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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천재 명도혁-97화 (97/252)

광고 천재 명도혁 97화

그곳은 고요했다.

타닥타닥타닥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 잔뜩 가라앉은 공기, 메케하게 실내를 메운 정체불명의 냄새. 그리고.

나지막이 울리는 한 남자의 욕설.

“X발. XXXX네.”

“실례합니다. 정이석 씨 되시죠?”

“놀래라. 당신 누구야!”

욕을 하던 남자가 고개를 돌리자 한수철이 놀라 멍청하게 서 있었다.

도혁이 남자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광고대행사 DW애드코리아의 명도혁이라고 합니다.”

“당신들 누구시죠? 여기를 어떻게 알고 온 거예요?”

“정이석 씨를 찾아서 수소문했습니다.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릴게요.”

“최 실장이 나 여기 있는 거 불었구만. 잠깐만요.”

도혁과 한수철이 온 곳은 서울 외곽의 한 피시방.

전세를 낸 듯이 혼자 피시방을 독차지한 채 게임을 하고 있던 남자는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배우 정이석이었다.

매니저에게 물을 필요도 없이 도혁은 정이석의 집 인근 피시방에서 그를 찾아냈다.

전생의 정보로 촬영 외 시간은 여기서 보내는 걸 잘 알고 있었거든.

그는 연예계에서 둘도 없는 게임 매니아였다.

“안 그래도 한 판 졌는데 잘됐네. 좀 쉬어야겠어요. 아줌마 여기, 음료 주세요. 뭐 드시겠어요?”

“아이스커피로 하시죠. 반갑습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뭘 또 영광까지.”

평소 영화를 좋아하는 한수철이 어안이 벙벙해져 정이석과 악수를 나누었다.

그가 쭉 빨대로 커피를 들이켜더니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광고회사라니, 우리 최 실장이 신나서 알려줬겠죠. 하긴, 나도 CF 몇 편 찍으면서 놀라기는 했네.”

“시간당 개런티는 쫓아올 분야가 없긴 합니다.”

“그러니까요. 그런데 두 분 상당히 젊으시네요. 동안인 건가?”

“저희 학생 사업가입니다. 이번에 론칭 후 처음으로 투자 유치도 받았구요.”

도혁이 건넨 명함을 손끝으로 두드리던 정이석이 곧바로 용건을 물어왔다.

“그래, 같이하자는 광고가 뭡니까?”

“여기서 바로 찍어도 되는 아이템입니다.”

“오~ 이 커피? 그런데 커피는 하는게 있는데요.”

“게임이요.”

정이석이 놀라며 얼음을 우드득 씹었다.

“게임이라면 언제든지 콜이죠. 이거 오랜만에 흥미가 훅 당기네.”

“엑슨에서 출시하는 신제품입니다. 상세 일정과 개런티 등은 회사를 통해 다시 컨택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정이석 씨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걸로 알고 오늘은 가볼게요. 하시던 게임, 계속하셔야죠.”

“그거 스스로한테 하는 말인가요?”

도혁과 한수철이 멀뚱멀뚱 눈을 끔뻑이자 정이석이 둘의 손에 마우스를 쥐여주었다.

“두 분 어디 가십니까? 여기까지 왔는데 한 판 하고 가셔야죠.”

“아, 제가 게임은 잘 못하는데요.”

“스타는 할 줄 알 거 아닙니까? 어떻게, 내가 종족 한번 맞춰봐 드려요? 여기 대표님은 프로토스, 이 쪽에 한수철 씨는 저그 아닌가요?”

“어! 어떻게 아셨어요?”

이미 이때부터 게임 달인의 경지에 올랐구만.

도혁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이석은 국내외 영화제 수상 경력만큼이나 게이머로서 유수의 대회에서 상을 탔다.

그래도 처음 보는 사람 종족까지 맞추다니.

‘내가, 프로토스처럼 생겼나?’

아무튼 둘은 CF모델이 직접 권하는 마우스를 뿌리치지 못하고 나란히 피시방에 앉았다.

“여긴 내가 운영하다시피 하는 곳이니까 편하게 해요. 오후에 손님 안 받으니까.”

“네. 그럼 오랜만에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래도 왕년에는 제법 잘했는데 말입니다.”

“왕년이라니. 대표라 그런지 젊은 분 단어 선택이 남다르시네. 그럼 시작하시죠.”

도혁이 한수철에게 눈짓으로 적당히 져주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곤 아주 크게 후회했다.

“자, 잠시만요. 어! 이게 아닌데. 아니, 초반 러시도 정도가 있지. 우리 방금 앉았잖아요.”

“어! 캐리어가 왜 벌써 나와.”

정이석은 여러 종족을 바꿔가며 현란한 플레이를 펼쳤다.

농락하다시피 둘을 가지고 놀았다. 정말, 가지고 놀았다.

열 판 정도 게임을 하고 피시방 밖으로 나온 한수철이 소리를 질렀다.

“저건 사람이 아니야.”

“게임 방송 안 보냐? 신의 컨트롤. 우리 같은 사람은 못 이기지.”

“그러니까. TV에서나 보던 컨트롤을 막 나한테 하니까 정신을 못 차리겠더라고. 미네럴 몇 개 파고 있으면 공격 와.”

“길게 가는 게 몇 배는 더 비참해. 마지막에 발릴 때는 진심 수치스럽더라.”

수치스러운 패배였지만 아무튼 둘은 메인 모델 섭외를 완료했다.

“어떤 방향으로 갈 거야? 연예계 최고의 게임 매니아니까 모델로 적절해 보이기는 한데, 얼핏 감이 안 잡혀서. 모델 전략으로 잡으려는 건가?”

“머릿속에 그림이 있기는 하지만 같이 의논해 봐야지. 정이석 배우가 이끄는 연예인 게임단 길드가 있어. 같이 출연해도 좋고.”

“오, 그거 괜찮은데?”

전혀 괜찮지 않았던 게임과 아주 괜찮은 예감이 드는 광고에 대해 얘기하는 사이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도혁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저기, 수철아. 한 게임 더 할까? 게임 괴물 빼고 우리끼리 제품 분석 차원에서 말이지.”

“올~ 나도 살짝 말할까 말까 망설였는데. 콜?”

“고고!”

론칭 제품과는 아무 상관없는 게임이 다시 시작되었다.

둘은 오랜만에 또래 대학생으로 돌아간 듯 게임방에서 날밤을 지새웠다.

짜장 라면도 먹고 소리도 지르고 아무 생각 없이 신나게.

말끔하게 머리를 비우고 즐기기엔 게임만 한 것이 없다는 진리를 다시 깨달은 두 친구였다.

* * *

다음 날 아침. 피시방에 죽치던 대학생에서 다시 사업가 모드로 돌아간 도혁이 출근하자마자 최민아를 찾았다.

어제 머릿속으로 그려본 장면을 플래시(애니메이션 구현 프로그램)로 구현해 보면 어떨까 생각한 것이다.

“민아 아직 출근 안 했어? 보통 제일 먼저 오지 않나?”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무실이 칙칙한가 봅니다. 창문도 아직 안 열려 있네요.”

이진우의 말에 최민아의 빈자리를 처음으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언제나 제일 일찍 출근해 사무실을 환기하고 주변을 정돈해 온 그녀였다.

게으른 남자들 사이에서 혼자 고군분투하며 깔끔한 환경을 유지해 왔다는 걸 이제야 눈치챈 둔감한 남자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최민아 출근 일찍 하지 않아? 이렇게 늦게 올 리가 없는데?”

“계속 전화도 안 받아. 민아 혼자 살잖아.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지?”

“서류에 집 주소 적혀 있을 거야. 내가 다녀올게.”

모두와 두루 친하지만 특히 강태오와 친한데, 오늘따라 강태오조차 출장을 나가 버렸다.

도혁이 직원 신상 명세를 뒤져 주소를 찾아냈다.

이럴 사람이 아닌데 연락조차 안 되니 걱정돼서 곧바로 길을 나섰다.

차를 급히 몰아 도착한 최민아의 오피스텔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민아야. 최민아, 집에 있어?”

“……누구세…… 요……. 어머!”

문 안쪽에서 도혁을 확인한 최민아가 놀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뒤 문이 열리고 그녀가 고개를 내밀었다.

이마에서 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대표님이 여기까지. 세상에 지금 몇 시예요?”

“열한 시. 연락이 너무 안 돼서 어디 아픈가 해서 와봤는데, 무슨 땀을 이렇게 흘려. 어디 아픈 거야?”

“어제 몸이 좀 으슬으슬하더니 완전 잠들어 버렸네요. 아 어떡해. 죄송해요. 바로 준비해서 나갈게요.”

“미안해할 필요는 없고 걱정돼서 와본 거야. 병원은 다녀왔어?”

고개를 가로저으며 최민아가 몸을 비틀거리자 도혁이 급히 부축했다.

“안 되겠다. 나랑 병원부터 같이 가자.”

“그래야겠어요. 잠깐 들어와서 기다릴래요?”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들어가기 조금 꺼려졌지만 금방 나올 거라는 말에 거실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실내를 둘러보며 놀라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이게, 다, 뭐야? 와.”

엄청난 양의 스케치와 그림, 해외 디자인 자료 등 집 안 가득 그림이 쌓여 있었다. 직접 그린 데생의 양도 엄청났고, 중간중간 대형 일러스트도 보였다.

“어마어마하네. 민아야. 작업을 집에서도 계속하는 거야?”

“아, 들켜서 부끄럽네. 재능이 없으니까 노력이라도 해야지.”

“재능이 없다니 그게 무슨 기만이야. 근데 정말 대단하다. 최민아.”

도혁이 한 벽면을 가득 채운 일러스트를 손으로 훑어보았다. 절반쯤 완성된 추상화는 감각적이면서도 안정적인 구도가 돋보였다.

재능에 의존하는 스타일인 줄 알았는데.

이 정도로 노력파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 같은 노력이 훗날 최민아를 최고의 경지에 올렸던 모양이다.

“이렇게 무리를 하니까 병이 나지. 얼른 병원부터 가자.”

“정말 고마워요. 가족도 없이 혼자 죽을 뻔했네.”

“죽기는 왜 죽어.”

아직도 비틀거리는 최민아를 부축해 차에 태우고 병원으로 데려갔다.

진료가 끝나고 난 후엔 조금 마음이 짠해졌다.

“우리 회사 일만 해도 업무량이 과하잖아. 포지션별로 직원이 하나뿐이라 늘 미안한데 이렇게 아프기까지 하니까 마음이 안 좋다.”

“에이, 이제 시작하니까 그렇죠. 대표님 나 아프다고 별말을 다 하네.”

“그래도.”

얼른 회사를 키워서 직원들의 짐을 덜어줘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순수한 열정을 이용해서 이익을 취하는 사장이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

“자리 조금 잡으면 사람부터 뽑아야겠다. 디자이너를 제일 먼저 뽑아줄게. 약속한다.”

“오우, 수철 오빠 들으면 화내겠는데?”

“영업은 내가 더 하면 돼.”

“주사 맞으니까 좀 살 것 같네. 태워다 줘서 고마워요! 죽도 잘 먹을게. 우리 사장님 최고!”

조금 밝아진 모습을 보고 안심해 돌아서 나왔다.

최민아를 집 앞에 데려다주고 오피스텔 주차장에서 차 문을 열던 순간이었다.

“이게 누구야, 명도혁 대표 아닙니까!”

“어! 시장님이시네요. 그간 잘 지내셨지요?”

인천시장이었다. 뜻밖의 장소에서 특히 뜻밖의 시간에 만난 반가운 얼굴이었다.

동이 틀 무렵 조찬 모임에서 꾸준히 만나왔거든.

“그럼요. 그럼요. 아, 이쪽은 부산 사는 사촌 동생입니다. 인근에 잠깐 왔다가 여기 막 차를 태우려던 참인데 명 대표님을 만났네요.”

“반갑습니다. 명도혁이라고 합니다.”

“네. 부산에서 조그만 장난감 공장 하고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방긋 토이 대표 최인수.

동심과 함께합니다.]

주고받은 명함 속 장난감 회사의 이름이 익숙했다. 귀여운 로고가 반가워 도혁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인상이 좋은 분이네요. 젊으신데 대표라니 대단하십니다.”

“아니에요. 혹시 두 분 식사 전이시면 점심을 같이하시면 어떨까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요.”

“그럴까요? 안그래도 막, 광고 얘기를 나누면서 명대표님 생각을 얼핏 하고 있었거든요.”

“광고 얘기요?”

이렇게 만나다니 세상이 정말 좁고도 가깝구나. 도혁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우리 방긋 토이, 캠페인 크게 벌이실 때가 되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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