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78화
“요일 마케팅 좋네요. 로고송이나 PPL도 좋고 다 좋은데…….”
드디어 전무의 입에서 걱정하던 말이 나왔다.
“로해 야구팀 이거 어떡할 겁니까. 하아.”
야구팀을 어떡할 거냐고 말하는 걸 보니 전무도 야구팬인 모양이었다.
도혁은 야구 말이 나왔을 때 광고주들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전무와 팀장, 그리고 여자 대리 한 명은 낭패라는 표정이었고 다른 남자 한 명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이정인이 화면에 기획안을 펼치며 설명을 시작했다.
“전무님은 오래된 로해 야구단의 팬이시죠?”
“그럼요. 우리 그룹인데 모태 로해 아닙니까. 아주 골치가 아파요, 생각 같아서는 내가 야구단 인수해서 싹 체질 개선하고 싶은 심정입니다만, 그러면 골치 정도가 아니라 온몸의 삭신이 쑤실 것 같아서 치웠습니다.”
전무의 씁쓸한 농담 위로 여럿의 냉소가 번져갔다. 역시 아무 반응이 없는 남자 대리만 멀뚱멀뚱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정인이 놓치지 않고 그 대리에게 물었다.
“대리님께서는 야구 안 좋아하시나 봅니다.”
“네. 즐겨보는 편은 아닙니다.”
“자, 그럼 이쯤에서 본론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 전에 부탁 말씀을 잠깐 드릴게요. 전무님과 팀장님, 그리고 야구를 아는 모든 분들은 제가 광고안을 보여 드릴 때 오 분만 리액션을 자제해 주실 수 있습니까?”
“아무 소리도 내지 말라는 거죠? 아니, 어떤 거길래 그러십니까?”
“네. 먼저 야구팬이 아닌 일반인의 반응을 보려는 것입니다. 오 분만 정숙하시길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
쉽지 않은 미션을 잘도 던지며 이정인이 시안을 펼쳤다.
구장의 한가운데에서 로해 야구팀 4번 타자가 홈런을 때리는 장면. 그 아래 커다랗게 쓰인 카피에 모두의 시선이 꽂혔다.
[로해 꽈배기바가 홈런처럼 통 크게 쏜다!
로해 야구단 우승 시 당일 꽈배기바 전국 무료!]
“읍!”
“아니!”
야구팬들이 조건반사적으로 소리치자 이정인이 광고주 쪽을 돌아보았다.
전무의 표정이 울그락불그락 난리도 아니었다.
“다음 시안을 보시겠습니다.”
로해 야구단의 간판스타 좌완 에이스가 공을 던지는 장면. 역시 그 아래로 말도 안 되는 카피가 적혀 있었다.
[로해 꽈배기 바가 강속구처럼 시원하게 쏜다!
로해 야구단 우승 시 일주일간 꽈배기바 전국 무료!]
“아, 정말 그만하시죠. 지금 놀리는 겁니까? 가뜩이나 회장님이 야구단 광고에 넣으라고 해서 골치가 아픕니다.”
“저도 고통스럽습니다. 이정인 팀장님!”
야구팬 광고주들이 목소리를 높여 원성을 시작했다.
오분은커녕 삼 분도 투덜거림을 참지 못했다.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이정인이 전무를 바라보았다.
“이 광고를 본 야구팬들은 정확히 전무님과 같은 기분일 거구요. 이쪽에 앉으신 최 대리님은 야구 잘 안 보시죠? 지금 이 광고 보시고 느낀 점을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뭐, 우리 로해 팀이 꼴찌기는 하지만 우승할 수도 있지 않나요? 그냥 아, 통 크게 쏘는구나 했는데요?”
“흠……. 일반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는 거군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야구팀 광고를 보던 전무가 생각에 잠긴 채 턱을 어루만졌다.
그러곤 곧바로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일반인들에게 거부감이 없는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야구팀을 활용한 광고는 야구팬들이 더 눈여겨보지 않겠습니까?”
“그 점을 노린 겁니다. 이른바 노이즈 마케팅을 하자는 겁니다.”
이정인이 화면에 한 커뮤니티의 게시판을 띄웠다.
인터넷상에서 야구팬들이 가장 많이 모인다고 알려진 사이트. 그곳에 냉소적인 내용의 게시물이 올라온 설정이었다.
제목: 너네 로해 아이스 광고는 보고 다니냐?
-로해 꽈배기바가 홈런처럼 통 크게 쏜다!
-로해 야구단 우승 시 당일 꽈배기바 전국 무료!
-로해 꽈배기바가 강속구처럼 시원하게 쏜다!
-로해 야구단 우승 시 일주일간 꽈배기바 전국 무료!
드디어 로해가 돌아버렸구나. 이 광고 소비자 권익 차원에서 막아야 하는 거 아니냐?
댓글
ㄴ 강속구에서 웃으면 되냐? 어제도 블론 시원하게 날려먹었는데.
ㄴ 와 이거 볼수록 열받네. 아오.
ㄴ 싸우지들 마삼. 우승할 수도 있지 않삼?
ㄴ 죄송한데 이 광고, 공정거래위원회에 제보 가능하겠습니까? 법에 관해 잘 아시는 분 나와주시길 바랍니다.
ㄴ 위에 삼삼 거리는 놈, 너 케지팬이지?
ㄴ 우리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하지 않겠삼?
ㄴ 삼삼 너 이 자식, 컨셉이냐? 죽는다.
ㄴ 그나저나 저거 보니까 아이스크림 먹고 싶네. 우승은 못 하니까 내돈 주고 사 먹어야지.
ㄴ 오랜만에 꽈배기바 고고. 야구는 못해도 아이스크림은 로해지.
ㄴ 아이스크림은 인정. 뭐 하나라도 잘하니까 다행이다.
화면을 본 전무의 표정에 묘한 기색이 어렸다.
“아주 사실적이네요. 야구 커뮤니티가 정말 저런 분위기잖습니까?”
“그렇습니다. 사실은 비꼬고 욕하면서도 로해 그룹으로서는 충성도 있는 고객입니다. 저들을 이용해 노이즈 마케팅으로 활용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노이즈 마케팅의 위험성은 일반인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준다는 것인데, 야구팬 아니면 저런 커뮤니티에서 회자되는지도 모를 겁니다. 관심이 별로 없거든요.”
“그건 맞아요. 저도 꼴찌라도 이번엔 좀 우승 가능성이 있나? 정도로 생각할 것 같습니다. 8팀밖에 안 되는데 1등 할 수도 있죠.”
“최 대리! 이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말이 심하잖아!”
‘8팀밖에 안 되는데’에서 다시 전무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전무가 애써 담담하게 표정을 정돈하며 말을 이었다.
“전체적으로 기획안이 상당히 마음에 듭니다. 일단 야구단 앞까지는 이대로 진행해 주세요. 야구단은 좀 제가 냉정하게 마음을 추스르고 대표님과 상의해서 통보드리겠습니다.”
“네. 쉽지 않은 결정인 것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도 로해 야구단 팬이거든요.”
이정인이 서울 출신으로 케지팬인 걸 알고 있던 도혁이 이정인을 보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약간의 하얀 거짓말이 섞였지만 훌륭한 발표였고, 광고주 역시 호평했으니까.
전무의 박수로 PT가 마무리되었다.
회의장을 나서기 전, 이정인이 도혁을 전무에게 소개해 주었다.
“이쪽은 이번 기획안을 함께 진행한 명도혁이라고 합니다. 인사드리지.”
“안녕하십니까. 명도혁입니다.”
“이은경 작가 설득한 것도 이 친구입니다. 아마 앞으로 로해에 큰 힘이 될 겁니다.”
“오~ 이정인 팀장이 이렇게까지 소개한 직원은 처음인데. 잘 부탁합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전무님.”
아니, 미래의 로해 그룹 부사장님. 잘 부탁드려요.
몇 년 뒤 로해 그룹 부사장이 될 전무와 악수를 나누며 눈도장을 찍었다.
그렇게 도혁에게 든든한 인맥이 한 명 더 추가되었다.
* * *
해가 바뀌고 태강애드의 새해 다이어리를 받았다.
이게 뭐라고 신입들이 들떠서 신이 났다.
“나 입사하면서부터 선배들 다이어리 들고 다니는 거 부러웠는데. 진짜 직장인 같고 이 회사 직원 같잖아.”
“그러니까 말입니다. 오늘 집에 가서 부모님한테 자랑해야지.”
원래는 12월에 나눠주는 건데 남아서 신입도 주는 거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도혁이 다이어리 표지를 매만졌다.
무려 이십 년 가까이 매해 받아왔던 태강애드 다이어리.
그래. 이게 뭐라고 처음 받았을 때 기분이 참 좋았더랬다. 소속감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그렇게 처음엔 모두 상기된 표정이었는데, 한 땀 한 땀 스케줄을 적어내려 가던 한수철이 한숨을 내쉬었다.
“도혁아. 우린 왜 이렇게 틈이 없냐. 우리가 연예인이야? 스케줄관리 매니저라도 있어야 할 판이야.”
“그러니까. 나도 어제 다이어리 정리하다가 기겁할 뻔. 오빠들은 애드포인트랑 태강애드 지금까지 어떻게 병행해 온 거야?”
이런, 다이어리 보고 기뻐하는 것보다 이 말이 더 햇병아리 같네.
고작 제품 두어 개에 공익광고 정도 하는 스케줄로 매니저라니.
신입이니까 이 정도이지 몇 개씩 겹치게 진행하면서 경쟁PT도 준비해야 하는 게 이 바닥이라고요.
하지만 그런 빡빡한 미래를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으니 도혁은 웃어넘겼다. 그리고 쭉 한 해의 일정을 정리해 보았다.
그러는 사이 탁기준이 빼꼼 회의실에 고개를 내밀었다.
“뭐냐. 다이어리 타임이냐? 명도혁, 한수철 너네는 잠깐 나와봐. 대한일보 기자님 오셨어.”
“아, 인터뷰! 알겠습니다. 선배님.”
온 부서를 도는 대학생 신입을 하면서 가장 좋은 점은 다방면에서 인맥이 넓어진다는 것이다.
간혹 기사형 카피를 쓰거나 보도 자료 컨펌을 부탁받을 때도 있었지만 직접 기자를 만날 일은 흔치 않았다.
도혁은 처음 만나는 대한일보 김석민 기자의 명함을 받고 인사를 나누었다.
샤프한 안경을 낀 스마트한 인상의 남자였다.
“반갑습니다. 명도혁 씨, 한수철 씨 맞으시죠? 이진태 교수님께서 아주 칭찬을 많이 하시더군요.”
“안녕하세요. 인터뷰가 이진태 교수님 추천이었군요.”
“에모라 홍보팀에서도 두 분을 추천했습니다. 그, 일레라 캠페인 그리고 공익광고 대상 수상까지 짧은 기간에 대단한 성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옥상 정원 괜찮으십니까? 마땅히 인터뷰할 장소가 없어서 이쪽으로 모셨는데.”
“네. 자연광이 오히려 사진이 잘 나오는 편이라서요. 자연스럽게 인터뷰하는 동안 우리 사진 기자가 촬영할 겁니다. 부담 가지지 마시고 카메라 보실 필요도 없어요.”
“알겠습니다.”
자연스럽게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신입사원으로서 진행한 광고들이 연타 홈런을 기록했어요. 공익광고 공모전도 그렇고. 그중에 가장 애착이 가는 광고가 있을까요?”
“일할 때는 그 당시 프로젝트에 집중하는 편입니다. 좋은 말로 열정, 좀 과하게 말하면 집착한다고나 할까요. 제가 진행한 캠페인에 대한 감정은 모두 같습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말이네요. 그런데…….”
김 기자가 고개를 기울이며 도혁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민망할 정도로.
“혹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너무 자세히 보셔서요.”
“아,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기자 생활을 좀 하다 보니 제가 사람을 예민하게 관찰하는 편인데 굉장히 묘한 상을 가지고 계시네요.”
“네? 묘한 상이요?”
“분명히 젊은 분인데 경륜이 느껴져서요. 처음 느끼는 감각이라 낯설어서 자꾸 바라봤습니다. 미안해요.”
사과를 하면서도 그는 시선을 떼지 않고 도혁을 자세히 보았다.
옥상 정원에 불어오는 겨울바람이 차가웠지만 도혁은 이마에 땀까지 송글 맺혔다.
물론 김 기자가 도혁의 회귀한 과거를 알 리가 없었지만, 막상 묘한 상이라는 말까지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다행히 구세주들이 나타났다.
주변을 시끌벅적하게 만들며 매체국 선배들이 옥상 정원으로 올라온 것이다.
“어! 김 기자님 아니세요? 앗! 명도혁 씨?”
“한수철 씨도 있네. 대한일보 인터뷰한다더니. 올~ 지금 하고 있는 중인 거?”
더불어 반가운 얼굴도 함께 보였다.
김 기자가 벌떡 일어나 그를 맞았다.
“벌써 오셨군요. 기다리면서 신입사원분들 인터뷰부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