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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천재 명도혁-71화 (71/252)

광고 천재 명도혁 71화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스포츠 팬이 있다.

이기는 팀을 응원하는 팬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전자야 뭐, 전생에 나라도 구하고 선행도 많이 하고 살았나 보지. 문제는 늘 지는 팀의 팬들이다.

-아빠, 우리 집은 야구 볼 때 왜 서울 팀 응원 안 하고 로해 응원해?

-인마, 아빠 고향 따라가야지! 사람이 뿌리를 모르면 안 되는 거야. 어? 로해! 사나이는 로해 아이가!

-…….

어린 난 묵묵히 아버지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그때 똑 부러지게 반항했어야 했다.

난 서울에서 태어났다고. 그딴 사나이 같은 거 안 할 거라고.

로해의 야구에 완전히 스며들기 전에 말이다.

그래. 한동안은 괜찮았다. 그래, 우리도 정말로 썩 괜찮았다.

아주 잘하는 팀은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리그를 대표하는 팀으로 자리 잡았고, 선수들의 투혼도 눈부셨다.

똑딱 안타를 치면 발 빠르게 도루도 하고 반짝 우승도 했었지.

그러곤 끝이었다. 끝.

무려, 놀랍게도, 아직도 믿어지지 않지만 무려 회귀 전까지 로해는 삼십 년이 가까운 세월 동안 단 한 차례도 우승하지 못했다.

프로야구팀 몇 개나 된다고 포스트 시즌으로 넘어간 것조차도 손꼽을 정도였단 말이다.

그러는 동안 로해를 응원하는 팬들은 꼴찌 팀이라는 조롱에 평생 시달려야 했고, 점점 야구로부터 마음이 멀어졌다.

내가 경기를 보면 반드시 졌거든. 왜냐하면 항상 졌으니까.

‘올해도, 올해도 결국 가을 야구를 하지 못했지. 벌써 크리스마스가 다 돼가네. 후우.’

도혁은 로해 아이스의 박스를 뚫어지게 노려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침침한 분위기를 이상하게 느꼈는지 한수철이 도혁의 어깨를 흔들었다.

“도혁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팀장님이랑 탁 선배님은 방금 나가셨어. 야!”

“시…… X.”

“시…… 뭐?”

“아니야. 시작을 어디서부터 할까 고민하던 중이었어.”

일과 감정을 분리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난 끓어오르는 분노를 누르며 팥빙수 아이스크림의 얼음을 와삭 씹었다.

한수철도 제 입속에 얼음을 털어 넣었다.

“나도 갑갑하기는 매한가지야. 팀장님이 일단 아이스크림만 던져주고 먹고 있으랬어.”

“그래? 신제품이 나오는 건가?”

“론칭 광고인지도 말 안 해주고 나가셨어. 근데 이정인 팀장님 광고주라니 부담스럽다. 그치?”

“팀장님이 가진 광고주 중에서 나름 주요 기업 아닐까? 여기 은근히 광고 집행 엄청 하잖아.”

“그래?”

야구팀으로서는 후우, 좀 그렇지만 광고 회사 입장에서는 상당히 많은 금액을 홍보에 투자하는 기업이었다.

계열사도 다양하고, 특히 대소비자 판매 제품이 많은 그룹에 속하는 편이다.

도혁은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머릿속에서 야구팀의 잔상을 지워냈다.

그리고 찬찬히 제품을 살펴보았다.

“난 솔직히 단 거 별로 안 좋아해서 아이스크림 브랜드는 잘 몰랐는데, 레전드 상품이 엄청 많네.”

“나도 이렇게 아이스크림 종류가 다양했구나 싶어. 별의별 게 다 있다. 이건 진짜 문방구 앞에서 파는 불량 식품인 줄 알았어.”

“그런 제품군도 나와야 초등학생도 사 먹지.”

“하긴.”

한수철이 동그랗게 생긴 알 모양의 아이스크림을 손으로 흔들며 신기해했다.

미래의 소비자인 초등학생을 공략하기 위해 불량 식품 같은 바둑이알을 출시했지만, 그 맛은 초코바나 콘과 비슷하다. 어른이 되었을 때 입맛을 이어갈 수 있도록 설계한 제품이었다.

‘내용은 그대로, 형식만 초등학생 스타일로 바꿔서 친근하게 미래 고객을 선점한다, 이런 전략이지.’

겨우 평정을 찾은 도혁이 타깃별로 제품을 분리해 박스 안의 아이스크림을 정리했다.

속이 갑갑해 누가보나바를 하나 더 꺼내 드는데 이정인 팀장이 다시 들어왔다.

“자료 가져왔어. 어? 박스 안에 아이스크림 누가 정리한 거야?”

“제가 했습니다. 혹시 미리 어떤 의도대로 정돈한 건데 제가 망가뜨린 겁니까?”

“아니. 내가 가서 이렇게 타깃별로 설명하면서 정리해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깜짝 놀라서. 내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왔어?”

“아, 다행입니다.”

“하여간 명도혁 씨 재밌어. 재밌는 친구야.”

이정인이 다시 한번 정돈된 아이스크림을 들여다보며 감탄했다. 그러곤 브리핑 자료를 나누어 주었다.

“로해 아이스는 태강애드, 그리고 무엇보다 내 주요 광고주야. 내 말 알아듣지?”

“네. 그럼요.”

“자. 그럼 시작하지. 일단 신제품 론칭 광고는 아니야. 광고주는 지금 보이는 제품들 중에서 하나를 골라 주력 상품으로 밀고 충성도를 강화하고 싶어 해.”

“유통에서 경쟁력을 높이려는 거군요. 신제품이나 덜 팔리는 것들도 끼워서 팔려고 말입니다.”

“정확해. 소비자들이 많이 찾으면 그 제품은 경쟁력이 생기지. 그걸 유통에서 유리하게 활용하려는 거고.”

로해 그룹은 원래 유통 쪽에 강점이 있는 기업이다. 제과 쪽도 전통의 강호이지만 더 시장성을 공고히 다지려는 시도일 것이다.

론칭 광고와 달리 대표 브랜드를 밀어서 시장에서 충성도를 높이는 광고.

어쩌면 론칭보다 더 부담스러울 수 있는 과제였다.

도혁의 머릿속에서 빠르게 아이스크림 제품군의 광고가 스쳐 갔다.

‘지금까지 국내외 캠페인을 여러 개 조합하고 아이디어를 더해서 새로운 광고물을 재창조했어. 늘 결과물은 좋았고.’

결국 상업적 크리에이티브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창조물을 자르고 새롭게 합성하고 조합하되 낯설지 않은 신선함을 만들어내는 것.

단, 완전히 새로워서는 안 된다. 세상은 익숙한 걸 선호하거든.

도혁은 생각에 잠긴 채 천천히 또 다른 아이스크림의 패키지를 뜯었다.

이번엔 꽈배기바였다.

* * *

“우린 은근히 촌스러워.”

“대놓고 촌스럽지. 어떻게 만날 때마다 드레스 코드가 똑같냐, 이렇게.”

미리 짜지도 않았는데 애드포인트 멤버들이 또 비슷한 옷을 입고 시청 앞 지하철역에 모였다.

청바지에 흰 티를 입고 검은 코트 차림으로 나타난 서로를 바라보며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한 팀이라는 걸 나타내는 표식 같은 거 아니겠냐. 얼마나 마음이 잘 맞으면 맞추지 않아도 똑같이 입고 오냐고.”

“일종의 텔레파시 같은 걸까요?”

이진우조차 텔레파시라고 하면서도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튼 옷까지 맞춰 입은 애드포인트 멤버들은 서울시청으로 함께 걸어 들어갔다.

오늘은 서울특별시 홍보 공모전 관련 브리핑이 있는 날이었다.

이런 관공서 광고에서는 사전 브리핑이 무척 중요하다.

게다가 이런 자리는 주무관이 누구인지, 결정권자가 누구인지 파악할 수 있는 기회였기에 도혁과 수철도 외출을 달고 시청으로 왔다.

“이번 공모전 제대로 할 건가 봐요. 대학생 공모전인데 브리핑까지 하는 걸 보면요.”

“그러니까. 예산도 많이 쓴다고 소문났던데?”

“아마도 그럴 거예요. 내년에 지자체 선거잖아요. 서울시장이 재선을 노리고 있으니까 본인의 실적을 남기고 싶을 겁니다.”

멤버들이 공모전에 대한 이런저런 의견을 나누며 브리핑 장소인 시청 대회의실로 향했다.

[서울특별시 홍보 및 슬로건 대학생 공모전 사전 설명회]

이진우가 정면에 걸린 대형 현수막과 회의장에 가득 모인 사람들을 두리번거리며 감탄했다.

“우와, 참가자가 엄청 많네요. 전체 상금이 일억이라고 했었죠?”

“맞아. 상금도 상금인데. 잠시만 저거, 슬로건이라고 쓰여 있는 거지?”

도혁의 눈에 ‘슬로건’이라는 세 글자가 들어왔다.

웬일로 일억이나 걸었다고 생각했더니. 슬로건까지 공모전 요강에 포함되어 있었다.

홍보 영상에 포스터, 슬로건까지.

일반 기업에 외주를 준 거라면 못해도 수억은 줬을 사업이었다.

도혁은 일단 상황 파악을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빠른 눈으로 공모전을 주체하고 있는 공무원들을 찾고 있었다.

주무관으로 보이는 몇 명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곧 담당 사무관으로 보이는 남자가 그들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저기 보이는 사람들이 주요 타깃이란 말이지?

관공서, 혹은 대기업 광고에서 1차 타깃은 뭐니 뭐니 해도 담당자다.

대표가 직접 AE를 만나기도 하는 중소, 중견 기업과 달리 이런 큰 광고주는 직접 오너를 만날 수가 없다.

따라서 담당자를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 성공의 관건이었다.

담당자가 최종 결정권자에게 승인을 받아 오면 그제야 진짜 소비자를 만날 수가 있는 것이다.

도혁은 오가는 주무관들을 바라보며 광고 회사 입사와 동시에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담당자를 유능하게 만들어줘야 좋은 광고를 만들 수가 있어. 담당이 결정권자한테 인정을 받게 해줘야 한다고!

자, 그러면 누구를 유능한 공무원으로 만들어줘야 하는지 확인해 볼까?

도혁은 유인물에 적힌 주무관과 사무관의 이름을 파악했다.

그사이 담당 사무관이 마이크를 잡았다.

“안녕하십니까. 담당 사무관 김석호입니다. 이쪽은 실무를 담당하게 될 이민현 주무관입니다. 반갑습니다.”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보시다시피 올해 저희 서울시에서 유례없이 큰 대학생 캠페인을 실시합니다. 집행비를 제외하고도 총상금 1억 원에 달하는 대대적인 예산이 투입될 예정입니다. 그만큼 저희 기획홍보국에서 올해 주력 사업으로 추진 중입니다. 때문에 이렇게 직접 설명회 자리까지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사무관이 눈짓을 보내자 주무관이 화면을 오픈했다. 놀랍게도 문서 프로그램이었다.

“저기, PPT가 아닌가 봐.”

“저거 설마, 한글로 프레젠테이션하는 거야? 와, 낯설다.”

“쉿.”

공문서를 그대로 화면에 띄운 것을 본 참석자들이 조금 술렁이기 시작했다.

디자인 포맷을 중요시하는 강태오는 머리까지 뜯고 있었다.

하긴, 이 무렵까지 관공서에서는 한글이 최고였다. 공문서에 정해진 규격이 있기도 했고.

도혁은 눈에 보이는 형식보다는 문서의 내용에 집중하며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물론 얇은 명조체 덕분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오랜만에 노안이 다시 오는 것 같은 위협을 느끼며 내용을 읽어내려갔다.

“모두 이쪽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예년과 가장 다른 점을 설명드리겠습니다. 제일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상금이구요. 다음은.”

말을 잠깐 끊은 사무관이 커다란 판넬을 가져와 흔들어 보였다.

“슬로건. 바로 우리 시의 슬로건을 정하는 것이 지난번 공모전과 가장 큰 차이점이자 이번 공모전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슬로건!”

“네. 그렇습니다. 예년과 같이 서울시의 방문을 독려하는 홍보 영상과 포스터를 제작해 주시되, 향후 수년 동안 서울시를 대표할 좋은 슬로건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도혁은 끄덕이며 회귀 전 상황을 되짚었다. 서울시와 광역시들이 시작한 이 슬로건 사업은 전국으로 뻗어 나가서 시골의 작은 시 단위까지 확대되었다.

‘도시에서는 얼쑤 동래, 사람 사는 동작처럼 구 단위까지 로고와 캐치프레이즈 사업이 늘어났었지. 광고쟁이로서는 나쁜 일이 아니긴 한데. 흠.’

생각에 잠긴 사이 다시 설명이 시작되었다.

화면에서는 서울특별시가 추구하는 컨셉과 타깃 등 기획 방향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곧 큰 소득 없이 브리핑이 끝나 버렸다.

“정말 특별할 게 없구나. 뭔가 귀에 들어오는 말이 하나도 없어. 큰일 났네.”

“맞습니다. 수철 선배님. 시정 보고서 보고 있는 느낌이었어요. 마지막에는 졸 뻔했다니까요.”

애드포인트 멤버들이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쁜 말은 하나도 없고 미사여구가 줄을 이었지만 정작 핵심을 파악하기 힘든 문서였다.

‘어쩌면 서울시 역시 아직 특별한 기획 방향이 없는 것일 수도 있어. 공모전이니 결국 우리가 방향과 차별점을 만들어가는 수밖에는 없겠구나.’

도혁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브리핑 사항을 메모했다.

돌아서 나오는 길에 시청과 회의실 내에 설치된 배너와 포스터, 현수막을 확인했다.

전체적으로 어떤 느낌의 디자인을 사용하는지, 폰트는 어떤 것을 주로 쓰는지, 그리고 카피나 홍보 문구의 스타일은 어떤지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역시 관공서답게 딱딱하면서도 정형적인 느낌이 드는 홍보물이었다.

‘하지만 서울시는 전국에서 가장 혁신적인 디자인을 시도하는 자치단체로 변모하게 될 거야. 내가 이번 공모전을 통해서 그 시기를 몇 년 당길 거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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