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92화
아침형 인간들은 도무지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들인가.
새벽같이 일어나서도 언제나 파이팅이 넘치는 무서운 사람들이다.
도혁은 한수철과 함께 이른바 아침형 인간의 전형 인천시장을 만나기 위해 새벽같이 길을 나섰다.
역시나 조찬 회동. 만나자마자 인천시장이 책을 한 권 꺼내 들었다.
[황혼보다 새벽으로.
미라클한 아침이 인생을 바꿉니다.
인천시장 최대현.]
도혁은 자꾸만 삐져나오는 하품을 억지로 누르며 물끄러미 책을 바라보았다.
인천시장은 첫 페이지를 열어 슥슥 사인까지 해주며 책을 건네주었다.
“최근에 출간한 따끈따끈한 제 첫 에세이집이에요. 멀리 오셨는데, 기념으로 한 권씩 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도혁은 정치인 후원금 조로 책값이라도 줘야 하나, 잠깐 망설였다.
후원금 받기가 힘들어진 정치인들이 자서전과 같은 도서를 찍어서 후원금을 모으곤 했다. 회귀 전엔 카드기까지 동원한다고 뉴스 보도도 크게 났었다.
하지만 정치 후원금이 직접 막힌 시대는 아닌 만큼 일단 책부터 받기로 했다.
보아하니 자서전이 아닌 에세이 형태였고 무엇보다 인천시장은 아침형 인간 양성에 진심이었으니까.
“최 시장님께서는 기상 시간에 대해 나름대로 철학이 확고하신 것 같습니다.”
“네. 맞아요. 일단 일찍 일어나 보시면 무조건 그 효과를 실감할 수 있다니까요? 제가 평생 지인들에게 설파하고 다녔는데 아무도 실천을 안 해요. 하아. 진심으로 통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어요.”
책이 나온 김에 실컷 아침형 인간에 대해 설파를 계속했다.
그리고 드디어 인천시장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거의 아침 식사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전에 잠깐 언급했었는데 선거 광고 관련해서 젊은 피가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시장님. 안 그래도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최근에 시장님 말씀처럼 젊은 피만 모아서 회사를 하나 오픈했습니다.”
도혁이 DW애드 코리아의 명함을 내밀자 인천시장의 눈이 커졌다.
“제가 진짜 얼리버드 앞에서 주름을 잡았군요! 여기 누구보다 빠른 얼리버드가 있었어요. 아직 학생인 걸로 알고 있는데 벌써 자기 사업을 시작하시다니!”
“광고대행사는 큰 자본을 필요로 하는 사업은 아니다 보니 또래에 비해 빨리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음 맞는 젊은 사람들끼리 재밌게 한번 달려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요. 한 번뿐인 인생, 제대로 즐기면서 일하자는 것이 저의 모토입니다.”
“명도혁 씨, 아니, 이제 대표님이라고 불러야겠군요. 명 대표님은 얼굴은 어린데 경험이 아주 많은 느낌이에요. 전혀 젊은 사람 같지가 않아요.”
“제가 어릴 때부터 애늙은이 소리 많이 들었습니다.”
역시 속에 구렁이가 몇 마리는 들어찬 정치인 앞에서 정신 연령은 속일 수가 없나 보다.
도혁 역시 대화가 40대 지인끼리 말하는 것 같다고 느끼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말인데 싱싱한 젊은 패기와 이상하게 경륜이 더불어 돋보이는 우리 명 대표님께 저희 선거 캠프 홍보 전반을 맡기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저희로서는 당연히 큰 광고를 수주하는 일이기에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브로슈어, 포스터, 디자인, 선거 송까지 일괄 프로모션을 진행한다면 좋겠지요.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흠, 어떤 점입니까?”
“시장님. 순수하게 업무만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업무만 달라는 말에 시장의 입가에 맺혔던 미소가 걷혔다.
“둘러 말하지 않겠습니다. 저희 DW애드 코리아는 선거 광고를 진행하는 데 있어서 편향된 정치색을 띠지 않으려 합니다. 개인적으로 지지하는 정당이 있지만 그와 상관없이 일만 수주하겠다는 뜻입니다.”
“오호, 어느 당이든 상관없이 광고만 하겠다?”
“돈만 되면 뭐든 다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사업하는 사람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헛된 일인지 알기 때문에 선택한 고육책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큰 기업도 휘청이는데 작은 곳은 말할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도혁의 말에 인천시장은 조금 찌푸렸지만 이내 본래의 온화한 얼굴빛으로 돌아왔다.
“어떤 뜻인지 이해는 되네요.”
“이제 막 시작하는 회사입니다. 작은 조직이지만 직원들을 책임지고 있는 사장의 노파심이라고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조금 아쉽지만 일만 제대로 해준다면야 상관없지요.”
“대신 인천광역시만큼은 시장님 정당과 일하겠습니다. 이건 최소한의 상도의니까 지키겠습니다.”
인천시장이 신기하다는 듯 도혁을 보며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두드렸다.
“참 볼수록 곁에 두고 싶은 인재인데 아깝네요. 솔직히 말하자면 캠프 홍보팀에 넣으려고 했거든요.”
“그러신 것 같아서 미리 선수 친 겁니다.”
“이런. 내가 이놈의 책 얘기에 빠져서 정작 중요한 일의 선수를 뺏겨 버린 거네요. 하하.”
껄껄 웃어젖히던 시장이 책을 펼쳐 들었다.
“자, 이렇게 합시다. 내 지지하는 정당과 상관없이 일을 맡기도록 하죠. 당선하면 당연히 시정사업도 함께 진행할 거고.”
“정말 감사합니다. 시장님.”
“다만 저 역시 조건이 하나 있는데.”
솔직히 도혁은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라고 각오하고 있었다.
이제 시작하는 작은 기업이고 난 경쟁 정당과도 일할 수 있다고 선언한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그래도 정치색을 띠는 것보다는 차라리 안 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서 거절을 각오하고 한 말인데, 인천시장이 뜻밖의 조건을 내걸었다.
“아침형 인간을 한번 실천해 보시죠.”
“네? 저는 철저한 야행성입니다. 시장님께서 생각하시는 것 이상으로 말입니다. 광고하는 사람들 백이면 백 밤에 업무를…….”
“그러니까요. 그 어려운 걸 성공하면 믿을 만한 거니까, 제가 당선과 동시에 시정사업 홍보 맡길 수 있는 거겠죠. 참, 내년 지방선거에 참가하는 우리 당 사람들 소개도 해드리지요.”
“아. 정말 감사합니다. 시장님!”
한수철이 나서서 꾸벅 인사했다.
도혁의 고통과 상관없이 넙죽 감사하다고 말하는 한수철을 보고 시장이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여기 한수철 책임님도 함께하시면 좋겠군요. 전 세계가 미라클한 아침을 맞을 때까지. 저의 아침형 인간 전도는 계속됩니다. 하하하하하.”
최 시장의 호방한 웃음소리가 쩌렁쩌렁 새벽의 연회장에 울렸다.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인가 보다.
그렇게 도혁과 수철은 정치색을 버리고 미라클 모닝을 얻었다.
아침형 인간에 진심인 빅 클라이언트 인천시장과 함께 일하기 위해서.
* * *
아침형 인간 프로젝트의 인증이 시작되었다.
인천시장의 에세이에는 놀랍게도 하루 실천 워크북까지 들어 있었다.
일찍 일어난 날 색칠을 하도록 되어 있는 워크북에 붉은 항칠을 하며 한수철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막 출근한 최민아가 그걸 보고 소스라쳤다.
“어머, 이게 뭐야. 수철 책임님 미쳤어요?”
“미친 게 아니라 미쳐가고 있어.”
“세상에. 이 동그라미는 무슨 표식 같은 거니? 한 명 죽이면 색칠하는 거야?”
흉측하고 불길하기 짝이 없는 명채도의 빨강을 보고 최민아가 디자이너로서 기겁을 했다.
“아우, 정 빨강 너무 싫다, 정말. R(RGB, 빨강, 초록, 파랑의 조합. R은 빨강을 나타낸다.) 100%야?”
“디자이너한텐 미안한데 당분간은 좀 참아줘야겠다. 내가 잠을 못 자서 죽을 판이거든.”
“인천시장한테 그냥 여당 광고만 한다고 그래. 이러다가 사람 잡겠네.”
도혁이 다크서클을 턱까지 내린 채 회사로 들어왔다.
“괜찮아. 수철아, 우린 할 수 있어. 이제 습관이 잡혀가고 있다고.”
“대표님 꼴은 수철 책임님보다 훨씬 심하거든요?”
최민아가 들이미는 거울을 보자 웬 수척한 남자가 애처롭게 마주 보고 있었다.
“다크서클이 깊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척 말이 많구나. 아, 씨. 다들 회의나 합시다.”
“으이구. 알겠어요. 모두 모이세요.”
탁기준이 도혁과 한수철의 꼴을 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침형 인간 이틀 차에 벌써 둘 다 지쳤구만. 자. 두 분 컨디션은 알아서 챙기시고, 내가 어제 놀라운 걸 알아 왔어. 어우, 이거 알아낸다고 술을 얼마나 마셔댔는지.”
“오! 뭔데요. 선배 이거 마시고 빨리 썰 좀 풀어봐요.”
도혁이 마시려고 탄 커피를 탁기준에게 내밀며 대답을 재촉했다.
“사성 대표 둘이 사이가 아주 오묘하대. 사성전자 대표가 사촌 동생을 좀 하대하나 봐.”
“오호! 그래요? 최근에 재계약도 했던데요.”
“겉으로 보기엔 그럭저럭 괜찮지만 약간 벼르는 사이? 그 텐션 느껴지냐? 알겠어?”
“모르겠습니다만?”
이진우가 눈을 멀뚱멀뚱 뜨자 탁기준이 어깨를 툭 두드렸다.
“우리 PD님께서는 모르셔도 됩니다. 일 가져오면 그림이나 예쁘게 만들어주세요.”
“넵! 알겠습니다!”
큰 소리로 대답하는 이진우에게서 시선을 거둔 탁기준이 말을 이어갔다.
“이런 사정을 아는 마당에 굳이 사성애드 끼고 들어갈 필요가 있나 싶은데, 명 대표님 생각은 어때?”
“저도 선배님 생각과 같아요. 한 다리 걸치면 수수료 떼이는 판이니까. 그리고 수주하더라도 우리 역시 외주를 줘야 하는 상황이잖아요. 프로모션을 우리끼리 못하니까.”
“TJ프로덕션이랑 진행할 거지?”
“네. 미리 말해뒀어요. 여기 일 잘하잖아요.”
그 말에 탁기준의 눈살이 가늘어졌다.
“어! 대표님이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TJ프로덕션이랑 태강애드 협력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잘한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흠. 우리 명 대표님은 하여튼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제가 잠을 못 자서 헛소리가 나와요. 이렇게 모닝 인증을 50일 동안 해야 합니다. 50일간 연속으로 했던 일은 습관으로 굳어진다던데요.”
회귀의 말실수를 미라클 모닝의 후유증으로 무마했다.
탁기준이 길게 숨을 뱉었다.
“아이고. 정치 광고 한번 따기 힘드네. 전에 슬로건 만들어준 걸론 신뢰가 부족한가? 하긴, 스케일이 좀 커야지. 인천시장 선거 캠프 홍보에, 당선 시 시정사업, 게다가 정계 베프들도 소개해 준다고 했다면서.”
“네. 아침형 인간은 믿을 만하다고 여러 번 강조하더라구요.”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열심히 합시다! 두 분 파이팅!”
마지못해 주먹을 쥐고 파이팅을 외치며 도혁이 회의를 이어갔다.
“그럼 사성 애드 없이 우리가 직접 PT 들어가는 걸로 하고, 방향성을 좀 잡아볼까?”
“그때 조덕현 본부장이랑 얘기할 때는 슬쩍 운만 띄웠잖아. 그치?”
“맞아. Wag the Dog.(개의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현상. 주객이 전도되어 실제 제품보다 덤으로 주는 제품의 매력에 의해 매출이 일어나는 현상) 힌트만 줬지. 듣자마자 눈이 번뜩이던데. 아마 덤 마케팅(덤으로 상품을 더 주는 방식의 마케팅) 쪽으로 신나게 파고 있을 거야.”
“그럼 우린 덤 마케팅이 아니라는 거야? 나도 그 당시 회의 때 그렇게 받아들였었거든.”
한수철의 말에 도혁이 고개를 흔들며 노트북을 열었다.
“본 제품이 바로 덤이 되는 거야. 주객(主客)전도라기보다 주주(主主) 전도?”
“와씨, 이건 또 무슨 신박한 개념이냐.”
모두의 시선이 도혁에게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