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72화
‘하지만 서울시는 전국에서 가장 혁신적인 디자인을 시도하는 자치단체로 변모하게 될 거야. 내가 이번 공모전을 통해서 그 시기를 몇 년 당길 거거든.’
현재의 서울시장은 혁신적인 성향을 가진 정치인이었다. 당시 여당 인사였지만 당내에서도 젊은 개혁파에 속했고.
아마 파격안이 마음에 든다면 선뜻 손을 들어줄 수도 있는 시장이었다.
이렇게 기성 광고 회사가 아닌 대학생 공모전으로 진행하는 이유도 혁신적인 홍보안과 슬로건을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에 잠긴 채 로비에 놓인 브로슈어 하나까지 꼼꼼히 챙기며 글자체를 확인하고 있을 때였다.
아까 담당 사무관 옆에서 실무자로 소개받았던 이민현 주무관이 로비를 지나가고 있었다.
도혁은 본능적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P대 광고홍보학과 애드포인트의 명도혁이라고 합니다.”
“아. 반갑습니다. 우리 공모전 잘 부탁드립니다.”
이민현은 공손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지만 의례적인 인사를 하고 스쳐 가려고 했다.
순간 도혁이 애드포인트에 대해 적극적으로 어필하기 시작했다.
“저희는 이번 한국광고방송공사의 공익광고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서울시 홍보 영상에 대해 조금 여쭐 것이 있는데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공익광고 공모전, 그것도 대상이요?”
이민현 주무관이 도혁 쪽을 돌아보며 유심히 살폈다.
때를 놓치지 않고 간단한 질문을 시작했다.
“별다른 것을 여쭈려는 것은 아닙니다. 공정성을 기해야 하는 주무관님의 입장도 알고 있구요. 다만 결정권자분들의 평소 스타일이 어떤지 궁금해서요. 아무래도 관공서이니 보수적인 느낌으로 진행해야 하나, 대학생 공모전이니까 좀 파격적인 아이디어를 내도 되나 고민이 되어서요.”
‘결정권자분들’이라고 일부러 복수로 말한 것이다.
일단 사무관, 서기관, 국장급의 컨펌을 받아야 혁신을 추구하는 시장 손에 시안이 올라가든지 말든지 할 거 아닌가.
주무관은 신기하다는 듯 도혁을 훑어보았다.
“당차고 재밌는 학생이네요. 그런 부분이 고민될 수도 있겠어요. 흠…… 외부에서 보기에는 서울시가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번 공모전을 통해서 확실히 젊은 도시, 감각적인 서울의 이미지를 부각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특별히 일반인이 아닌 대학생 공모전으로 진행한 것이니 참신한 작품 부탁드립니다.”
역시, 짐작대로의 컨셉 방향이었다.
제 생각이 맞음을 확인한 도혁이 빠르게 한 가지 질문을 더 보탰다.
“한 가지만 더 여쭤봐도 될까요. 심사는 외부 위원이 진행한다고 했는데 이 심사 위원이 예전에 서울시에서 근무했던 공무원들이거나 비전문가는 아닌 거죠?”
“맞습니다. 아직 심사 위원단이 구성된 것은 아니지만 내부와 관련된 분들은 아니구요. 전공 교수나 광고 회사, 방송국 등에서 섭외할 겁니다. 그 부분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바쁜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저희가 질의응답 시간을 만들 걸 그랬습니다. 듣고 보니 저희가 원하는 스타일과 컨셉, 그리고 심사 위원단 구성에 대한 설명이 빠졌었네요.”
이제야 조금 가닥이 잡히는 기분이었다.
주무관이 시원시원한 모습을 보이며 기대에 찬 눈으로 도혁을 바라보았다.
“공익광고 대상 수상자라고 하시니 저희도 안심입니다. 올해는 수준 높은 작품이 나오겠어요.”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시간을 내준 그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시청을 나왔다.
애드포인트 팀은 브리핑을 들은 후 카페에 모여 함께 의견을 나누었다.
“도혁아 아까 그 주무관한테 뭐 물어봤어? 우르르 가면 부담스러우실 거 같아서 그냥 멀리서 보고만 있었어.”
“이것저것 물어봤어. 특히 광고 톤에 관해서.”
“톤? 관공서는 딱 스타일이 있지 않아?”
한수철의 말에 강태오가 크게 고개를 주억이며 동조했다.
“맞아. 으…… 난 그 배너랑 현수막 보고 눈을 의심했다니까. 나 어릴 때나 지금이나 그놈의 명조체, 고딕체.”
“선배 이런저런 디자인 폰트보다 기본 폰트가 나을 때도 많아요. 폰트 잘못 쓰면 지저분하잖아요.”
“잘 쓰면 되지! 그래, 폰트는 넘어간다 치고 그 색깔 조합들은 전부 어쩔 거야. 혹시 그 배너랑 홍보물들, 디자이너를 고문해서 만든 게 아닐까?”
강태오의 말에 모두 웃음이 터졌다.
하긴 관공서의 홍보물이 세련된 스타일로 나오던 시대는 아니었으니까.
도혁은 자세를 고쳐 앉아 주무관과 나눴던 대화의 내용을 전해주었다.
“일단 기성 대행사가 아니라 대학생 공모전을 개최한 이유는 참신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래. 그리고 심사 위원도 모두 외부 전문가나 교수들로 구성한다고 하더라고.”
“오! 그럼 우리 스타일대로 만들어도 되는 거냐?”
“제가 만화 그려도 되는 겁니까?”
“난 막, 응? 그 머리에 떠오르는 그림 그대로 레이아웃 짜도 되는 거냐?”
강태오와 이진우가 눈을 반짝거리며 다가오자 도혁이 손사래를 쳤다.
“부담스럽게 다가오지는 말고. 훠이.”
“부담스럽냐? 난 기뻐 미치겠는데? 진우야, 넌 안 그래?”
“네. 맞습니다. 선배님. 그림 그리고 싶어서 손끝이 간지럽네요!”
“아 진짜. 두 분 진정하시고. 수철아.”
눈을 부라린 도혁이 이를 악물고 한수철의 의견을 물었다.
“저쪽은 애드포인트에서도 제작자의 포지션이니까 수철이 의견이 좀 궁금해. 기획적으로 어떻게 진행하면 좋겠어?”
“솔직히 말하자면 난 저 주무관 말 안 믿어.”
“흠…….”
“윗선의 생각은 다를 거고 그 사람들 취향도 다를 거야. 우리 집 모조리 공무원이잖아. 공무원 집안. 하아.”
한수철의 짧은 한숨은 한탄이라기보다는 확신에 가까웠다.
한수철은 단호하게 딱 잘라 말했다.
“공무원 사회, 생각보다 정말 보수적이야. 그리고 기존에 해왔던 방식을 선호하지. 전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고나 할까?”
“하긴 그런 우스개도 있더라구요. 사무실에 뱀이 나오면 공무원은 잡지 않고 작년 문서를 찾아본대요. 어떻게 했는지 알아보는 거죠.”
이진우의 농담에 도혁은 씁쓸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도혁은 습관대로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치며 생각에 잠겼다. 전체적인 광고의 톤, 방향, 그리고 광고주의 성향.
“정리하면 광고주는 참신한 걸 추구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이런 말인가?”
“맞아.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기존 스타일대로 무난한 스타일을 선택할 확률이 높다고 봐.”
한수철의 말은 매우 일리가 있었다.
공무원뿐 아니라 신세대 감각을 추구한다고 말하는 기성세대 중에 정작 감각 있는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이었다.
생각을 정돈한 도혁이 애드포인트 멤버들을 둘러보며 툭, 명제를 던졌다.
“밸런스.”
“뭐?”
“이번 광고의 관건은 밸런스, 그러니까 균형을 맞추는 데 있을 것 같아.”
“균형을 맞춘다라…….”
“흔히 말하는 관공서의 품위를 손상하지 않으면서도, 참신하고 기발한 안을 균형 있게 만들어보자고.”
이 말을 들은 이진우가 처음으로 도혁에게 대들었다.
마치 미래에서 온 듯 무척 합리적인 말로 말이다.
“도혁 선배님. 그게 도대체 무슨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말씀이십니까!”
“그러게나 말이다. 그 어려운 걸 우리가 해내야 한다.”
도혁은 씁쓸하게 웃었다.
* * *
“쉽게 가자. 안전하게.”
“웬일이래. 명도혁 입에서 안 어울리는 말이 다 나오네. 쉽게, 안전하게.”
로해 아이스 광고 관련한 신입팀의 첫 번째 아이데이션 시간. 도혁은 ‘쉽고 안전하게’라는 말로 회의를 시작했다.
“광고라는 게 말이야. 항상 새로울 필요는 없어.”
“그거 역시 도혁이답지 않다. 이정인 팀장님이 기획1팀이 아니라 우리에게 의뢰를 했을 때는 신선한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았을까?”
서인기가 조금 실망한 눈빛으로 도혁을 바라보았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쉬며 도혁이 노트북을 열었다.
“시장을 개척하거나 제품을 론칭할 때 혹은 인지도가 낮은 브랜드를 알릴 때는 신선한 게 좋겠지. 하지만 지금 로해 광고주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잖아?”
“난 도혁이 말에 동의해.”
보통 중간자 입장에서 아이디어 회의를 진행하곤 하는 한수철이 딱 잘라 도혁의 의견을 지지했다.
“사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야. 이건 너무 새롭게 가서는 안 될 것 같아. 그럴 필요도 없고. 시장에서 위치가 확고한 대표 제품을 확실히 미는 쪽으로 가야 할 거 같아.”
“모두 어떻게 생각해?”
새롭게 가고 싶었지만 당장 대안은 없었던 서인기가 마지못해 그들의 말에 동의하고 대부분 같은 의견이었다.
“자, 그럼 일단 아이템을 선정해 보자. 모두 로해 아이스의 대표 상품이 뭐라고 생각해?”
“우리 하나 둘 셋 하면 가리킬까?”
“하나 둘 셋!”
최민아의 말에 모두 동시에 한 상품을 가리켰다. 그건 수십 년의 전통에 빛나는 로해 아이스의 간판스타 꽈배기바였다.
아이스크림 시장에서 무려 이십 년이 넘도록 매출 상위권에 랭킹되어 있었던 꽈배기바.
놀랍게도 회귀 전에도 그 명성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던 스테디셀러 중의 스테디셀러였다.
도혁이 끄덕이며 꽈배기바를 한입에 깨물었다.
“다들 먹으면서 계속 얘기해 보자고. 맛있네.”
“맞아. 이건 일단 맛있어. 약간 유치한데 가격대에 딱 맞는 맛이나.”
“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이걸 더 비싼 돈 주고 먹기는 싫을 거 같긴 하다.”
가격대에 딱 맞는 말이라는 최민아의 말에 모두 크게 동감했다.
한수철이 저도 모르게 오래전 꽈배기바의 CM송을 흥얼거렸다.
“괴상하게도 생겼지. 로해 꽈배기바. 꼬이고 꼬였네~”
“사과 맛, 띠리리.”
정확한 가사도 모르면서 다들 잘도 따라 불렀다.
아마 이 아이스크림을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사람조차 이 CM송은 들어본 적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국민 CM송이었다.
“아마 광고주도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내가 광고주라면 이 노래를 살리고 싶을 것 같은데.”
“그래서 도혁이가 처음에 쉽게 가자고 한 거구나?”
“맞아. 트로트처럼 복고로 추억을 되살리면 어떨까. 돌아온 꽈배기 송?”
“하지만 너무 똑같으면 캠페인의 의미가 없지 않을까?”
서인기가 다시 한번 조심스레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도혁이 이번에는 그의 말에 동감했다.
“맞아. 인기 말대로 너무 똑같이 갈 수는 없어. 이른바 재탕일수록 더 방식이 기발해야 식상하지 않으니까. 익숙하게 하자는 거지 식상하게 만들자는 뜻은 아니었어.”
“기발한 방식?”
기발한 방식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나오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수십 개의 꽈배기바 껍데기가 쌓여갔다.
“너무 단 걸 계속 먹었더니 짭조름한 거 먹고 싶지 않냐?”
“난 매운 거. 내가 잠깐 나가서 떡볶이라도 사올까?”
“조오치.”
한수철은 단 게 질린다고 하면서도 또 과배기바 하나를 꺼내 물었다.
“이거 물리는데도 자꾸자꾸 손이 가는구만. 손이 가요 손이 가~.”
“지금 로해 광고하는데 다른 회사 과자 CM송 부르는 거냐? 와 한수철 보기보다 상도의 없네!”
“뭐 어때. 작곡가는 한 사람이라는 거 알고 있어? 대한민국 광고 송은 모조리 이분이 만드셨다고.”
“작곡가, 잠시만.”
도혁이 손을 들어 한수철의 말을 멈췄다.
“수철아, 꽈배기 송도 그분이 만드셨겠지?”
“그럼. 살아 있는 CM송의 레전드 윤명수 선생님 말고 이런 명작을 만들 분이 또 계신가?”
“그래! 그거야. 야, 대박. 한수철이 상도의 있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명도혁 정신 차려!”
정신을 차리라니 무슨 말인가. 그의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도혁은 벌떡 일어나 겉옷을 들었다.
“나 잠시만 나갔다 올게.”
“야! 명도혁! 어디가! 떡볶이 먹어야지!”
“먹고 조금 쉬고 있어. 금방 돌아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