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고 천재 명도혁-76화 (76/252)

광고 천재 명도혁 76화

“나? 소문 듣고 왔지. 좋은 거 한다면서, 서울시 홍보 광고. 만날 자기들끼리만 하지 말고 나도 좀 끼워줘.”

털썩, 자리에 합류한 여자는 최민아였다.

이진우가 놀라 눈을 끔뻑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혹시 누구신지…….”

“이분만 뉴페이스네요. 안녕하세요. 태강애드에서 신입 하고 있는 최민아예요. 디자이너구요.”

“아! 말씀 많이 들었어요. 저는 이진우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도혁이 갑자기 찾아온 최민아를 보고 어이없어했다.

“지금 밤 12시야. 오밤중에 여기까지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새해 인사 메시지 돌리고 있었는데 수철 오빠가 여기서 술 마시고 있다고 알려줬어. 명도혁 신입님은 답장도 안 하십니까?”

“문자 보냈어? 스팸인 줄 알았지.”

확인해 본 최민아의 문자는 간단했다.

[해피 뉴 이어. 어디야?]

“만날 둘이 애드포인트에서 뭔가를 만들어 오잖아. 에모라 광고 건도 그렇고 공익광고에서 대상 받은 것도 그렇고. 수철 오빠 말로는 앞으로 국내 공모전 도장 깨기 할 거던데?”

“국내라고 누가 그래? 우리 해외 공모전도 씹어 먹을 건데?”

도혁의 말에 애드포인트 팀원들조차 그를 돌아보았다.

“당연한 거 아니야? 영화감독이 부산국제영화제나 부천 판타스틱에만 출품하냐? 베니스도 가고 칸도 가는 것처럼, 우리도 클리오까지 쭉쭉 가야지.”

“내가 이래서 도혁 오빠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 있으려는 거야. 나 빼놓지 말라고 새해부터 찾아왔지. 여기가 마침 우리 집 근처기도 하고.”

“잘 왔습니다. 우리야말로 고맙죠. 좋은 디자이너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 아닙니까. 우리 학교엔 시각디자인과도 없거든요. 자, 일단 제 술부터 받으세요.”

강태오가 고무된 표정으로 최민아를 반겼다.

차례로 잔이 채워지고 새로운 멤버를 맞아 한결 분위기가 고무되었다.

도혁은 모인 팀원들을 바라보며 술잔을 기울였다.

전생대로라면 사실 절대 만날 수 없는 조합이었다.

대학 때만 애드포인트에서 활동했고, 태강애드 입사 후엔 홈커밍데이 정도 참여했으니까.

강태오 선배는 칵테일바를 운영하며 광고 바닥에서는 완전히 멀어졌다.

‘하긴, 그렇게 따지면 진우 이 자식은 지금 귀신이구나.’

도혁에 의해서 조금씩, 혹은 완전히 사람들의 운명이 달라지고 있다. 마케팅의 방향, 시장의 흐름과 속도 역시 바뀌고 있었다.

간혹 이런 사실들이 무서울 때도 있지만 넘치는 스릴에 가슴이 뛰어왔다.

결국 운명이라는 건 몇 번을 살아내든 자신의 손에 달려 있을 테니까.

“자, 민아까지 왔으니까 올해 이 멤버 그대로, 국내 공모전 싹쓸이할 거다. 오케이?”

“크으. 새해 선물로 하늘에서 디자이너를 내려주셨네요.”

“최민아 씨가 왔으니 애드포인트라고 부르긴 좀 그런데 팀 이름을 다시 짤까?”

“이 멤버 포 에버 어때?”

“콜! 좋은데?”

전생에 아재들이 술자리에서나 하던 구호였지만 지금 딱 어울리는 호칭이 아닐까 싶어 도혁이 제안했다.

최민아가 기뻐하며 빠른 손길로 폭탄주 다섯 잔을 제조해 나누어 주었다.

“이 멤버끼리 일하고 돈 벌고 죽을 때까지 함께 가면 좋겠다.”

감성에 젖은 도혁의 말에 한수철이 툭 끼어들었다.

“당연한 거 아니야? 솔직히 난 경륜만 좀 쌓이면 그냥 태강 나와서 우리끼리만 일했으면 좋겠어.”

“나도. 경륜은 뭐 도혁 오빠로 충분하지 않아? 사실 태강에서 프로젝트 맡은 거 전부 오빠가 만든 거나 마찬가지잖아.”

“그럼, 내가 나가자고 하면 다 나갈 거냐? 그래도 대기업인데.”

도혁이 슬쩍 뼈를 심어 독립하면 따라 나올 지 물어보았다.

“당연하지. 도혁 오빠 따라다니면 무조건 꽃길이라니까. 내가 전부터 느꼈다고. 안 그래요?”

“그럼그럼. 자, 모두 잔 들었으면 건배합시다.”

“이거 마시면 우리 이대로 쭉 가는 거예요. 포에버. 영원히!”

“도원결의가 아니라 폭탄주 결의구만. 좋아. 이 멤버!”

“포에버!”

짠! 부딪힌 술잔에서 풍성한 포말이 일었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새해의 시작이었다.

* * *

로해 그룹 미팅이 잡혔다.

도혁은 담당 AE인 이정인 팀장과 함께 로해 그룹 마케팅 담당을 만나기로 했다.

솔직히 대기업 광고주의 미팅까지 참여한 것은 처음이었다. 전생에 간혹 PT를 참관한 적은 있었지만 카피라이터로서 구경하는 정도였다.

조금 긴장된 기분으로 로비에 들어섰다. 로해 쪽에서 갑자기 부른 것도 마음에 걸렸고.

“이렇게 기획 진행 중에 부르면 방향이 틀어질 가능성도 있는 걸까요?”

“그럴 수도 있지. 대기업 쪽은 변덕이 심한 편이 아니라 그럴 것 같진 않은데 로해가 좀 까다로워. 깐깐하고 완벽주의라고 해야 하나?”

그 완벽주의로 야구를 좀…… 이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튀어나오는 걸 겨우 눌렀다.

안내에 따라 마케팅팀 회의실로 향하며 이정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거 명도혁 씨 빨리 대리라도 달아줘야지, 아무리 신입이라지만 명함에 직함도 없고 덜렁 이름 석 자만 있으니 대형 광고주 미팅 나올 때 곤란하구만.”

“그러게요. 월급도 적고 말입니다.”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야. 명도혁 씨가 성사한 광고 건들, 매출이 얼만데.”

그런가? 순간 잠깐 머릿속에서 계산기가 작동했지만 서둘러 물리쳐 버렸다.

그러는 사이 세 명의 담당자가 회의실로 들어왔다.

“잘 지내셨습니까? 어이구 김 팀장님은 더 얼굴이 좋아지셨습니다.”

“이정인 팀장님은 왜 이렇게 늙으셨어요. 슬프게. 요즘 태강애드가 팀장님 많이 괴롭히나 봐요. 옆에 서 계신 덜 늙은 분은 누구실까요?”

농담을 섞으며 상대를 까 내리는 말에 이건 또 무슨 빌런인가, 고개를 기울였다.

하긴 광고주 빌런이야 흔하고 흔하지.

도혁은 빌런의 공격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광고주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소개할게요. 여기 우리 태강애드 신입 명도혁 씨입니다. 일을 아주 잘하는 친구예요.”

“처음 뵙겠습니다. 태강애드 명도혁이라고 합니다.”

“네. 키가 크셔서 모델 같으시네. 이쪽으로 앉으세요.”

도혁은 앉으며 세 명의 광고주를 관찰했다. 대리 두 명은 실무자일 거고 김 팀장이라는 사람이 실질적인 기획자라는 걸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도혁은 김 팀장이라는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귀를 기울였다.

“기획 단계에서 이렇게 두 분을 모신 건 다름이 아니라 이번 마케팅에 로해 야구단을 접목한 마케팅을 하라는 지시가 있어서입니다.”

잠시만요, 광고주님. 그런 건 우승한 팀에서나 하는 거 아닙니까?

진심으로 화를 낼 뻔했다.

도혁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겨우 참고 입매를 끌어올려 영업 미소를 유지했다.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리며 내공이 소진되는 기분이었다.

“새해니까 새 마음 새 뜻으로 그룹에서 야구단을 홍보하고 싶은가 봅니다. 올해는 또 모르죠. 잘할지도.”

“그, 그렇죠.”

이정인 팀장조차 당황해 말까지 더듬었다.

진심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 일단 듣자. 들어나 보자. 뭐라고 더 말하는지.

하지만 광고주 세 명은 딱히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설마 이게 끝인가?

이정인 팀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이걸로 오늘 브리핑이 끝난 겁니까?”

“네. 로해 아이스 광고에 로해 야구를 접목한 무언가를 했으면 좋겠다는 거죠. 그리고 그건 실무선에서 제안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룹의 의지입니다.”

“알겠습니다. 야구단도 적극 협조하시는 거죠? 구장을 쓸 수 있다거나 선수들이 모델로 등장하거나 그런 것들 말입니다.”

“아마 협조는 가능할 겁니다. 긍정적인 효과가 날지는 의문이지만요.”

마지막 말에서 실무자들 역시 난감한 심경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긴 이 직원들은 로해 그룹이 아닌 로해 아이스 사람들이니까 마냥 좋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지금 명도혁처럼 말이다.

인사를 마치고 차로 돌아오자마자 이정인 팀장이 손으로 핸들을 내리쳤다.

“이건 말도 안 돼. 일등팀도 아니고 타깃이 겹치는 것도 아닌데 왜, 굳이 왜!”

“……고정하세요, 팀장님.”

“아, 내가 빨리 승진해서 로해 일부터 털어내야지. 명도혁이 네가 로해 가져가라.”

“후우. 일단 사무실로 가세요. 들어가자마자 볼게요.”

도착과 동시에 신입들과 탁기준까지 회의실로 호출당했다.

시뻘게진 이정인 팀장의 얼굴을 본 팀원들이 눈치를 보았다.

“로해 아이스 미팅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혹시 이제 와서 기획 방향 틀자고 해요?”

“그런 게 아니고 로해 야구단을 활용해서 광고할 방안을 모색하란다.”

“로해 야구단이요?”

“야구라니, 갑자기요?”

모두 놀란 눈치였지만 최민아만 평온한 기색이었다.

야구를 안 보는 모양이다.

“왜들 이렇게 놀라는 거야? 야구단까지 활용하면 너무 좋은 거 아니야?”

“뭐? 하아.”

탁기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아이스커피 속의 얼음을 와자작 씹었다.

순간 도혁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스쳐 갔다.

“민아야. 계속 말해봐. 야구단을 활용하면 좋을 것 같다고 했지?”

“맞아. 왜 놀라는지 전혀 모르겠는데? 난 되게 괜찮을 거 같은데.”

“그게 말이야. 야구단이 야구를 잘 못해요. 우승한 적도 있긴 한데 그 뒤로 쭉 나락이었어.”

“무슨 상관이에요. 아무리 못해도 스타 선수가 있을 거잖아요. 그 사람도 활용하고 새해니까 앞으로 잘하겠다고 다짐도 하고 그러면 되죠. 퍼포먼스나 이벤트할 것도 많겠는데요?”

“민아 말이 맞아.”

도혁이 최민아에게 동조하자 이정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후우, 명도혁 씨. 입은 꾹 닫고 있었지만 아까 도혁 씨도 좀 화났었잖아. 차 안에서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리던데.”

“네. 그때까지만 해도 말도 안 되는 제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역효과가 날 것 같았거든요. 하지만 우린 야구팬이라서 그런 거예요.”

“야구팬이 아니면. 아, 최민아 씨 같은 반응일 거다?”

“네. 야구단을 활용한 캠페인은 타깃을 철저하게 두 개로 나눠서 진행해야겠는데요?”

도혁이 팀원들을 둘러보며 딱 잘라 말했다.

“야구팬과 일반인으로 나누어서 두 가지 방향으로 가야겠어요.”

“캠페인의 범위가 점점 넓어지는구만. 지금까지 나온 것만 해도 작곡가가 부르는 리메이크 로고송에 PPL에 진행하기 벅찬데.”

“하긴 신입팀에서 커버하긴 너무 사이즈가 커요.”

“인력 지원은 어떻게든 해줄 테니까, 명도혁 계속 말해봐.”

이정인의 눈동자에 희망의 빛이 서렸다.

도혁은 종이를 가져와서 기획 방향을 정돈했다.

“일단 우리가 생각한 캠페인을 기본으로 가되, 야구팀 홍보를 넣어야 해. 비중은 얼마나 주면 좋을까?”

“난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고 봐. 로해 아이스 측에서도 딱히 원하지 않을걸? 그룹에서 시켜서 마지못해 하는 걸 테니까 하는 척만 하는 게 좋을 거 같아.”

“야구팬 수철이 생각은 그렇고 나도 일면 동의해. 야구팬이 아닌 민아 생각은 어때?”

“난 마케팅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진 않아. 야구 첫 경기에 아이스크림 풀고 그러면 좋지 않아? 새해 새 마음으로 야구단X아이스크림 콜라보 행사도 하고.”

“아, 싫어.”

“난 웃길 거 같아. 로해 팬 아니거든. 실컷 비웃어줘야지.”

최민아의 설명에도 역시 야구팬들의 반응은 시크했다.

잠깐 생각에 잠겼던 도혁이 펜을 들었다.

“차라리 안티로 갈까요?”

“안티? 방금 안티라고 했어? 야, 인마, 아무리 그래도 같은 로해 그룹이야. 그리고 아이스크림으로 어떻게 안티를 한다는 거야.”

“예를 들면 이런 식이지.”

도혁이 종이에 무언가를 슥슥 그리고는 툭, 말을 뱉었다.

로해 팬답게 냉소적으로.

“그냥 욕을 먹자는 거야. 노이즈 마케팅.”

“노이즈 마케팅이라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