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73화
‘여기쯤이었던 것 같은데.’
도혁이 달려간 곳은 작곡가 윤명수의 녹음실이었다.
물론 전생에 알고 있었던 정보를 활용한 것이다.
윤명수는 합정역 앞에 위치한 이 조그만 녹음실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광고 음악을 수없이 만들어냈다.
회귀 전 화려하게 북적이던 젊은 홍대, 합정의 모습과 달리 한산한 거리에 서서 도혁은 조금 망설였다.
‘급한 마음에 오기는 했는데 갑자기 들이닥치긴 그렇고, 무작정 기다려야 하나.’
순간 멀리서 기타를 메고 걸어오는 윤명수가 보였다.
긴 머리를 휘날리며 선글라스를 끼고 딱 붙는 스키니 바지를 입은 것이 그가 확실했다.
오십이 다 된 나이에 저런 모습을 한 남자는 거의 없을 테니까.
도혁은 반사적으로 남자에게 달려가 90도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윤명수 선생님!”
“어? 이 멀끔한 학생은 누구신가. 나를 아시나?”
“네. CM송 작곡가 윤명수 선생님 맞으시죠? 저는 태강애드에서 신입 하고 있는 명도혁이라고 합니다.”
“아, 광고 회사 직원이구만. 그래서 나를 아시는 모양입니다. 그래, 무슨 일로?”
“그저 멀리서 뵙고 반가운 마음에 달려와 인사드렸습니다. 존경합니다. 선생님.”
“어이구. 신입이라고 했던가. 젊은 친구라 활기가 넘치네요. 잠깐 들어와서 차라도 같이 한잔하겠습니까?”
“네? 정말 그래도 되나요?”
“그럼, 그럼. 이렇게 달려와서 나를 존경한다며 인사하는데 차 한잔 대접 못 할까. 들어와요.”
윤명수가 안으로 들어오라며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작곡보다 인성이 더 레전드로 알려진 윤명수다웠다.
녹음실에서 그는 신급으로 추앙받는 뮤지션이었지만 누구보다 겸손한 태도로 타의 귀감이 되었다. 사실 그 인성 믿고 찾아올 엄두를 냈던 거였고.
도혁은 윤명수의 안내에 따라 녹음실 안으로 들어갔다.
전생에도 소문만 들었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라 신기한 기분이었다.
녹음실은 생각보다 굉장히 아담했지만 주인을 닮아 푸근하면서도 괴짜 같은 면모가 엿보였다.
색채와 컨셉이 너무 다양했던 것이다.
“제3 세계 음악에 관심이 많으신가 봅니다. 신기한 물건들이 많네요.”
“실내가 정신없지요? 아프리카부터 남미, 아시아, 쿠바. 뭐 오대양 육대주 안 가본 곳이 없어요. 인도에서는 한 오 년 살다가 왔지요.”
“인도에서 오 년이나 사셨다구요?”
“네. 음악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내 집이니까. 차 드시죠.”
“멋지십니다. 그 음악을 기초로 해서 이렇게 멋진 CM송들이 나오는 거군요.”
“재능이 없으니 노력이라도 해야죠. 자료 조사도 하구요.”
“정말 겸손하십니다. 선생님.”
이 정도면 겸손이 아니라 기만이라고 해야 할까.
70대까지도 작곡가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며 일인자 자리를 놓지 않았던 그였다.
청년과 같은 열정으로 창작에 전념했던 그의 일생은 여러 분야의 후배들에게 큰 귀감이 되고 있었다.
그가 끓여주는 따끈한 녹차를 마시며 도혁이 슬쩍 운을 떼어보았다.
“선생님 혹시 지금까지 만드신 광고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편이 있으십니까? 저는 제과 쪽이 기억이 많이 납니다만.”
“광고 쪽 일이라면 단연 꽈배기바입니다.”
오! 이거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하겠는데?
도혁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눈을 반짝거렸다.
“그 노래 정말 중독성이 대단합니다. 그거 아십니까? 학생들끼리 우스개로 시험 칠 때 들으면 안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시험 칠 때 들으면 안 된다구요?”
“네. 선생님. 시험 치는 내내 가사가 생각나고 속으로 따라 부르게 되거든요. 주술 같은 거라도 거셨나 봐요.”
“제가 그 곡을 아프리카 케냐에서 썼거든요. 저절로 주술이라도 걸린 걸까요. 아무튼 그런 말까지 들으니 기분 좋네요. 하하.”
윤명수가 껄껄 목젖이 보이게 웃어젖히며 기뻐했다.
“아무튼 선생님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앞으로 광고 일을 하게 되면 계속 뵙게 될 거 같아요. 혹시 명함 한 장 받을 수 있을까요.”
“프리랜서라 그런 것은 없고, 연락처를 적어드릴게요.”
야심 차게 뛰어왔지만 곧바로 섭외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오늘은 연락처로 만족하기로 했다. 좋은 인상을 남긴 것도 다행이었고.
“추운데 이 차 가지고 가요. 칼바람이 매섭네. 오늘 반가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인심 좋은 윤명수가 연락처와 함께 종이컵에 우린 녹차를 더 따라 손에 쥐여주었다.
영하의 날씨의 칼바람을 녹여주는 따뜻한 차 한잔이었다.
* * *
-I’m Dreamming of white…… Christmas…….
-Silver bell, Silver bell…….
캐롤이 울려 퍼지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도혁은 오랜만에 가족들과 모여 트리를 장식하는 중이었다.
“캐롤 들으니까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확 사는데?”
“분위기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아 씨 명도혁, 이딴 거 왜 하자고 한 건데, 어? 우리가 트리 설치할 나이냐?”
“트리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이왕 할 거 투덜대지 좀 마, 명현진.”
“어, 쭈. 누님한테 또 명현진이라고. 네가 요새 덜 맞았지?”
회귀 후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였다.
저작권이 막혀 캐롤도 틀지 못하고 이혼해서 혼자 소주나 마시던 성탄의 고독이 떠올라 트리까지 만들자고 우긴 것이다.
지금은 가족이 함께이니까.
부모님도 오랜만에 한껏 고무된 모습이었다.
“그만 싸워, 현진아, 엄마도 트리 만드니까 정말 좋은걸? 너네 어릴 때 기억도 나고. 양말에 가득 과자 넣어놓으면 현진이 넌 안 먹었던 거 기억나?”
“양말 더럽다고 안 먹었죠. 기억나요. 엄마.”
“하여간 어려서부터 까다로웠지.”
“엄마, 도혁이도 만만치 않았어. 도혁이도 안 먹었잖아.”
“그랬지.”
어머니가 도혁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예수님 생일인데 왜 자기한테 선물을 주냐고 따졌잖아. 기억나, 도혁아?”
“제가 그랬어요?”
“그때가 다섯 살 때였나 그랬을걸? 네 이모가 그거 듣고 웃겨 가지고 뒤로 넘어갔었어.”
“어릴 때부터 뭐, 합리적이었네. 지금도 그 생각에 매우 동의하는 바입니다. 새 양말이 더럽다는 멍청한 명현진보단 낫잖아요.”
“명도혁 넌 도저히 안 되겠다. 이리 못 와?”
“어, 못 가. 얻어맞을 게 뻔한데 미쳤냐? 그리고 좀 있다 아침만 먹고 나가봐야 해.”
“설마 크리스마슨데 오늘도 일해?”
“누나는 안 하냐?”
“그럴 리가.”
둘은 훈제 치킨을 뜯으며 마주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 역시 한숨짓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니, 둘 다 왜 이렇게 바쁜 거야. 우리 이렇게 가족 다 모인 거 굉장히 오랜만인 건 알고들 있지?”
“내버려 둬. 젊을 때 열심히 살지, 언제 또 그러겠어. 한참 일 배우고 재밌을 때야.”
“하긴, 일하고 싶을 때 많이 해야지. 나이 들어서 관리자 되면 실무 거의 못 하잖아.”
“으…… 그거 너무 싫을 거 같아요. 나중엔 다큐 안 찍고 애들이 만들어온 거 보고 결재만 하는 거예요? 우리 국장님처럼? 아, 싫다.”
도혁은 속으로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래, 지금 초심으로 돌아가서, 정말 물리적으로 돌아와 버려서 이렇게 일이 재밌는 거구나.
사실 지금 미치게 재밌거든.
지난 생의 매너리즘 같은 거 완전히 잊어버렸을 정도로.
“신나게 일하고 싶을 때 실컷 해. 그것도 한때다. 아주 부서지게 해버려.”
“하긴. 당신 말이 맞네. 둘 다 얼른 먹고 일하러 가. 난 늙은 남편 데리고 영화나 보러 갈란다.”
메리 크리스마스, 힘냅시다, 같은 형식적인 인사 없이 투덜거리기만 하는 데도 서로 힘이 되었다. 진심 어린 격려가 느껴졌다.
든든한 가족들과 함께 따뜻한 아침을 나누며 새삼 돌아온 생에 감사했다.
그리고 두 번째 주어진 생을 신나게, 재밌게, 하고 싶은 일 다 하면서 원 없이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다지며 태강애드로 향했다.
크리스마스도 좋지만 성격 급한 이정인 팀장이 로해 아이스 광고 기획안에 대해 한 시간 간격으로 묻고 있었거든.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헐, 되는 사람만 오라고 했더니 나랑, 너뿐이냐?”
“어. 데이트 해야 한다고 다들 못 온대. 오늘 결정된 건 무조건 따르겠다나 뭐라나. 우리끼리 알아서 하래.”
회의실에는 덩그러니 명도혁과 서인기 둘뿐이었다. 솔로인 두 남자는 마주 보며 씁쓸한 미소를 나누었다.
그리고.
“나도 있어. 여러분, 나도 있다고. 메리 크리스마스.”
“네. 팀장님. 성탄절이네요.”
결국 이정인 팀장이 급한 성질을 못 참고 크리스마스에 출근해 버렸다.
졸지에 팀장님까지 끌어안고 기획 회의를 하게 생긴 기쁜 성탄이었다.
도혁은 한숨을 몰아쉬며 커피 세 잔을 타 왔다.
그렇게 크리스마스에 남자 셋이 달릴 준비를 완료하고 노트북을 열었다.
“팀장님, 말씀드린 대로 아직 큰 그림이 정확히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알지, 암. 알지. 그래도 답답한 마음에 나온 거야.”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인기와 저뿐이니까 편하게 할게요.”
“좋아. 평소 아이데이션 하듯이 진행하면 돼.”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생각하는 방향을 생각나는 대로 쭉 말씀드릴게요.”
“그래요. 카피처럼 툭툭 던져도 돼.”
도혁은 노트북 위에 윤명수의 사진을 띄웠다.
“저는 이분을 활용할까 합니다.”
“뭐? 윤명수 씨?”
‘갑자기?’라는 눈빛으로 이정인이 안경을 이마 위로 올렸다.
도혁이 연이어 꽈배기 송을 틀었다.
“괴상하게도 생겼지. 로해 꽈배기바. 꼬이고 꼬였네~”
“사과 맛, 사과의 맛.”
듣자마자 이정인도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서인기 역시 마찬가지였고.
역시 노래에 주술이라도 걸린 모양이었다.
“꽈배기바를 주력으로 밀자는 생각이 확고하구나.”
“어. 대를 이은 스테디셀러가 될 거라고 확신해. 그리고 로해 아이스 하면 이 노래가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도 사실이고.”
“그래서 재탕하자?”
이정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도혁은 이정인 팀장이 신박하고 재밌는 걸 강박적으로 선호하는 걸 알고 있었기에 약간 씁쓸했다.
“소비자들이 재탕이라고 느끼지 않게 리메이크해 보면 어떨까요?”
“재탕은 재탕이야. 리메이크가 성공한 사례가 별로 없어. 차라리 다른 상품 패러디라면 모를까.”
“캠페인을 전반적으로 뒤엎어서 리메이크하면 어떨까 하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1등 상품이 있는데 굳이 새로운 걸 내세우면서 시작하는 것보다는 포장을 더 예쁘게 해서 정상의 자리를 굳히는 전략입니다.”
“흠…….”
부담 없이 말해보라더니 한없이 부담스럽게 간섭하며 이정인이 팔짱을 꼈다.
“그 포장에 대해서 설명해 줄 수 있겠나? 구체적으로 생각한 게 있어?”
“네. 일단 복고풍으로 진행하면서 드라마 PPL 병행하는 게 어떤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드라마라. 복고풍?”
“네. 복고풍 드라마는 언제나 한두 편 방영되니까요.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PPL을 녹여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콜. 그 부분은 아주 좋아. 계속 말해봐.”
이정인이 조금 솔깃해졌는지 자세를 바로 한 채 도혁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CM송의 아버지인 윤명수 선생님이 직접 녹음하시는 방향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잘 모르겠지만 그 양반 원래 직접 녹음해. 널널하고 푸근해 보여도 엄청 완벽주의라고.”
“아, 단순히 녹음에 참여한다는 것이 아니라 직접 부르신다구요.”
“뭐?? 직접 부른다고?”
이정인이 안경을 고쳐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