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82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 학기였다.
벚꽃이 피는지 지는지, 해가 떴는지 비가 오는지 모를 정도로 엄청난 양의 일이 쏟아졌다.
내년 지자체 선거 전에 어떻게서든 슬로건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포에버 팀은 진행할 수 있는 정도의 숫자로 최대한 큰 건만 수주를 받았다.
그래도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다행인 건 태강애드 쪽 일이 조금 할 만해졌다는 거였다.
학기 중이라 일을 덜 주기도 했지만, 드디어 기획국을 벗어나 제작국으로 이동한 것이다.
매일같이 회의에 참석하고 아이디어를 짜냈던 기획국보다는 훨씬 편안했다.
감사하게도 거의 잡일만 시켰거든.
제작국장 성민욱이 첫날 신입팀을 불러 저녁을 사주었다. 간단하게 먹을 줄 알았더니 고급 일식집에서 정식과 사케를 시켰다.
성민욱이 한 명 한 명에게 술을 따라주며 신입팀을 격려했다.
“우리 신입팀이 태강애드에서 지금까지 얼마나 활약했는지 잘 알고 있어. 기획국에서 칭찬이 자자하더구만.”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빈말이 아니라 기획국에서 당장 일해도 좋을 만큼 성과를 냈다고 입에 침이 마르지를 않더라니까. 근데 말이지.”
성민욱이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제작일은 조금 결이 달라. 신입이 당장 할 수 있는 게 많지는 않거든.”
“네. 알고 있습니다.”
“카피라이터나 디자이너나 내가 데리고 있지만, 자존심들이 워낙 쎄야말이지.”
“네.”
“아마 신입한테 덥석 통째로 일을 맡기지는 않을 거야. 누끼 따고(배경을 없애고 피사체만 남기는 작업) 자료 조사에, 복사 같은 거 할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
“괜찮습니다. 아직 신입인걸요.”
“학기 중이니까 배려한 부분도 있다고 좋게 생각해. 요즘은 대학생들도 바쁘지 않나.”
도혁과 한수철이 의미심장한 눈길로 마주 보았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성민욱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튼 서운해하지 말라고 한 말이야. 우리 신입들이 얼마나 능력자들인지는 내가 아니까. 혹시 제작국에서 박대했다고 생각하면서 기존 지망했던 분야 바꿀까 봐 노파심에서 내가 미리 손 쓰는 거야. 많이들 먹어.”
“네! 감사합니다. 국장님.”
그렇게 제작국 생활이 시작되었다.
제작국으로 배정된 첫날 출입문을 열자 피디와 카피라이터, 그리고 디자이너들이 힐끗거리며 눈인사를 건넸다.
배정된 자리에 앉아 제작국을 쭈욱 둘러본 도혁은 오랜만에 감상에 젖었다.
‘그래. 처음 제작국 자리 배치가 이렇게 되어 있었지. 카피는 카피끼리 앉고, 디자인팀은 따로였고. 업무별로 따로 파트가 있었는데. 2층으로 이사 가면서 섞어 앉았잖아. 와, 진짜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이십 년 가까이 일해왔던 태강애드 제작국이었다.
도혁은 신입 사원 때 앉았던 자리부터 직책이 올라갈 때마다 옮겼던 자리를 눈으로 훑었다.
그리고 익숙하고 반가운, 무엇보다 젊어진 동료들을 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회에 가슴이 울컥했다.
폐인같이 까치집을 짓고 세수도 못 한 낯으로 마우스부터 잡고 있는 제작국 빌런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눈 속에 담았다.
‘반갑다. 진짜로. 반갑습니다.’
홀로 인사를 건네며 서 있는데 선배 한 명이 다가왔다.
전생의 사수이자 탁기준의 그녀, 서희주 카피라이터였다.
“안녕하세요. 신입1팀이시죠? 일단 이쪽에 자리를 만들었어요. 아마 선배들이 필요하면 한 명씩 부를 거예요. 그때그때 일하면 되니까 평소에는 편하게 있어요.”
“네. 알겠습니다.”
“우리 분위기 보면 알겠지만 엄청 프리해요. 자기 일만 제대로 하면 출근을 하든 말든 아무 상관 없을 정도니까. 기획국이랑은 느낌이 많이 다르죠?”
“네. 기획국은 조금, 말해도 됩니까?”
“그럼요. 어때요? 나도 겉으로 보기만 해서 궁금하네요.”
“조금 군대 같습니다. 여기는 상상하던 광고회사의 모습이구요.”
이런 솔직한 서인기 같으니라고.
도혁은 저절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고 있었다.
서희주가 환하게, 정말 햇살처럼 웃으며 서인기를 바라보았다.
“듣기 좋은데요? 우린 군대 스타일 질색이거든요. 기획국 분위기 싫다는 소리예요.”
“와……. 저기 실례가 안 된다면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그럼요. 제작국 있는 동안은 제가 신입팀 멘토할 거예요. 뭐든지 물어보세요.”
“선배님 혹시 연예인 전력이 있으십니까? 슈퍼모델 참가자라거나.”
“연예인 출신은 아니지만 그 말은 듣기 좋은데요? 우리 신입 이름이, 서인기 씨 맞죠? 기획국에서 재밌는 걸 배워 왔네요. 아부!”
“빈말 아닌데요. 와. 이렇게 아름다운 분은 실물로 처음 뵙습니다. 실례됐다면 죄송해요, 선배님. 미모에 너무 놀라 가지고.”
서인기의 주접을 서희주가 웃으며 받아주었다. 그 넉넉한 미소를 보자 또 가슴이 뭉클해졌다.
정말 좋은 사수였는데. 하루 종일 붙어 다니면서 많이 배웠고 정말 친했다.
친누나 명현진 따위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챙겨줬기에 탁기준이랑 결혼한다고 했을 때 친동생의 마음으로 눈을 부릅떴었지.
그래서 아마 전생에 탁기준이 더 싫었었나 보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탁기준을 떠올리자마자 그가 제작국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이, 우리 신입들. 따뜻한 남쪽 나라로 옮겼구만.”
“선배님!”
“탁기준 선배님 오셨습니까!”
마치 어미 새를 본 아기 새처럼 신입들이 반갑게 탁기준을 맞았다.
“제작국 서희주 멘토님 말 잘 들어. 어려 보여도 나름 대선배님이시다.”
“넵. 알겠습니다!”
“명도혁은 제작국 보내기 좀 불안한데. 나 불안해서 온 거 알고 있냐?”
탁기준이 한쪽 눈을 가늘게 뜨고 도혁을 바라보았다.
“기껏 기획국에서 키워놨더니 또 카피만 쓴다 어쩐다 그러면서 제작국에 눌러앉으면 안 된다. 어?”
“그럼요. 은혜를 모르면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선배님.”
물론 서희주 선배의 하늘 같은 은혜를 모르면 안 된다는 뜻이었지만 그걸 알 리가 없는 탁기준은 흐뭇하게 웃었다.
“그래, 인마. 그럼 우리 도혁이 믿고 간다. 서희주 선배 힘들게 하지 말고!”
“네. 걱정 마십시오.”
“조만간 같이 맥주나 한잔하자. 너네 빠져나가니까 기획국 허전하다고 다들 난리야. AE들은 얼른 돌아와라.”
AE라고 강조하며 탁기준이 도혁의 어깨를 두드렸다.
도혁은 탁기준이 나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금방 나갈 줄 알았던 탁기준이 제작국 여기저기 인사를 하고 다니고 있었다.
“우리 신입 똘마니들 잘 부탁합니다.”
“야 인마, 네가 부탁 안 해도 알아서 잘 크는 애들이여. 탁기준. 너 어제도 밤새웠다면서.”
“일상이죠, 뭐.”
“네 걱정이나 해라. 신입들은 이제 우리 꺼다.”
“아니, 안 됩니다, 선배님! 잘 데리고 있다가 돌려주세요.”
제작국 사람들과 장난을 치고 있었지만, 신입들 잘 부탁한다고 일부러 들른 것이 분명했다.
‘탁기준 선배 볼수록 전생이랑 다르단 말이야. 저런 면도 있었네?’
무언가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며 도혁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여러모로 훈훈한 가슴으로 촉촉한 오전이 끝나고 오후부터 본격적인 일이 시작되었다.
그야말로 신입다운 일들이었다.
“명도혁 씨! 이쪽으로.”
“최민아 씨. 올~ 깔끔하게 라인 잘 따네. 뷰티컷(피사체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배경을 꾸민 사진) 요거 손 좀 봐줘요.”
“한수철 씨 보도 자료 오타 좀 봐주세요.”
그동안과 달리 뇌를 비우고 할 만한 단순 작업이 이어졌다.
제작국장의 우려와 달리 신입팀은 매우 기뻐했다.
“나 왜 이렇게 좋냐? 단순노동 좋은 거 비정상이냐?”
“아니. 나도 좋아. 하루 종일 복사만 하면 좋겠다. 사실 이게 진정한 신규의 자질 아닌가?”
“와! 제작국 선배님들 사랑합니다!”
그렇게 도혁은 단순노동의 가치를 깨달으며 순한 시간을 보냈다.
물론 머릿속에서는 지자체 슬로건을 열심히 뽑아가면서 말이다.
“충주시는 사과가 유명한가? 지역 특산물로 물꼬를 터볼까?”
“여긴 삼별 전자 있지 않아? 디지털 도시라는 걸 강조하면 어때?”
일 학기 내내 지자체 홍보물 작업을 하다 보니 이제 툭 치면 슬로건이 나오는 경지에 이르렀다.
“도혁아. 어제도 밤 새웠어? 강의실에서 왜 이렇게 졸아. 너 광주시 의뢰 온 건 들었지?”
“빛고을 광주, 비엔날레로 나빌레라.”
“헐. 방금 듣자마자 카피 쓴 거냐?”
“내가 그랬어?”
“이젠 졸다가도 헛소리도 슬로건으로 하는구만.”
한수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어이없어했다.
솔직히 전생에도 이렇게 비슷한 분야의 광고를 트레이닝하듯이 계속해 본 적은 없어서 큰 경험이 되었다.
꽉 채워 들은 학점도 이제 차곡차곡 쌓여갔다.
이진태 교수의 배려로 전공을 많이 들을 수 있었고, 남은 학점은 역시 전생의 전공이었던 영어로 가득 채웠다.
“명도혁, 한수철 너네 요즘 태강애드에서 힘드냐? 왜 이렇게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왔어.”
“아, 그렇습니까 교수님?”
“그래. 내가 우리 학생들 학기 중에는 작작 괴롭히라고 김철준 대표한테 신신당부했는데, 이 사람 안 되겠구만.”
“태강애드 때문은 아닙니다. 저희가 지자체 슬로건 작업들을 많이 하고 있어서요. 공모전이요.”
“맞다. 너네가 했던 서울시! 그거 대히트했잖아. 지금 공공기관마다 난리야. 이러다가 동 단위도 슬로건 만들게 생겼다고.”
이진태가 도혁과 한수철을 번갈아 보며 흐뭇해했다.
“아직 어리지만 아무리 봐도 학교에서 썩을 그릇들은 아니야. 학점 얼른 채울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까 더 큰 무대로 나가봐. 내가 해줄 게 그것밖에 없다.”
“정말 감사합니다. 교수님.”
“학점 안 준다는 교수 있으면 일러바치고.”
어느덧 든든한 후원자가 된 이진태 교수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광고계의 레전드로 대하기 한없이 어려웠던 이진태였는데.
새삼 그와 이어진 인연에 감사하며 또 바쁜 일정을 이어갔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태강애드로 달려갔다.
“왔어요? 바쁘지. 여기 마시고 해요.”
“감사합니다. 희주 선배님.”
아이스커피를 타주며 서희주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좀 쑤시지 않았어요? 너무 단순한 일만 해서.”
“아닙니다. 선배님. 괜찮습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저 눈빛, 서희주 선배가 일줄 때 표정인데.
아니, 그래서 기분이 찜찜한 게 아니다.
그냥 예감이 좋지 않았다. 순수하게 촉이 나빴다.
도혁은 조금 미간을 찌푸린 채 커피를 들이켰다.
아니나 다를까.
누군가 제작국의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왔다. 정확히는 들이닥쳤다.
190㎝의 큰 키에 족히 0.1톤은 넘게 나가 보이는 거구에, 사자머리를 휘날리며 남자 한 명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진격하는 거인처럼.
도혁은 놀라 들고 있던 종이컵을 떨어뜨릴 뻔했다.
‘저 인간이 왜 여기서 나와. 어떻게 벌써 태강애드에 나타난 거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이 꼬여 버린 현생의 시간 속에서, 다시는 만나기 싫은 인간이 나타나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