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84화
하품이 나오기 시작할 때쯤 조덕현이 도혁을 지목했다.
“사성전자 캠페인 어떻게 하면 따 올 수 있을 것 같냐?”
“솔직하게 가감 없이, 아무거나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럼. 어차피 아이데이션 단계잖아. 스케일 크게 뻗어갈 거니까. 나 믿고 한번 풀어봐.”
얼른 썰을 풀어보라고 재촉하는 조덕현을 믿는 건 절대 아니었다.
성과가 조금이라도 난다면 자기 공으로 돌려 버릴 위인이니까.
다만 과거와의 차이가 있다면 지금은 신입에 불과했지만 김철준 대표가 명도혁의 존재와 가치를 훨씬 더 잘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김철준 대표는 툭, 튀는 아이디어가 나온 걸 보면 도혁과 신입팀의 머리에서 나왔을 거라고 암묵적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감추고 가로채려 해도 아이디어에는 결이라는 게 있거든.
도혁은 속으로 조소하며 생각나는 대로 자유롭게 이야기를 풀어갔다.
“사성전자는 가전도 좋지만 모바일 쪽으로 주력해서 캠페인을 펼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물론 두 사업부 쪽 전부 제안해도 좋구요.”
“그래. 계속해 봐. 빨리!”
“모바일은 프로모션을 강화하는 방향을 생각 중이고 가전은 묶어서 진행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만.”
“프로모션?”
“모바일은 가장 개인적인 가전입니다. 내면의 심리를 이용해 마케팅을 전개하자는 거죠. 일반 가전제품은 전통의 강자 신혼 가구를 내세우는 편이 가장 안전할 것 같습니다. 어차피 사야 할 물건, 실용적으로 사자는 메시지를 전하면 어떨까 합니다.”
조덕현이 고개를 기울이며 앞으로 더 다가왔다.
너무 가까이 있기 싫어진 도혁이 그를 피하며 노트북을 꺼내 왔다.
“일단은 시작 단계이니 시장조사부터 해보겠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 머릿속에 대한민국 최고의 가전은 사성전자가 아닙니다.”
“시장 1위는 아니지.”
“그리고 태강애드가 그 시장 1위 가전 회사와 함께 일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경쟁업체랑 태강이 이미 함께 일하고 있다는 걸 강조하며 도혁이 본부장의 이 시도가 부질없음을 다시 강조했다.
어쨌든 똑똑한 사람이니 도혁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은 것 같은데, 조덕현은 애써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대행사야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거고 계열사에서 광고하는 광고주를 생으로 뺏어 오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다니까? 아주 맛있어. 끝내준다고.”
“…….”
“여기 한수철은 어떻게 생각해?”
“저는…… 아직 일을 잘 몰라서요.”
“내가 확실하게 가르쳐 주지. 지금까지 태강애드는 신입들한테 이런 것도 안 가르치고 뭐 했어?”
한수철이야 상도의에 어긋나는 변태 같은 말이라고 생각했겠지.
도혁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조덕현이 하는 꼴을 지켜보았다.
“선의의 도둑이라고 생각하고 확 물어 와버리자고. 방심하고 있는 틈에 다 가져와 버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모바일 사업부 쪽으로 치중해서 진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나머지 가전은 제안 형식으로만 들어가구요.”
“이거 자기주장이 확실한 친구구만. 야! 명도혁.”
제 말에 반기를 들자 조덕현이 얼굴을 찌푸리며 노려보았다.
“네.”
“밑의 직원들은 시키는 대로 구르면서 하면 되는 거야. 알겠어? 어디 바락바락 대들고 말이지. 나 때는 말이야…….”
꼰대가 말하는 라떼의 유구한 역사를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도혁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료를 찾아보고 있었다.
대한민국 모바일의 중심이자 전설이 될 사성전자. 스마트폰의 전성기가 시작되면서 사과폰과 더불어 세계의 핸드폰 시장 점유율 1위를 달성하는 기염을 토한다.
‘모바일부터 잡아야지, 물론 큰 덩어리 말고 잘게 쪼개서.’
도혁은 조덕현의 허황된 목표를 쪼개고 조합해서 나름대로의 목표를 설정했다. 조덕현이 묵묵히 생각에 잠긴 도혁을 자꾸만 쪼아대었다.
“명도혁, 계속 말을 해보라니까?”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백색 가전 쪽은 태강애드가 경쟁사와 함께 일하고 있기에 적극적으로 진행하기 좀 모호하구요. 모바일 주력 프로모션을 진행했으면 하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어허, 더 구체적으로 말해봐.”
도혁은 한숨을 내쉬며 힌트만 주기로 했다.
“본부장님 Wag the dog 전략이라고 알고 계시죠? 그걸 활용해 볼까 합니다.”
조덕현의 눈이 커졌다.
‘대충 말해줄 테니까 열심히 판 좀 깔아봐. 춤은 나중에 내가 출 거니까.’
도혁은 속으로 웃으며 말을 삼켰다.
* * *
느지막한 오후, 이진태의 호출에 애드포인트 멤버가 교수실로 향했다.
노크를 하기 직전, 도혁과 수철이 머리를 긁적이며 망설였다.
강태오가 의아해하며 둘을 바라보았다.
“왜, 너네 학과장님한테 무슨 실수 했냐? 왜 안 들어가고 서 있어.”
“그게 중간고사 끝나도록 강의를 제대로 안 들었어요. 교수님이 봐주신다고는 했지만 아무래도 죄송하죠.”
“이런. 근데 오늘은 그것 때문에 부르신 거 같진 않은데? 나랑 진우도 같이 호출하신 거 보면 뭔가 따로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아.”
“그렇겠죠?”
애드포인트 팀을 모두 부른 것으로 보아 결석을 지적할 것 같진 않았지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강태오가 걱정 말라며 문을 열었다.
학과장실에서는 뜻밖의 인물이 이진태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어! 전서윤 씨!”
“반가워요! 도혁 씨 정말 오랜만이다. 그쵸?”
“그러네요. 기획사 분들은 잘 지내시죠? 대표님도 안녕하시구요.”
“그럼요. 이쪽으로 오세요.”
이진태가 차를 권하며 도혁을 보고 말했다.
“우리 서윤 씨가 오랜만에 찾아왔는데 명도혁 씨 얘기를 하더라고. 얘기하다 보니까 애드포인트 멤버들과 안면이 있다고 해서 차라도 함께할까 해서 불렀지.”
“그러셨군요. 두 분은 원래 친분이 있으신가 봅니다.”
“그럼. 서윤이 내가 키웠잖아. 안 그런가?”
“그렇죠. 처음 데뷔시킨 분이 학과장님이시잖아요. 어찌나 막무가내시던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해요.”
“강남역 지나가는데 교복 입은 여학생 하나가 눈에 확 들어오잖아. 왜, 그런 느낌 알아? 주변 배경이 다 사라지고 인물 하나만 남는 느낌 있잖아.”
여고생이던 전서윤을 잡지 모델로 데뷔시킨 게 이진태란다.
CF 촬영은 그때도 고사해서 당시 진행하던 지면 광고 메인으로 사진만 찍었다고.
“안 그래도 십 대 때부터 콧대 높았던 전서윤이 소주 모델을 다 한다고 해서 명도혁, 한수철 참 대단하다 생각하고 있었어.”
“그러셨군요. 아무튼 반갑습니다.”
“근처 촬영 끝나고 교수님도 뵙고 애드포인트 분들한테 술이나 사려고 왔어요. 그때 술 약속했던 것 기억해요?”
“어! 정말 배우님께서 사주시는 겁니까?”
이진우가 너무 큰 소리로 기뻐해 모두 웃음이 터졌다.
전서윤이 이진태도 함께 오라고 초대했지만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치 없이 아저씨가 왜 거길 따라가. 젊은 사람들끼리 놀라고.”
“에이, 우리 학과장님 정신연령은 이십 대시잖아요.”
“욕이냐?”
“완전 칭찬이죠. 그러지 말고 같이 가셔요.”
“아니야. 서윤이가 산다고 하는데 오늘은 내가 낼게. 이렇게 젊은 친구들이 모여 있으니까 안 먹어도 배가 부르구만.”
“제가 사려고 여기까지 왔는데요.”
“그냥 써. 내가 사회적 지위도 높고 돈도 많잖아?”
지갑에서 돈뭉치를 꺼내 한수철에게 쥐여주었다.
한수철이 애써 고사했지만 결국 주머니에 넣어준 이진태가 손짓으로 모두를 내쫓았다.
“얼른들 나가봐. 나도 논문 정리도 해야 하고 바빠. 워이.”
“알겠습니다. 학과장님은 따로 한번 모실게요.”
“그래. 맛있는 거 많이 먹고 내 욕은 적당히 해라.”
돈을 떠나서 누구와 달리 참, 어른다운 어른이다.
저렇게 늙어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도혁은 고개 숙여 정중하게 인사했다.
“애드포인트 멤버들 밥 한번 사기 되게 힘들다. 에휴, 뭘 또 돈을 주셔.”
“그러게요. 서윤 씨 뭐 먹고 싶어요? 진우는?”
“전서윤 배우님 드시고 싶은 걸로 꼭 먹고 싶습니다!”
“난 무조건 고기요. 전부터 느꼈는데 진우 씨 되게 귀여우시다.”
“아, 아닙니다. 배우님!”
“편하게 말해요. 서윤 누나.”
“그래도 됩니까? 정말입니까? 서윤 누…… 나. 와!”
“아, 귀여워. 도혁 씨 이분 왜 이렇게 귀여워요?”
딱히 이진우가 귀엽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지만 둘이 좋다면 그걸로 됐다.
도혁은 얼굴이 알려진 전서윤을 배려해 방이 있는 고깃집으로 일행을 데려갔다.
좋은 사람들과 편안한 자리는 언제나 즐겁다. 이 맛에 일하지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을 때도 많았다.
씹을 놈이 있을 때는 더욱 그랬다.
“우리 회사에 미친 인간이 들어와서 요즘 아주 죽을 맛입니다.”
“연예계에도 그런 사람들 많아요. 피디들. 작가들. 사이코들!”
“서윤 씨네 회사에는 그런 사람 없잖아요. 경수현 배우도 착하고.”
“그렇죠. 이런 곳이 거의 없다니까요. 대표님 깐깐한 거 빼면 뭐, 베스트.”
“거긴 대표님이 좀 그러시군요.”
“시아버지예요. 시아버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전서윤이 술을 따랐다. 그러곤 뜻밖의 말을 했다.
“오늘 제가 사려고 했는데 이진태 교수님이 선수 치셔서 제가 따로 초대를 할까 해요. 곧 생일이거든요.”
“오! 축하드립니다.”
“제가 시끄러운 성격이 아니라서 간단하게 친한 사람들이랑만 할 거예요. 요트 하나 빌릴까 하는데.”
“오! 요트! 지금 연예인들이 하는 요트 파티에 초대한 건가요!”
한수철이 놀라며 묻자 전서윤이 끄덕였다.
“그러니까 네 분 꼭 오셔야 해요!”
“그럼요. 수업이든 일정이든 다 째고 가겠습니다!”
뭐든 째버리겠다는 이진우가 귀엽다며 또 전서윤이 웃음을 터뜨렸다.
좋은 분위기 속에서 잠깐 전화벨이 울리고 그녀가 매니저와 통화하기 시작했다.
도혁은 무심코 전서윤의 핸드폰을 바라보다 놀라고 말았다.
핸드폰을 휘감은 장식이 너무 화려했던 것이다.
전화를 끊은 전서윤에게 도혁이 농담처럼 물었다.
“핸드폰에 다이아몬드라도 붙이신 겁니까?”
“이거, 명품이랑 콜라보한 거잖아요. 요즘 제 애장품 1호예요.”
“그래요?”
“보여 드릴까요?”
무수히 박혀 있는 큐빅 사이로 보이는 브랜드 로고.
그걸 손끝으로 가리키며 전서윤이 슬쩍 귀띔해 주었다.
“이거 브랜드 따라서 박힌 건 진짜 다이아몬드예요.”
“와우, 가격이 제법 나가겠는데요?”
“돈 있어도 못하는 물건이에요. 한정판이거든요.”
소탈한 편인 줄 알았는데 역시 연예인 중에서 소탈한 성격인 거였다.
도혁은 신기한 듯 핸드폰을 힐끗 바라보다가 퍼뜩 무언가 생각났다.
“전서윤 씨 핸드폰을 아주 사랑하시는군요.”
“제 모바일 사랑이 느껴지시나 보네요. 맞아요. 완전 사랑해. 최근에 이 아이로 바꿨는데 손에 착 감기는 게 내 몸 같은 거 있죠?”
“몸 같다고요? 그 정도입니까?”
“네. 남자들 처음 차 살 때 그런 생각 한다면서요. 백미러가 본인 귀 같아서 스치기만 해도 내 귓불이 아프다던데요?”
“몸 같다라…….”
도혁의 뇌리에 무언가 스쳐 갔다.
요트 위를 둥둥 떠다니듯 생각의 파편들이 머릿속을 떠다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