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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천재 명도혁-94화 (94/252)

광고 천재 명도혁 94화

‘여기서 왜 네가 나오냐? 어이가 없네.’

최철우가 조덕현의 곁으로 히죽히죽 웃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덕현 아저씨 저 왔습니다. 어! 명도혁 선배님! 여기 어쩐 일이세요?”

도혁이 묻고 싶은 말이다. 최철우가 어째서 벌써 조덕현 따까리가 됐냐?

조금 젊어지긴 했지만 덩치가 큰 조덕현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던 최철우의 모습이 생각나 저절로 입꼬리가 비틀렸다.

“어! 둘이 아는 사인가? 아, 철우랑 명도혁이 선후배인 모양이구만.”

“네, 뭐. 우리 PT 왔다. 철우 너는 조덕현 본부장님 도와드리나 보지?”

“네. 아버지 친구분이세요. S대 라인이시잖아요. 아버지도 그렇고 거기 태강애드 김철준 사장님도 S대시구요.”

S대 출신 탁기준이 비릿하게 슬쩍 모습이 보였다.

S대 그까짓 거 뭐라고 열심히도 강조하네, 뭐 그런 표정?

조덕현이 최철우의 어깨를 두드리며 기특해했다.

“이번에 명도혁이 빠져나가는 바람에 난감했는데 철우가 많이 도와줘서 이까지 올 수 있었지.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야.”

“별말씀을요. 저야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요.”

역시 손발이 잘 맞는 환상의 커플이 아닐 수 없었다.

도혁이 대충 인사하고 돌아서려는데 조덕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듣고 싶지 않았지만 워낙 큰 소리로 떠들어대서 안 들을 수가 없었다.

도혁이 회사를 차렸네, 배신했네, 경험 없이 독립했다간 쫄딱 망하네. 온갖 소리가 들려왔다.

탁기준이 귀를 틀어막으며 엘리베이터에 올라갔다.

“조 본부장 시끄러워서 집중이 안 되네. 곧 발표해야 하는데, 짜증이 솟구쳐 오른다 정말.”

“힘내시길 바랍니다. 액땜했다 생각하세요. 짜증은 승리의 부적 아닙니까. 파이팅!”

보기 싫은 얼굴을 둘이나 봤으나 액땜했다 여기기로 했다.

대회의실에 도착하자 사성전자 홍보팀 직원이 그들을 안내했다.

“DW애드 코리아에서 오셨죠? 이쪽으로 오세요.”

“혹시 오늘 4팀 모두 참가합니까?”

“아니요. 한 팀은 오지 않으셨어요.”

한혁기획에서는 오늘 발표를 포기했단다.

역시 대형 대행사가 맡기엔 계륵 같은 프로모션 광고라고 여긴 모양이었다.

“자, 경쟁자 하나 떨어져 나갔으니까 좀 더 힘을 내 볼까?”

“난 우리가 될 거라고 봐요.”

“당연히 그래야지. 참, 이번에 차현우 씨 다시 봤다. 명 대표가 삼고초려해서 데려왔다고 했잖아. 그래서 기대하긴 했는데, 와우.”

“계속 놀라게 될 거예요. 탁기준 팀장님. 너무 부담 가지지는 마시고 평소처럼 하시면 돼요. 충분하니까.”

도혁은 대기석에 앉아 회의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지난번에 미팅했던 사성전자 홍보팀 직원과 팀장이 보였고 가운데 자리에 앉은 사람이 임원인 듯했다.

‘사성전자 일을 따기가 쉽진 않을 거야. 일단 조그만 일이라도 선을 트는 게 중요하니까 부딪혀 봐야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사성그룹 내에는 단단한 혈연관계로 맺어진 끈끈한 유대가 있었다.

이걸 뚫고 첫 번째 성공을 거두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도혁이 자리를 고쳐 앉았다.

자리가 정돈되고 사회자가 앞으로 나섰다.

언제봐도 적응이 안 되는 긴장된 순간. 물론 오늘따라 더 부담이 밀려들고 있었다.

탁기준 선배에게는 부담 가지지 말라고 했지만 첫 전쟁에서부터 지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도혁은 자세를 바로잡고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사회자가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장내를 정돈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사회를 맡은 사성전자 홍보팀장입니다. 반갑습니다.”

로해 그룹과는 또 느낌이 다른 딱딱한 분위기였다.

조금 더 정형화되고 관공서에 가까운 느낌이라고 할까.

아이템도 제과보다 딱딱한 전자 제품군이었고. 그러다 보니 훨씬 건조하고 긴장된 분위기가 배가되었다.

간단히 임원 소개를 마치고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PT가 시작되었다.

“We can do it!(우리는 할 수 있다!)”

사회자인 홍보팀장이 큰 소리로 슬로건을 외쳤다.

“여러분은 모두 이 문구를 기억하실 겁니다. 사성전자가 최초의 네니폰을 만들 때 기판에 새겼던 한마디 말입니다.”

결의에 찬 사회자의 음성에 순간 주변이 숙연해졌다.

“그 뒤 불량품은 암이라는 기치 아래 불량품을 모두 회수해 태우는 사태까지 있었죠. 우리 네니폰은 이 같은 필사의 각오로 달려와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회장님께서 얼마나 이 핸드폰 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지 모르는 분은 없으실 겁니다.”

도혁은 홍보팀장의 말에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2000년대 초반부터 2020년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많이 팔리고 브랜드 파워를 가졌던 제품은 바로 네니콜, 우주폰까지 이어지는 핸드폰이었다.

회귀 전엔 무려 코카콜라보다 브랜드 파워에서 앞선다는 평가를 들었던 바로 그 사성전자의 핸드폰.

그렇게 세계 시장에서 자리 잡기까지 회장의 의지와 직원들의 뼈를 깎는 노력이 따랐음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사회자가 비장한 표정으로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하지만 우리 사성의 입지를 끊임없이 위협하는 제품들이 속속 출시되고 있습니다. 이에 이번 론칭 제품에 사활을 걸고 다시 뛰어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프로모션만을 위한 PT를 여는 것이 그 방증이 될 수 있겠습니다.”

주변을 한번 둘러본 사회자가 순서를 발표했다.

“오늘 참가하신 기업에서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기를 바라며 가나다순으로 사성기획, 태강애드, 그리고 DW애드 코리아 순으로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알파벳을 뒤로 빼는 바람에 마지막 순번이 되었다.

도혁은 묵묵히 사성기획의 발표부터 지켜보았다.

사성기획 발표자가 앞으로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사성기획입니다. 저희 광고주께서 이번에 심경의 변화가 있으셨는지 프로모션 부문을 따로 준비하라고 하셔서 저희가 성심을 다해 준비해 보았습니다.”

말속에 뼈가 담긴 오프닝이었다.

간단히 줄이자면 ‘굳이 왜 이런 일을 벌였니?’라고 광고주에게 물어보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걸 들은 사성전자 임원의 굳은 얼굴에 짧은 당혹감이 번져갔다.

도발적인 도입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발표가 이어졌다.

“저희 사성기획에서는 이번 네니콜 신제품 론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제안하는 바입니다. 일단 경쟁사의 코를 초반에 누를 수 있는 강력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대매스미디어 광고를 쏟아부을 생각입니다.”

대매스미디어 광고를 강조하는 사성기획 담당의 표정이 비장했다.

“저희 사성은 언제나 새로운 시도를 해왔습니다. 시장에 새로운 도전장을 던져온 거죠. 32메가 내장메모리 폰에 이어 이번엔 무려 20장의 사진을 저장할 수 있는 기능과 안테나를 내장한 컬러폰이 등장할 예정입니다.”

아, 웃으면 안 되는데.

도혁은 볼펜으로 허벅지를 꾹꾹 누르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32메가, 심지어 사진 스무 장 저장 기능 실화냐.

웃음이 새어 나오면서도 한편 놀랍기도 했다.

불과 십수 년 만에 화면까지 접히는 디스플레이와 수백 기가급의 저장 메모리, 그리고 눈알이 여러 개 달린 카메라가 내장된 핸드폰으로 기술이 진화하니까 말이다.

‘다른 산업에 비해서 모바일 부문은 실로 엄청난 속도로 발전했구나.’

다른 가전이나 가구, 패션 등은 트렌드가 변화한 정도였지만 정말 격세지감을 한 번에 느낄 수 있는 제품군이었다.

아무튼 도혁만 겨우 웃음을 삼킨 채 아주 진지한 분위기로 발표가 이어졌다.

“더는 쫓아올 수 없다는 메가톤급 매머드의 이미지를 시장에 각인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2등, 3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로지 1등. 1등만이 기억되는 광고를 만들 것입니다. 화면을 봐주시길 바랍니다.”

이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여자 가수의 이미지가 크게 떠올랐다.

스포츠지 1면을 거의 매일 장식할 만큼 메가 히트를 기록하고 있던 스타 중의 스타.

“이번 론칭의 모든 것은 그녀와 함께합니다. 최고의 스타, 최고의 히트, 그리고 최고의 핸드폰으로 소비자의 머릿속에 오래 각인될 것입니다.”

가수의 실물과 똑같은 사이즈의 배너와 포스터, 그리고 콘서트에 함께 들어가는 협찬까지. 완전히 도배를 한 프로모션이었다.

‘나쁘지 않은데?’

특별한 개성은 없지만 나름대로 괜찮은 스타일의 프로모션.

도혁은 제법 그럴듯한 기획이라고 생각했다. 광고주들의 반응도 괜찮았고.

가운데 자리에 앉아 있던 임원이 마이크를 잡았다.

“사성기획답게 화끈하네요. 우리 스타일이네.”

농담처럼 던진 말에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게 변했다. 발표자와 나름대로 친분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다만 돈이 좀 든다, 그렇죠?”

“지난 시즌보다는 좀 더 쓰셔야 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저 가수 이미지 관리 잘해야겠는데요. 몰빵하는 게 좀 위험하더라고.”

정확한 지적이었다.

도혁의 기억으론 지금 모델로 나선 가수가 크게 물의를 일으킨 적은 없었지만, 간혹 모델 전략을 쓰다가 한 방에 가버리는 경우를 자주 봐왔다.

연예계란 사건 사고가 잦은 곳이니까. 오죽하면 광고주를 안심시키기 위한 가짜 X파일 같은 것까지 이 업계에 돌았겠는가.

“일단 잘 봤습니다. 다음 팀 발표 보도록 하죠.”

곧바로 조덕현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의 거대한 덩치를 본 사회자가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려 농담을 건넸다.

“여기야말로 매머드 느낌입니다?”

“그렇죠? 대한민국 전자업체의 거인 사성전자와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원시인같이 거대한 덩치의 조덕현이 농담을 받아치며 앞으로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태강애드 조덕현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간단히 제 소개를 올리겠습니다. S대를 졸업하고 영국에서 수학하며…….”

저런 미친.

PT 자리에서까지 깨알같이 자기 자랑을 빼놓지 않는 모습에 최철우까지 당황하고 있었다.

아무튼 낯부끄러운 자화자찬이 끝나고 본격적인 발표가 시작되었다.

“우리 태강애드에서는 철저한 제품의 SWOT(스와트 분석, 제품의 강점, 약점 등을 나누어 분석하는 기법)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기획을 구성하였습니다.”

화면에 복잡한 개념을 다양하게도 풀어놓은 기획안이 펼쳐졌다.

‘조덕현답네. 쉬운 일 복잡하게 말하는 재주 하나는 끝내주지.’

머리 좋은 건 인정. 사실 마케팅 전문가로서도 뭐라고 말하는지 모를 만큼 복잡한 개념을 매트릭스처럼 풀어놓는 것에 집중은 되지 않았다.

세 줄 요약이 필요한 상황.

임원들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주저리주저리 말하던 조덕현이 화면을 전환했다.

“자, 그럼 여기서 긴 이론은 접고 저희의 핵심 전략을 오픈하겠습니다.”

[Wag the dog]

도혁이 마지막에 흘린 웨그 더 도그 전략을 차용한 모양이었다.

탁기준은 이게 무슨 일이냐는 듯 눈이 휘둥그레져 도혁을 바라보았지만 도혁이 미소로 안심시켰다.

차라리 잘됐다. 이렇게 나올 줄 알고 태강에 있을 때 힌트를 툭 던져줬던 거였거든.

‘이래야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지. 이거 우리 발표가 더 잘 먹혀들겠는데?’

발표를 이어가는 조덕현의 뒤로 배경처럼 최철우가 겹쳐 보였다.

도혁은 둘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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