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100화
“병맛이라는 말 듣자마자 갑자기 흥미가 생겨 버렸거든요. 그 CF 같이 할 수 있을까요?”
도혁은 조금 고민하다 완곡하게 거절했다.
“배우 개런티가 지금도 높은 편이라서요. 말씀은 정말 감사하지만 서윤 씨 수준으로 맞춰 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것 좀 아쉬운데. 흠, 카메오 형식이면 어때요? 개런티는 뭐, 너무 신경 쓰지 마시구요.”
“네?”
“아까 얼핏 들었는데 콘티가 재밌더라구요. 사극 컨셉이라고 태오 씨가 흉내 내는데 어찌나 웃기던지. 뭔가 대박의 기운을 팍 느꼈다구요.”
누구보다 흥행에 관한 감이 좋은 전서윤이었다.
그녀가 대박의 기운을 느꼈다니 왠지 기분이 좋아졌지만 곤란하긴 매한가지였다.
“이 CF, 전서윤 배우님 분위기와는 안 어울리는데요.”
“에이, 그럴수록 더 재밌는 거죠.”
“흠. 그렇기는 하지만. 미안해서 그렇죠.”
너무 병맛이거든.
전서윤이 나와준다면야 더 바랄 게 없을 정도로 좋은 캐스팅이다. 병맛 컨셉에 청순한 여배우가 카메오로 나와준다면 금상첨화겠지.
더구나 전서윤은 소주 광고 이후로 충무로와 CF계에서 동시에 주가를 올리고 있었다.
“카메오니까 지나가는 행인 1 이런 거 시켜주셔도 돼요.”
“그럼 염치 불고하고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염치는요. 제가 먼저 말씀드린 건데. 저는 도혁 씨랑 계속 함께 가고 싶어요. 배우로서 광고 회사 대표랑 친해지고 싶은 건 당연한 거 아닐까요?”
진심으로 고마운 인연이 아닐 수 없었다.
도혁은 태강애드도 아니고 막 시작하는 소규모 광고대행사를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는 것에 예를 다해 감사를 표했다.
“제가 복이 많은 사람인가 봅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에이, 또 애늙은이처럼 말한다. 가만 보면 나보다 어린데 40대 같아요.”
“아, 그런가요.”
“도혁 씨한테 누나 소리 한번 들어보고 죽으려나.”
장난처럼 누나라고 한번 불러봐 주고 싶었는데.
40대 감성으로 그게 참 어려웠다.
도혁이 씁쓸한 미소를 삼키며 전서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멀리서 누나 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여기 있었네.”
“어, 수현아. 왜?”
“사람들 다 모여서 기다리고 있어. 누나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생일 케이크 불기도 전에 취했어?”
“샴페인을 너무 마셨나 봐. 게임 얘기하는 사람들은 좀 정리됐어?”
“내가 그만하라고 그랬지. 참. 그 게임 광고 나도 카메오로 나가도 되죠? 강태오 씨가 즉석에서 카메오 엄청 섭외했어요,”
사람을 끌어모으는 강태오의 매력이 연예계에도 통했나 보다.
아니나 다를까 파티를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들 한가운데서 강태오가 계속 섭외 중이었다.
“자세한 컨셉은 대외비지만 무조건 재밌어요. 이거 CF만으로 뜰 겁니다. 대박 난다니까요!”
“에이, 진짜로? 저기 명도혁 대표님 온다. 강태오 씨 약간 허세 있는 거 같은데 대표님 정말 그래요?”
“네. 저 역시 이번 CF 흥행,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투자사에 밀어붙이는 거겠죠?”
강태오와 눈짓을 주고받으며 다섯 명이 넘는 카메오 섭외를 마쳤다.
풍성해진 출연진이 연기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도혁이 미소 지었다.
‘이제 촬영만 남은 건가? 그림에 제법 괜찮겠는데?’
이미 머릿속에서는 한 편의 코믹 사극이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 * *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부러웠다.
아주 예전부터 본능적으로.
머릿속에 그려지는 걸 글로 옮기는 작가나 카피라이터와 달리 그들은 점과 선으로 장면을 구현해 낸다. 심지어 입체적으로 말이다.
그 과정이 부럽기도 하고 때때로 경이롭기도 했다.
지금 이진우를 보는 마음이 정확히 그랬다.
“진우야, 너 내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왔지?”
“오! 제법 대표님이 생각하는 그림과 비슷합니까?”
“정말 똑같아. 장면 장면 내가 생각한 그대로다. 하늘이 너를 콘티맨으로 낳은 게 분명해.”
“대표님 칭찬을 들으니 정말 힘이 납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PD의 포지션을 맡은 이진우가 콘티까지 그려내는 건 엄청난 장점이었다. 이미 수차례 공모전에서도 그 능력을 보긴 했지만, 최근 들어 더욱 무서울 정도로 그림 실력이 늘고 있었다.
“이거 미술 쪽으로 전업 작가 해도 되겠는데?”
“아, 정말 감사합니다.”
“농담이 아니라 이건 타고난 거야.”
“사실 어릴 땐 하루 종일 만화만 그리다가 혼 많이 났어요. 솔직히 전공하고 싶었는데 못 했습니다.”
“그거야, 뭐. 공부로 P대 갈 실력인데 만화과 보낼 부모님이 많지 않으시니까.”
도혁이 이진우의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숨지었다.
“그림만 하고 싶으면 나중에 말해. PD라서 콘티는 외주 줄 생각이지만 반대로 할 수도 있으니까.”
“아직은 재밌습니다. 영상도 일도 좋구요. 그리고 콘티 그리면서 느낀 건데 이번 CF 잘 나올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너무 니치(마이너 성향)하게 찍지는 말자. 병맛이되 너무 매니악하게 가면 또 안 되니까.”
“또 나왔다. 명 테일.”
곁에서 듣고 있던 차현우가 소스라치며 팔에 돋은 소름을 닦았다.
“우리 대표님께서 병맛이되 매니악하지 말고 너무 니치하게 찍지 말자신다.”
“예이!”
탁기준이 CF 중 등장하는 내시 흉내를 내며 차현우의 농담을 받았다.
“곧 촬영이구나. 다 잡아놨는데 엑슨에서 오케이 하겠지?”
“중간중간 통보하고 제안서도 통과했으니까 남은 건 확정 콘티 정도인데, 당연히 통과할 거야.”
도혁의 예상대로 아들이 그린 콘티에 크게 만족한 이우영 대표의 최종 컨펌이 떨어지고, CF 촬영이 확정되었다.
경기도 외곽의 한 세트장. DW애드 코리아의 첫 번째 CF 촬영이었다.
조선 시대 거리를 재현한 촬영장 내에서 사극 코미디 연습이 한창이었다.
“전하, 이것이 무엇이옵니까?”
“네 이노옴. 어느 안전이라고 눈을 똑바로 뜨고. 무엄하다, 네놈의 이름이 무엇이냐?”
대사를 주고받으며 연습하던 배우들의 무리에서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콘티를 다 보고 들어왔는데도 아직도 웃기네. 병맛 감성. 딱 내 스타일이란 말이지.”
“콘티 여기 피디님이 직접 그렸다던데?”
“어허, 무엄하다 내시 따위가 어디 피디님을 직접 보는가?”
“누가 피디 소리를 내었는가?”
화기애애한 촬영 현장을 바라보며 도혁이 최종 동선을 확인했다.
차현우가 다가와 속닥거렸다.
“저 배우들 강태오 씨가 섭외한 거라며. 수완도 좋아. 카메오에 개런티 지불 다 했으면 투자금 거덜 났을 듯.”
“그래도 최대한 챙겨 드렸습니다. 다음에 또 우리랑 작업해 달라고 밑밥도 좀 깔고.”
“오~ 그래. 역시. 잘했어. 그럼 우리 카메오들 시간 안 뺏도록 후다닥 시작해 봅시다.”
촬영 외주팀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슬레이트가 쳐졌다.
용중의 잔치가 있던 날. 풍악이 울리고 해초 옷을 입은 자들의 가무가 더해졌다. 부채춤을 추는 엑스트라를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용왕이 몸을 뒤틀며 하품을 했다.
바로 용왕의 역할을 맡은 정이석이었다.
“하암. 지겹구나. 이놈의 용궁 더럽게도 재미가 없단 말이지.”
“주상 전하. 다른 아이들로 들일까요.”
“에잇 만사가 귀찮구만. 뭐 신박한 거 없느냐?”
내시가 손짓으로 춤을 추던 해초들을 물리자 문어 복장을 한 여자가 칼을 물고 나와 춤을 추었다. 전서윤이었다.
“어우 징그러. 꺼져. 이 삐!!!야.”
순간 내레이션이 이어졌다.
-유흥이라는 유흥은 죄다 물리도록 한 용왕이 새 게임을 제안하는데…….
“여봐라, 무료해서 못 살겠다. 내 직접 인간 세계로 내려가 뭘 하고 노는지 보고 오겠다.”
“어, 자, 잠깐만요! 그 길은!”
그렇게 세계의 갈라진 틈으로 뛰어 내려간 용왕이 도착한 곳은…….
인간 세상이 아닌 게임 속이었다.
어느덧 게임 속 용사가 되어 갑옷을 입고 있는 용왕.
“으으엇, 이게 무어냐?”
동그란 돼지들이 통통 튀어오며 왕을 보자마자 둘러싸 다가오기 시작했다.
“무엄하다, 어느 안전이라고.”
철 갑옷을 입은 왕이 칼을 휘두르자 우수수 돼지들이 쓰러지고 돼지들이 붉은 나뭇잎으로 변해 버렸다.
“오옷, 이거 삐~ 재밌는데?”
멀리 차원의 문에서 문어와 내시가 통통거리며 떨어져선 튜브를 타고 흘러가는 시늉을 했다.
CG 처리를 할 부분이라 연기하기 어색할 텐데도 웃지도 않고 열심히 바다를 떠다니는 흉내를 냈다.
“징그럽게. 문어 너, 따라오지 말라고 했지?”
“저은하. 이 재밌는 것을 혼자 하려고 하셨사옵니까?”
“저은하!”
문어로 분한 전서윤이 집요하게 왕을 쫓아가자 덩달아 나타난 돼지들이 뒤따르기 시작했다.
“컷!”
“A편 러프 촬영 완료했습니다. 잠깐 쉬겠습니다.”
뷰파인더를 뚫어지게 보며 배우들의 연기를 분석하고 있는 도혁의 곁으로 전서윤이 다가왔다.
“아, 힘들어. 저 이상하지 않아요?”
“완전 귀엽습니다. 서윤 씨 이런 면도 있군요. 정이석 씨도 그렇고 두 분 케미가 좋은데요?”
“나 시트콤 찍어야 할까 봐. 너무 재밌는 거 있죠.”
전서윤이 문어 다리 하나를 들어 휘휘 장난을 치며 도혁의 앞에 흔들었다.
“꺼져. 삐…… 라고 하면 화내실 거죠?”
“아 정말, 다음 콘티에선 욕 안 먹는 역할이죠?”
“네. 피시방에 간 용왕 편에서는 정말 엑스트라셔서 앉아계시다가 한마디만 하시면 됩니다.”
“시끄러워! 그거요?”
큰 소리로 시끄럽다는 대사를 한번 해보던 전서윤이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내가 촬영 제일 긴 것 같아요. 이럴 줄 알고 스케줄 하루 통으로 빼고 왔다구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 이러다가 DW애드 전속되는 거 아니에요?”
“전속, 이요?
대답을 하던 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시그니처 사운드처럼 CF마다 시그니처 모델을 쓴다면?
힙합과 같은 음악에서 비트를 깔 때 시그니처 사운드를 넣는 경우가 있다.
‘그레이, JYP 같은 사운드를 깔아서 레이블을 강조하듯이 시그니처 모델로 전서윤 씨를 계속 카메오로 넣는다면?’ 문득 떠오른 아이디어였지만 서로 윈윈 할 수 있는 전략이 아닐까 싶었다.
전서윤이 막 뜨고 있었지만 아직은 신예였고, 영화 쪽으로 작품을 가려서 하는 바람에 선호도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편이었거든.
그리고 멀리서 봤던 전생의 전서윤은 성공한 월드 스타였지만 우울한 사람이었다. 나쁜 시도를 한 차례 했을 정도로.
그녀가 젊은 시절 이렇게 밝은 사람이었다니. 이 미소를 지켜주고 싶어졌다.
사심이 아닌 팬심으로 되도록 가까이에서.
도혁은 조금 용기를 내어 전서윤에게 제안했다.
“계속 저의 페르소나가 되어주실 수 있을까요. 우리 CF에 자주 출연해 주세요. 가문의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와우, 페르소나래 설레게.”
전서윤이 문어 다리를 하나 들어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도혁은 징그러운 다리 한쪽을 꽉 붙잡았다.
“다시 촬영 들어갈게요. B안 피시방 편 시작해 볼게요. 문어 빨리 오세요!”
두 번째 촬영을 위해 용왕은 벌써 세트 안 PC 앞에 앉아 있었다.
용왕은 이미 게임 속에 빠져들어 버렸다.
“오, 신제품 게임 해보나 본데. 어! 저 표정 찐이다. 일단 빨리 클로즈업 따놔!”
용궁의 촬영이 재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