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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천재 명도혁-74화 (74/252)

광고 천재 명도혁 74화

‘다시 태어난다면 성공한 드라마 작가의 남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방송국에서 일하는 누나 명현진 덕분에 곁에서 많이 지켜봤는데, 작가들이야말로 돈 쓸 일이 별로 없다.

하루 종일 작업실에서 키보드만 두드리고 돈은 가족들이 다 쓴다고 했던가.

여기 그 상팔자라는 성공한 드라마 작가의 남편이 있다. 제작국장 성민욱 말이다.

오늘 도혁은 성민욱과 함께 이은경 작가의 작업실에 가기로 했다.

이은경과 안면을 트고 꽈배기 바 캠페인, 그리고 앞으로 계속 광고 인생에 도움을 줄 든든한 인맥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물론 이은경과 친해질 수만 있다면.

성민욱 역시 같은 생각을 했는지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떨떠름한 표정으로 도혁에게 말했다.

“내가 도혁 씨가 부탁해서 소개해 주긴 하는데, 우리 와이프 엄청 특이해. 직설적이고.”

“네. 예의 있게 행동하겠습니다.”

“예의 같은 차원이 아니고, 하여튼 보면 알아.”

‘국장님도 엄청 특이하세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겨우 속으로 삼키고 서 있는데 제작국장이 작업실 문을 두드렸다.

“초인종 누르면 싫어해. 예민하거든.”

“네. 조용히 하겠습니다.”

-똑똑

노크 소리에 부스스한 모습을 한 여자가 밖으로 나왔다.

대충 틀어 올린 머리에 찢어진 청바지 차림을 한 여자가 뿔테 안경을 한 손으로 올리며 문을 열었다.

눈앞에는 이미 로맨스의 여왕이었지만 미래에는 미스터리까지 휩쓸며 콘텐츠 시장을 씹어 먹을 이은경 작가가 서 있었다.

“나 왔어. 이쪽은 그때 말했던 우리 회사 명도혁 씨.

“작가님. 안녕하십니까? 태강애드 명도혁이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네.”

이은경 작가의 성향을 몰랐다면 기분이 상했을 정도로 뚝 끊어진 대답이었다.

이은경은 청와대에서 표창받을 때도 단답형으로 대답해서 기사까지 날 정도로 무뚝뚝했다.

얼른 본론부터 말해야겠다는 생각에 도혁은 기획안을 보여주었다.

이은경은 한 장 열어보지도 않고 인상을 찌푸렸다.

“성민욱 국장한테도 말했는데 저는 대본 수정 안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이번 작품의 여자 주인공이 혹시 방송 작가 아닌가요? 남자 주인공은 피디이고. 방송가 이야기를 다루신다고 들었습니다.”

“네.”

와, 정말 대화를 이어가기 까다로운 스타일이구나.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기획안을 들 때였다.

“엄마! 손님한테 좀 작작 하세요. 예의 없게 진짜.”

“어.”

“또 단답형 대답. 으이구 못살아.”

끼어든 여자가 도혁을 돌아보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우리 엄마가 좀, 낯을 많이 가리세요. 원래 말 엄청 많은데 처음 보는 사람한테만 저래요. 저랑 이야기하시면 어떨까요.”

“따님이시군요. 반갑습니다. 명도혁이라고 합니다.”

“성영민이에요.”

놀란 기색을 감추느라고 상당히 노력했다. 아는 얼굴이었거든.

영화감독 성영민이 성민욱 국장님 딸이었구나.

성국장이 퇴직하고 난 뒤 성영민이 유명해져서 미래에서조차 알지 못한 정보였다.

물론 베를린 영화제 황금상에 빛나는 성영민 감독은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명도혁은 성영민 감독의 골수팬이었다. 필모그래피 두 작품이 모두 그의 인생 영화일 정도로.

‘완전 예술인 집안이네. 이렇게 모이기도 힘들겠다.’

성영민 감독이 부모님의 기발한 창작 DNA를 타고난 모양이었다.

도혁은 반갑고 설레는 마음을 억누르며 그녀와 대화를 이어갔다.

“저하고 말씀 나누셔도 될 것 같아요. 제가 지금 엄마 보조 작가 신세거든요.”

“보조 작가요?”

“네. 아르바이트하고 있어요. 말씀하신 작품은 방송가 소재가 맞아요. PPL 넣으려고 하시는 거죠?”

“광고 안 한다니까요.”

다시 툭 이은경이 끼어들며 단호하게 말했다.

“5분만 설명할 시간을 주십시오. 저기, 제가 연기를 한번 해볼까요?”

“연기요? 잘생겼다고 아무나 연기할 수 있는 거 아닌데요.”

“짧게 시연만 하려구요.”

도혁이 연기까지 선보이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서자 이은경은 차마 말리지 못하고 묵묵히 지켜보았다.

“지금 우리가 대화하고 있는 상황을 그대로 대본 속에 넣을 겁니다. 성영민 감독님, 저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저 감독 아닌데요. 연출 전공이긴 하지만 아직은 보조 작가예요. 그래도 감독이라는 말 듣기 좋은데요?”

아차, 저도 모르게 성영민 뒤에 감독을 붙여 버렸다.

도혁은 어색하게 웃으며 실수를 무마했다.

“그러게요. 이름 뒤에 저도 모르게 감독이라는 말을 붙여 버렸네요. 전공이시라니 유명 감독으로 데뷔하시면 저도 아는 척해주셔야 합니다.”

“그럼요. 명도혁 씨 이름 기억하고 있을게요. 어떻게 도와드리면 돼요?”

성영민은 엄마와 달리 꽤 사교적인 성격인 듯했다.

도혁은 그녀에게 적어 온 메모를 내밀었다.

“여기, 드라마 감독 역할 해주시면 됩니다.”

“그래요. 아! 이렇게 하신다구요?”

적어온 대본을 읽은 성영민이 빵 웃음을 터뜨리자 이은경이 눈을 가늘게 뜨고 관심을 기울였다.

도혁이 연기를 시작했다.

“감독님, 이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꽈배기 바라니요. 요즘 이렇게 광고 표시 나게 대본 수정하면 시청자들도 다 압니다.”

“그러니까. 근데 광고주가 워낙 대형이라서 이거 국장님이 강하게 넣으라고 하신 거라고.”

“그렇다고 대본에 손대는 건 아니죠. 아무리 꽈배기 바가 잘나가도 작가로서 자존심이 있는데.”

“그, 그렇지? 그래도 어떻게 좀 안 될까?”

“세상에, 이거 노래까지 넣으라는 건가요? ‘괴상하게도 생겼지. 로해 꽈배기 바. 꼬이고 꼬였네~’ 이걸 우리 남자 주인공더러 지금 부르라는 겁니까?”

“무리겠지?”

“안 됩니다! 다시 국장님하고 말씀해 보세요.”

여기까지 읽은 도혁이 이은경의 눈치를 보았다.

그녀가 뿔테 안경을 올려 쓰며 도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곤 빵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작가들의 고충을 그대로 표현하라는 거네요? 대본을 통해서?”

“그렇습니다. 방송물이라서 자연스럽게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제안드린 겁니다. 그리고 현실이기도 하구요. 정말 저렇잖아요.”

“아, 웃겨. 진짜 골 때린다. 이분. 당신이 데리고 있는 친구예요?”

“내가 무슨 수가 있어도 제작에 들여다 앉힐 거야. 다른 국에 뺏기기 전에.”

“그래야겠네. 와, 진짜 웃겨요. 내가 받은 광고 제안 중에 최고입니다. 합시다.”

“네?”

“그 광고 하겠다구요. 대본 수정할게요. 현실감 넘치네. 재밌어요.”

이은경이 단박에 긍정을 표하자 가족들이 놀라 그녀를 돌아보았다.

“엄마 PPL 때문에 대본 수정하는 거 처음 봐. 와, 명도혁 씨 대단하다.”

“이참에 작가들의 현실을 알려야지. 정말 우리 저렇게 대화하거든. PPL 때문에 골치가 아픈데 이걸 또 대본에 활용하다니. 나 지금도 웃겨.”

천만다행으로 통과되었다. 그리고 괴짜 이은경이 놀라운 말을 이어갔다.

“명도혁 씨라고 했죠? 나 도혁 씨 너무 마음에 들어요. 앞으로 이런 거 있으면 같이 작업합시다.”

“그 말씀, 제가 또 광고를 가져와도 좋다는 말로 들어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나 성민욱 빼고 광고쟁이 다 싫어하는데 도혁 씨 정말 좋다. 너무 좋아.”

성민욱이 그제야 가슴을 쓸며 냉수를 들이켰다.

“이제 한숨 놓이네. 당신 낯가림 풀렸나 봐. 말도 많이 하고.”

“어. 어디서 이런 물건을 데려왔대. 혹시 여자 친구 있어요?”

“네?”

“우리 영민이 어때요? 사귀어 둘이. 잘 어울리네.”

“엄마! 도혁 씨 초면이야. 미쳤어?”

“로맨스 잠깐만. 이거 광고 회사 소재로 하나 써버릴까? 도혁 씨 보고 뭔가 떠올랐어 지금. 영민아, 노트북 가져와 봐.”

정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은경 작가였다.

그녀의 영감과 집필을 응원하며 작업실 밖으로 나왔다.

성영민이 뛰어나와 인사했다.

“엄마가 이상한 소리 해서 미안해요. 주책이야, 정말.”

“아닙니다. 성영민 씨와 만나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말씀을 되게 예쁘게 하세요. 알아요?”

“그런 말 많이 듣습니다. 카피라이터…… 지망이거든요.”

카피들이 딱히 예쁘게 말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말로 먹고사는 직업이니 그런 걸로 하자.

도혁은 정중하게 예를 갖추어 인사하며 성민욱과 함께 태강애드로 돌아가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사인이라도 받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작별의 아쉬움을 미소로 대신했다.

이은경과 성영민, 두 거장과의 든든한 만남에 안 먹어도 배가 부른 기분이었다.

회사에 도착해서는 금세 허기졌지만 말이다.

로비에서 지나가던 매체국장이 그를 큰 소리로 불러젖혔다.

“명도혁 씨! 이리 좀 와봐.”

“네. 국장님. 잘 지내셨습니까?”

“그래. 성민욱 국장한테 들었는데 이은경 작가한테 갔다고?”

“아, 말씀하셨군요. 제가 부탁드렸습니다.”

“왜 PPL 때문에 그래? 매체국 통해서 하지 그랬어.”

매체국을 통해서 할 만한 작가님이면 이정인 팀장님이 그렇게 하셨겠죠?

도혁은 진심을 말할 순 없었지만 애써 미소를 유지한 채 대답했다.

“좋아하는 작가님이라 인사드리고 싶기도 했고 슬쩍 PPL 말씀도 드려보고 싶어서 갔던 겁니다. 앞으로는 매체국 통해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에이, 내가 신입한테 뭐, 절차 따지고 그러려고 부른 건 아니고. 그래, 갔던 일은 잘됐어? 이은경 작가님이 말은 섞어주시던가?”

매체국장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커피를 들이켰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 난 모양인지 미간을 깊이 좁혔다.

광고쟁이 다 싫다고 하던 이은경이 매체국장한테 얼마나 단답형으로 대답했을지 그림이 그려져 도혁 역시 조금 눈살을 말았다.

매체국장이 떨떠름하게 입맛을 다셨다.

“도혁 씨도 문전 박대 당한 거 아니야? 그러게 매체국에서 당할 수모를 굳이 가서 당하고 그러나. 벌써 우리 매체국에 말뚝 박을 준비하는 건가?”

“아, 그런 건 아니구요.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하시더라구요.”

“그럴 리가 없는데?”

매체국장이 고개를 기울이며 도혁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매체국에 말뚝박겠냐는 말에 도혁은 난감한 기분이었지만 애써 표정을 감추고 있었다.

“자세히 좀 말해봐. 이은경 작가와 말이 잘 통하다니.”

“그게, 대본 수정이 가능한지 여부를 일단 여쭤보려고 한 거예요. 불가능하면 기획 제안조차 못 하니까요.”

“대본 수정이라고?”

“네. 전면적으로 수정이 가능한지 해서요.”

“전면 수정?”

“대본을 전면 수정한다고?”

갑자기 나타난 기획국장이 다가와 큰 소리로 물었다.

“우리 기획국 소속 명도혁 씨가 매체국에서 못한 섭외를 해 온 거 맞지,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닌 거지?”

“아니, 이 사람. 그게 무슨 말이야. 방금 명도혁 씨 얘기하는 거 못 들었어? 이은경 작가를 섭외해 왔다고. 그것도 대본을 전면 수정해서. 이건 매체국의 사건이야, 사건.”

“그러니까 정리하면 우리 기획국 사람이 매체국의 대업을 달성했다, 이거 아닌가.”

중간에 낀 도혁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죄송하지만 기획국도 매체국도 갈 생각이 없습니다. 국장님들.

차마 속마음을 국장들에게 말하지 못하고 서 있는데 구세주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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