업이니까.
차마 묻지 못했던 말에 한수철이 뜻밖의 대답을 했다.
“난 확신이 있어. 성공할 거란 확신.”
“DW애드가 성공할 거라는 확신?”
“아니. 내가 어디 가도 성공할 거라는 확신을 말하는 거야.”
“올~.”
한수철. 차분한 편이지만 은근 한 번씩 이렇게 부산 사나이 특유의 자신감을 내보이곤 했었다.
전생의 한수철을 떠올리며 도혁이 소주잔을 부딪쳤다.
“맞아. 한수철 뭘 해도 잘하지. 잡기도 능하고 말이야.”
“명도혁이야말로 그렇지 뭐. 사실 나 자신을 믿은 것도 있지만 도혁이 너 믿은 게 컸고.”
“아씨, 오글거려. 우리 서로 얼굴에 금칠해 주는 거냐?”
“그런가? 아무튼 결론은 우린 잘 될 거라는 거. 근데 우린 당분간 부산에 꼼짝 마 하고 있어야 하네. 나 진짜 호텔 잡아주면 안 되냐?”
“안 된다니까. 그럴수록 인마, 자꾸 집에 가서 인사드리고 그래야 가족이 되지.”
“그럼 도혁이 너도 우리 집 갈래? 혼자 가기 좀, 뻘쭘해서 그래.”
이 정도로 본가에 가기 싫은 건가.
생각보다 새어머니와 더 많이 어색했던 모양이었다.
도혁은 호텔이 편했지만 조금 망설이다가 같이 가주기로 결심했다.
“그럼 오늘만 신세 질게. 계속 지내긴 너무 죄송스럽고. 딱 오늘만이다.”
“그래. 처음 들어갈 때 민망해서 그렇지 있다 보면 또 괜찮아지긴 하거든.”
“그럼 술은 그만 마시자. 취해서 들어갈 수는 없으니.”
그리고 도혁은 한수철 집에 들어가자마자 왜 이렇게까지 새어머니를 어색해했는지 알 수 있었다.
새어머니가 너무 동안이었던 것이다.
이십 대 후반 정도로밖에는 안 보이는 외모의 여자가 나와 둘을 반겨주었다.
“저 왔어요. 전화 드렸죠?”
“어머! 수철이가 정말 친구를 데려왔네. 여보, 수철이 왔어요.”
“친구 맞는데 대표님이에요. 우리 회사 사장님이요.”
“뭐? 회사? 너 취업했니?”
어이구. 아직 취업한 것조차 말씀을 안 드린 모양이다.
이게 바로 TV에서나 보던 콩가루 집안인가.
도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색하게 들어선 거실 바닥에서는 귀여운, 하아, 정말 말도 안 되게 귀여운 꼬마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인형을 만지던 손을 멈춘 아이가 도혁과 한수철을 올려다보았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천사처럼 반짝거렸다.
“어! 수철이 오빠! 오빠야~.”
생각보다 정확한 발음의 사투리로 ‘오빠야’라고 하며 꼬마가 일어났다.
그러더니 아장아장 걸어와 둘을 번갈아 보았다.
‘아, 몰랐는데 나 아기 좋아했네.’
도혁은 순진무구하게 두리번거리는 아이를 바라보며 심장이 찌릿거리는 걸 느꼈다.
전생에는 아이가 없었다. 정확히는 아이에 관해 상처가 있었다.
전처가 임신을 한번 했는데 유산됐었다. 아이는 다시 가지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뒤로 아기 천사는 와주지 않았고 우주가 많이 힘들어했다.
그러다 결국 이혼까지 이르렀었다.
유산이 이혼의 기폭제가 됐다고나 할까.
그 뒤로는 조금 의식적으로 아이를 피해왔다.
남의 집 아이도 보기 싫고 조카한테도 관심 없었고.
도혁은 천천히 아이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눈을 맞추었다.
“이름이 뭐야?”
“한수아예요.”
“예쁜 이름이네. 수아. 아저씨는 명도혁이라고 해.”
“엥? 오빠 친구 아니야? 왜 아저씨라고 해요?”
아차. 그렇지. 아직은 꼬맹이한테 오빠라고 불릴 만한가?
도혁이 꼬마 숙녀에게 악수를 내밀자 고사리 같은 손이 척 손가락을 붙잡는다.
아, 귀여워. 미치겠네.
“친구, 명도혁이라고 했던가.”
“네. 반갑습니다. 아버님. 수철이 친구입니다.”
“친구이자 상사예요. 아버지. 저 여기 도혁이 회사에 들어갔어요.”
그렇게 한수철의 가족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저녁이라 차로 준비했어요.”
“번거롭게 죄송합니다. 오늘만 신세 질게요.”
“별말씀을요.”
선한 인상의 동안인 한수철의 새어머니가 차를 내어주었다.
한수아는 낯을 가리지 않는 성격인 듯했다.
한수철과 도혁의 사이에 앉아 사투리로 쫑알거리기 시작했다.
“여기 오빠야 잘생깄다.”
“수아야, 수철 오빠가 멋있어, 여기 오빠가 멋있어?”
“수철이 오빠야가 백배는 더 멋있지!”
수아는 누가 더 멋있냐는 말에 1초의 고민도 없이 수철을 고르며 순진무구하게 웃었다.
아, 정말 이 꼬마가 아저씨 심장을 강타하는구나.
“나 빨리 결혼해서 빨리 수아 같은 딸 낳아야겠다.”
진심 딸 하나 낳고 싶다고 생각하며 수아의 앞 머리카락을 헝클어주었다. 순진무구한 눈이 초승달처럼 예쁘게 휘어졌다.
콩가루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화목한, 온기가 가득한 한수철네 집안이었다.
훈훈하게 부산의 첫날밤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 * *
일찌감치 호텔로 자리를 옮긴 도혁과 한수철이 회의를 시작했다.
D-50.
도혁이 빈 종이 위에 남은 날짜를 써넣었다.
“프로모션 집행일 5일 정도를 빼면 50일밖에 안 남았어. 이렇게 급한 의뢰는 처음이지만 한번 해보자고.”
“그럽시다. 사장님. 자, 방긋토이 최 대표님을 모델로 쓸 생각이지?”
“그렇지. 안녹산급 뱃살을 찾기가 쉽지 않잖아? 특히 크리스마스 시즌에 말이지.”
“평생 장난감을 만들어오셔서 그런지 나도 첫눈에 산타클로스 생각이 나더라고. 인상 참 좋으셔, 그치?”
“맞아. 산타가 있으니까 루돌프를 모집해 보자.”
“루돌프라고?”
한수철이 루돌프라는 말에 제 코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되물었다.
“내가 아는 그 코 빨간 루돌프 말이지? 어떻게 모집하자는 거야?”
“수철아. 내가 방긋토이 어린이날 프로모션으로 생각해 둔 게 있는데 말이야. 그걸 크리스마스를 맞이해서 부산에서만 작게 한번 진행해 보려고 해. 조금 변형해서.”
“그래? 어떻게?”
“산타의 썰매를 애견이 끄는 건 어때? 그 애견은 선발 대회를 열고 말이야.”
“애견 선발 대회라고?”
강아지와 아이들. 이 떼려야 뗄 수 없는 아이템을 한번 붙여보려고.
둘 다 어떤 타깃에도 거부감 없이 호감 있게 접근이 가능하니까.
한수철이 빠르게 메모를 적어 내려가며 덧붙였다.
“모집 공고 빨리 내야겠는데? 루돌프가 되어줄 애견 선발 대회. 부산 경남 한정으로 진행한다는 거지?”
“맞아. 12월 초에 애견을 선발할 거야. 그리고 홈페이지나 우편을 통해서 지원한 어린이에게 루돌프와 함께 산타가 찾아가서 선물을 전하는 거지. 크리스마스이브의 밤에 말이지.”
“우리 최 대표님 성탄절에 고생 좀 하시겠네.”
한수철이 웃으며 매체 계획을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
“TV 라디오는 심의 일정 때문에 힘들 거고 지역 신문, 포스터, 온라인 광고, 보도 자료 정도로 빠르게 마무리해야 할 거 같아.”
“애견 프로모션 진행할 만한 곳 대관도 알아보고. 사무실에 연락해서 바로 시안 뽑으라고 해야지. 크리스마스, 애견, 장난감. 키워드만 던져줘도 알아서 할 거야.”
“그렇지. 내가 바로 연락할게.”
“그리고 수철아.”
도혁이 한수철을 부르며 테이블을 손가락을 툭툭 두드렸다.
“이번 프로모션은 사후 처리가 중요해. 광고 나가고 난 뒤에 말이야.”
“애견 선발자, 선물 받은 아이 가족의 후기 같은 거 말이지?”
“응. 당연히 신문이나 온라인 보도 자료도 나가야겠지만 왜, 어린이 잡지, 여성지에서 취재하는 거 있잖아.”
“아, 요즘 그런 잡지가 제법 많더라고.”
“그런 쪽에 기사가 잘 나가야 할 거야. 그런 점에서 사전 광고도 넣자. 패키지로 들어가는 거 있을 거야.”
“오케이. 현우 선배한테 바로 컨택 넣고 진행해 보자고.”
모든 것이 5월에 메인 광고를 이어가기 위한 큰 그림이었다.
도혁은 부산 경남이라는 작은 시험대에 오른 프로모션을 생각하며 커피를 들이켰다.
손발이 맞는 한수철이 빠르게 사무실로 전화를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불과 저녁이 채 되기 전 초안이 도착했다.
“최민아 미쳤네. 손만 빠른 게 아니라 우후, 봤어?”
“어. 완벽한데? 여긴 좀 태오 선배가 손본 거 같지?”
“맞아. 태오 선배는 이상하게 손끝만 대도 표시가 나.”
번개처럼 도착한 시안은 거의 완벽한 수준이었다.
늘 그렇듯 A, B안 중 고르기 힘들 정도의 퀄리티를 감상하며 둘이 혀를 내둘렀다.
“최민아는 진짜 있잖아. 나 같은 사장 만난 거 천운인 줄 알아야 돼.”
“우리 명 대표님 왜 이러시나. 최민아가 잘하는 걸로도 생색을 다 내시네.”
“독한 사장 만났어 봐. 가둬놓고 군만두 먹이면서 시안만 뽑으라고 했을걸?”
“생각만 해도 소름 돋는데? 으…….”
실제로 조덕현 본부장 놈은 최민아 뼈가 삭을 때까지 피를 빨아먹었었지. 단물만 쏙 빼먹히고 승진도 못 하고.
최민아, 명도혁한테 감사해라?
한수철의 말대로 최민아가 잘하는 걸 도혁이 속으로 생색내며 초안을 들었다.
“바로 방긋토이 들어가자. 부산 사나이들은 바로바로 한다면서.”
“그러취이. 우리 도혁이 부산 사나이 다 됐네.”
“바로 오케이 받아 옵시다.”
하루 만에 어느덧 부산 사나이가 되어버린 도혁이 한수철과 함께 일어섰다.
초겨울의 초저녁 달이 어슴푸레 떠오르고 밤바다로 방긋이 번져갔다.
둘은 빠르게 방긋토이로 향해갔다.
파스텔의 성, 방긋토이가 동화 속에서처럼 방긋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