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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천재 명도혁-75화 (75/252)

광고 천재 명도혁 75화

차마 속마음을 국장들에게 말하지 못하고 서 있는데 구세주가 나타났다.

명도혁 전생의 진짜 상사인 제작국장 성민욱이 주차를 완료하고 로비에 도착한 것이다.

“명도혁 씨는 어떻게든 제작국에 들어 앉힐 거니까 그렇게들 아십시오.”

“아니, 성 국장!”

“명도혁 씨 지원 서류 가져와 봐요? 어느 국을 희망하는지?”

설마 그것까지 확인해 본 건가? 국장이 일개 신입 지원 서류를?

도혁은 눈을 끔뻑거리며 세 국장이 투덕거리는 걸 지켜보았다.

“도혁 씨는 처음부터 카피라이터 지망이었어. 우리 제작국을 희망했다고요. 그렇지 도혁 씨?”

“네. 카피라이터 지원했습니다.”

“에이, 사람 마음이라는 게 일하다 보면 바뀌고 그러는 거지. 성 국장 그렇게 안 봤는데요, 유연한 줄 알았더니.”

“우리 국으로 걸어 들어온 인재를 뺏기게 생겼는데, 유연이고 뭐고 가만있습니까? 아무튼 다른 국장님들은 헛물 그만 켜세요. 이상.”

제작국장이 도혁에게 눈짓을 보내곤 얼른 가보라고 손짓했다.

든든한 빽을 내세운 채 도혁은 짧게 묵례하고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출장을 다녀왔으니 늦게까지 회의를 해야겠지만 발걸음은 더없이 가벼웠다.

아무튼 누군가 찾아준다는 건 기쁜 일이니까.

서둘러 뛰어간 회의실에서는 이정인 기획 팀장이 신입팀을 쪼고 있었다.

벅벅 종이에 무언가를 적으며 팀원들을 째려보던 이정인 팀장이 도혁을 보자마자 화색을 띠었다.

“명도혁 씨 왔네. 출장은 어떻게 됐어. 이은경 작가님 빡세지?”

“아닙니다. 생각보다 화끈하시던데요. 우리 쪽 의견에 공감하면서 협조하시기로 했습니다.”

“뭐? 잠깐만 이은경 작가님이 진짜 대본을 수정하기로 했다고?”

벌떡 갑자기 일어나는 바람에 의자까지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놀란 건 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와, 이거 사건 아니냐? 아무도 기대 안 했잖아.”

“도혁이 연기 잘해서 그런 거 아니야? 명도혁이 연기만 했다 하면 승률 백 프로네.”

연기 안 해도 백 프로입니다만?

내가 들어도 약간 재수 없는 말이라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진 못하고 자리에 앉았다.

한수철이 도혁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 진짜 뭐 하는 놈이냐. 요즘 명도혁 이세계에서 온 마법사 같은 느낌인 거 알아?”

“아직 로해 아이스 판만 깔고 있는데 그렇게 띄워줄 일은 아니고.”

“수철이 말이 맞지. 남편 성민욱 국장님도 작가님 한 번도 설득 못 했다고 방금 이정인 팀장님이 말씀하고 계셨거든.”

“그건 오히려 남편이니까 안 됐던 게 아닐까?”

묘하게 설득력 있는 말이라며 이정인 팀장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튼 다행이다. 솔직히 아무도 기대 안 했어. 매체국이고 기획국이고 뚫은 역사가 없어요. 나도 한 다섯 번 거절당하고 다시는 안 가잖아. 문전박대당하다시피 했었다고.”

“정말 잘됐습니다. 꼭 성사됐으면 했던 기획이었거든요.”

“말이라고. 이제 일사천리겠구만.”

만연에 미소를 띤 채 이정인 팀장이 또 무언가를 휘갈겨 쓰기 시작했다.

도혁의 곁에 앉은 한수철이 속닥거렸다.

“도혁아, 혹시 기사 봤어?”

“기사?”

“스킨엔 푸드 1차 광고만 나갔는데 반응이 난리도 아니야. 이번에도 대박인 것 같아.”

한수철이 노트북을 도혁 쪽으로 돌려 기사를 보여주었다.

[피부가 먹는 화장품. 에모라가 내세운 자연주의 컨셉, 시장에 통했나.]

[에모라 화장품 4/4분기 최고 매출 연일 갱신. 스킨엔 푸드 론칭 이후 주가 폭등.]

[국내 캠페인 성공 사례 분석 ① 태강애드 스킨엔 푸드.]

“기사 예쁘게 잘 나왔네.”

“우리 인터뷰 요청도 들어왔대. 대한일보라고 하던데?”

“대한일보?”

“속닥거리지 말고 그냥 말해. 다 들려.”

이정인 팀장이 피식거리며 도혁과 한수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도 자료 담당이 아까 다녀갔었어. 우리 명도혁 씨, 한수철 씨 대한일보에서 인터뷰 의뢰 정식으로 들어왔다고. 공익광고 대상 건도 알아보고 연락한 거라던데?”

“우리 둘만요?”

“맞아. 학교에서 먼저 진행하고 태강애드에 의뢰한 거잖아. 그러고 보니 참 잊고 있었네. 두 분 에모라 광고주님이네요. 이런 몰라뵈었습니다.”

이정인 팀장이 부러 자세까지 고쳐 앉으며 재킷 단추를 잠갔다.

도혁이 장난처럼 대꾸했다.

“대한일보에 타임지 아니면 우린 인터뷰 안 한다고 전해주세요.”

“올~ 명도혁 광고주님.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야! 명도혁. 미쳤냐? 무려 대한일보라고. 국내 판매 부수 1위!”

“한수철 진지하기는. 당연히 인터뷰해야지. 하나라도 더 홍보해야 할 판에 인터뷰 기사면 지면도 크게 차지할 거 아니야.”

“슈트 사놓은 거 유용하게 자주 입는다, 그치?”

“슈트?”

최민아가 한수철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소리쳤다.

“어머, 촬영이나 인터뷰할 때 설마 슈트 입고 다녀?”

“그럼. 공익광고 공모전 시상식 때 산 거야. 우리 애드포인트 동아리가 좀 한 인물들 하거든.”

“세상에. 내가 다 부끄럽다야 대학생들이 무슨 정장이야. 으, 아저씨 같아.”

잡담이 이어지자 이정인 팀장의 눈치가 보였다.

도혁은 마케팅 쪽으로 말을 돌렸다.

“민아 말이 맞아. 우리의 USP(Unique Selling Point)는 대학생이라는 것도 한몫하거든. 그런 점에서 꽈배기 바의 USP는 뭐라고 생각해?”

“크으. USP 나왔다.”

이정인 팀장이 신입팀을 끌어모아 회의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자, 섭외도 대충 마무리된 것 같고. 이제 퍼즐을 좀 끼워 맞춰볼까?”

“넵! 팀장님. 준비됐습니다!”

회의가 시작되었다.

* * *

오늘만큼은 쉬기로 했다.

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주말 저녁. 애드포인트 팀이 조촐하게 모여 술자리를 가졌다.

술 한잔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나 하려고 했는데.

막상 연말에 남자 넷만 모여 소주를 마시고 있으니 침침하기 그지없었다.

이진우가 주먹을 불끈거리며 투덜댔다.

“선배님들! 내년에는 꼭 솔로 탈출하고 싶습니다.”

“그래, 모두 탈출하자. 근데 수철이는 여친 있지 않아?”

“연말이라고 나 버리고 가족 여행 갔어요.”

놀랍게도 한수철은 전생의 아내 이지원이 아닌 다른 여자랑 사귀고 있었다.

다정하고 배려 있는 스타일에 나름 잘생긴 편이라 인기가 늘 많았다.

그런 한수철을 제외하곤 모두 솔로 신세라며 한숨을 내뱉었다.

강태오가 소주에 술을 따라주며 한숨지었다.

“연애도 하고, 그래야 경험이 늘어서 더 좋은 광고도 만들고 할 텐데 말이지.”

“에잇. 그냥 광고 얘기나 합시다. 서울시 공모전 사전 조사는 잘되고 있어요?”

“어. 도시 광고 좋은 거 많더라. 특히 영상미가 좋아. 유럽 쪽은 말할 것도 없고 싱가포르, 홍콩, 대만, 심지어 필리핀 쪽도 나는 마음에 들었어.”

“관광 위주의 편집일 테니까 영상이 괜찮겠죠.”

“서울도 좋은 도시이긴 한데 좀 복합적이야.”

강태오의 복합적이라는 분석에 이진우가 말을 보탰다.

“맞습니다. 솔직히 컨셉을 잡기가 모호한 구석이 있어요.”

“자연이 특출나게 멋진 것도 아니고 문화재는 도심 속에 박혀 있고, 딱 한 가지를 내세우기 힘들다는 거지?”

“네. 복합적인 느낌의 도시 광고는 좀 산만하더라구요.”

세상 좋은 거 다 모아놓은 광고. 정말 많지. 그야말로 USP가 없는 광고들.

“서울이 가진 여러 가지 매력을 산만하지 않게 보여주느냐, 그중에 한 가지 특징을 멱살 잡고 끌고 가느냐가 관건이네.”

“두 가지 컨셉으로 나누어서 벤치마킹을 다시 해보자.”

“둘 다 쉬운 길이 아니야. 특히 후자는 쉽지 않아 보이긴 해. 서울이 뚜렷한 색깔이 없어서 말이지.”

세계의 주요 도시들을 비교하며 랜드마크라고 할 만한 점이 없다는 데 주목했다.

“파리는 에펠탑, 런던은 런던 브릿지. 이런 구심점들이 있잖아.”

“척하면 척 알아보는 건물이나 자연환경 말이지?”

“맞아. 누가 봐도 한눈에 서울이구나 할 만한 구조물조차 없어.”

“그런 점에서 관광 도시들이 유리한 것 같아. 오히려 부산시 홍보가 더 쉬울 수 있어. 해운대도 있고.”

한수철이 부산을 논하자 도혁이 맞장구를 쳤다.

“오케이. 그럼 우리 한수철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여 다음에는 부산시 광고 간다.”

“뭐, 새로운 시도는 세계 어디서든지 할 수 있겠지? 이것 좀 봐봐.”

한수철이 웃으며 자료를 넘겨주었다.

역시 아무리 자료를 뜯어봐도 컨셉을 잡기 쉽지 않은 도시, 서울이었다.

도혁은 손가락으로 술잔을 툭툭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강태오가 조용히 술잔을 채워주었다.

“이번 서울시 홍보는 슬로건까지 정해야 하는 큰 공모전이야. 천천히 생각하자고.”

“맞아요. 한번 정한 슬로건은 십 년 넘게 끌고 가잖아요.”

“그래. 진우가 말한 대로 십 년 사용할 슬로건이다. 방향만 잡으면 진우랑 내가 밤을 새워서라도 제대로 된 그림 잡아낼 거야.”

“십 년 아니고 백 년 가는 광고로 만들어야죠.”

“올~ 명도혁. 야망 보소.”

“저 야망 없는데요?”

야망. 명도혁에게 그런 게 있었던가. 열정에 가깝지 않나?

내게 맞지 않은 옷이라고 느껴지는 야망이란 낯선 단어를 지우고 열정이라는 그럴싸한 말을 덮어본다.

하긴 그 말이 그 말인가?

상념에 젖은 그의 술잔에 소주를 따르며 강태오가 자조했다.

“하긴 우리도 연말 술자리에서까지 광고 얘기만 하고 있으니 도혁이랑 비슷하지 뭐.”

“에이. 그게 뭐 어때서 그러십니까? 저는 연말에 애드포인트 형들이랑 이렇게 회의하면서 술 먹는 거 좋은데요?”

“조금 전까지 여친 타령했던 이진우 어디 갔지?”

“말이 그렇다는 거죠. 침침한 건 사실이니까. 그래도 좋지 않습니까?”

“맞아. 좋은 사람들과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술도 먹고, 이 이상 바랄 게 있나?”

“도혁이 형 말이 백번 옳습니다. 자, 다들 잔 드시죠, 제가 한잔 쭉 따르겠습니다.”

“건배!”

도혁은 술잔을 기울이며 창을 보았다.

얼어붙은 길 위에 비가 촉촉이 내리고 있었다.

“겨울비 온다. 분위기 예술이네.”

“난 눈보다 비가 좋더라고. 어, 12시 다 돼간다. 아저씨! 제야의 종 소리 들어야죠. TV 좀 켜주세요.”

[댕 댕]

“이제 새해구나. 해피 뉴 이어.”

“새해 복 많이 받아요. 선배.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아.”

“올해는 더 대박 나자. 애드포인트 파이팅!”

“대상 곱하기 백 합시다!”

“수철이도 야망남으로 거듭나는 거냐?”

필승의 의지를 다지며 새해의 첫날을 소주로 함께하는 순간이었다.

이 층으로 낯익은 여자 하나가 올라와 일행을 보고 소리쳤다.

“다들 여기 있었구나!”

“어! 술 먹었더니 헛 게 보이나? 여기 태강애드 아닌데.”

“그러게. 네가 여기까지 어쩐 일이야?”

도혁과 수철이 놀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나? 소문 듣고 왔지. 좋은 거 한다면서, 서울시 홍보 광고. 만날 자기들끼리만 하지 말고 나도 좀 끼워줘.”

여자가 털썩 자리에 앉아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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