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70화
-끼이익
문을 열자마자 피디의 말대로 무언가가 쏟아져 흘렀다.
다행히 시체가 아니라 베타 테이프(방송 광고를 녹화하는 테이프)였다.
“세상에. 이게 몇 년 치야?”
“모르지. 원래 여기 제작국장님이 이렇게 쌓아두는 스타일이래. 물론 제작국도 그렇고.”
“아니, 그것도 정도가 있지.”
“쉿. 국장님이 들으실 수도 있을 뿐 아니라, 입에 먼지 들어가. 말 그만해.”
금단과 먼지의 문을 연 신입팀이 조심스레 안으로 발길을 움직였다.
“여기를 어떻게 정리하라는 거야, 정말…… PD님은 양심이 있으신 거?”
“문제는 그게 아니야. 여기 순번이 적혀 있어. 나름대로 규칙이 있다고.”
“배열이 있다더니 이 말이었구나. 와. 이거 보통 일이 아니겠는데? 무작정 쌓기만 해도 힘들 텐데.”
“태강애드 제작국만의 질서가 있는 거야. 그걸 흩뜨리지 않으면서 정리하는 게 관건이야!”
“미치겠다.”
도혁은 이미 전생에서 여러 차례 이 ‘금단과 먼지의 방’을 정리한 적이 있었다.
무슨 게임을 하다가 벌칙으로 걸렸었는데, 농담 아니라 퇴사를 결심했었다. 그땐 혼자 걸렸었거든.
‘여럿이 함께하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아님 이 짓을 또 하게 돼서 불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도혁은 혼자 생각하면서도 어이없어 한숨을 훅 뱉었다.
그 숨을 따라 후후훅 피어오르는 먼지를 보고 입을 틀어막고는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도서관식으로배열할게. M-1258-12 이런 식으로 되어 있을 거야.”
“명도혁네 동네 도서관은 이렇게 생겼냐? 하아, 그냥 숫자도 아니네. 날짜도 아니고 무슨 암호 같은 거야?”
“몰라. 제작국만의 뭔, 노하우가 있나 보지.”
“도혁아…… 나 좀…… 무서워지려고 해.”
“우리 팀 전부 붙으니까 오늘 밤새우면 다 할 수도 있을 거야.”
“밤새우면?”
“당연히 밤새워야지. 얼른 시작합시다. 자!”
도혁이 베타 테이프 수십 개를 들고 이동하려던 때였다.
밖에서 익숙한 노랫소리가 창고까지 울려 들어왔다.
-다모아~ 다모아. 다모아~ 샴푸!
-다모아~ 다모아. 가족들 모두 모여 다 모아~ 샴푸!
“엇! 다모아 CM송이다. 제작팀에서 완성안 제작해 왔나 봐.”
“올~ 리듬 얹으니까 더 신나는데? 다모아~ 다모아~.”
“노래까지 하면 입속으로 먼지가 더 들어가지 않을까?”
한 손으로 입을 막고 툴툴대면서도 모두들 들려오는 CM송에 상기된 표정이었다.
직접 만든 광고는 언제 어디서 들어도 기쁜 법이다.
신입부터 대표까지, 광고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도혁은 저도 모르게 다모아 다모아 노래를 속으로 따라 부르며 정리를 계속했다.
“이상하게 다모아 송, 노동요 같지 않냐?”
“따라 부르는 건 좋은데 먼지 안 들어가게 입은 잘 틀어막아라!”
몸은 힘들지만 모두 힘을 모아 열심히 테이프를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창고에서 새어 나간 불빛을 봤는지 제작국장 성민욱이 걸어 들어왔다.
“어허! 누가 내 금단의 방문을 열었는가!”
“성 국장님!”
제작국에서 만나니까 더 반갑네.
도혁은 고개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
비록 좀 더럽고, 약간의(?) 저장 강박증이 있었고, 뭐 아무튼 그렇지만 그래도 성민욱은 도혁이 인정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CD(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다.
“뭘 또 이렇게 정리까지 해주고 그러나. 곧 또 뒤죽박죽 섞일 텐데.”
“아닙니다. 신입이니까 이런 것도 열심히 해야죠.”
“흠, 태도가 좋구만. 제작국 오기 전에 백신 맞는 거라고 생각하고 수고 좀 해줘.”
“네! 국장님.”
“우리 신입 1팀 같은 인재들에게 시키기엔 좀 험한 일인데 말이지. 저기 들리는 CM송, 이 팀에서 제안했다면서?”
성민욱이 아주 만족한 표정으로 신입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한 명 한 명 격려해 주었다.
그러곤 그 역시 노래를 부르며 사라졌다.
“다모아~ 다모아~ 다모아 샴푸!”
트로트 메들리처럼 변해 버린 멜로디가 엿가락처럼 늘어졌다.
아까 듣던 CM송과 다른, 무언가 사연이라도 있는 듯 구슬퍼지는 건 왜인 걸까.
‘사연? ……스토리?’
순간 도혁의 머릿속에서 무엇인가 스쳐 갔다.
아, 맞다, 사모님!
도혁은 제작국장을 따라 국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저기, 국장님. 잠시만요.”
“어! 명도혁 씨네. 뭐 다른 볼일이라도 있나?”
“국장님, 혹시 방송국에 지인들이 많지 않으십니까?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도혁이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사람 좋은 성민욱 국장이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우리 안사람이 드라마 작가긴 한데, 자네가 그걸 알 리는 없고. 근데 무슨 일로 묻는 건가?”
“제가 여러 광고전에 출품 중인데 자문을 구할 것이 있어서요. 드라마 작가시라면 더 취재나 협조를 구하기 좋을 것 같습니다.”
“역시 적극적이구만. 좋아. 우리 와이프랑 자리 한번 마련하지. 좀 특이하고 사람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데, 괜찮지?”
“그럼요. 저도 특이한데요.”
“하긴 나도 그렇지, 뭐. 하하하.”
사람 좋게 웃어젖히는 성민욱을 보고 도혁은 속으로 말을 삼켰다.
‘성민욱 국장님 부인, 레전드 이은경 작가님이시잖아요. 제가 그분을 좀 소개받아야 할 것 같아서요.’
십여 년 안에 원작이 미드로 각색되어 월드 클래스로 부상하게 될 이은경 작가였다.
PPL, 모델 섭외 등 여러모로 꼭 알아두면 좋을 인맥이었다.
도혁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 * *
올해 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다.
영하 10도에 가까운 추위에 출근길이 죄다 얼어붙었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오전의 태강애드 기획국은 고요했다.
최민아는 그 차분한 고요 속에서 커피를 마시며 머그잔을 손에 든 채 부들부들 떨었다.
“지금 나만 불안하니? 기획국 왜 이렇게 조용해?”
“연말이 다가오고 선배님들이 휴가를 많이 가서 그런 게 아닐까?”
“그게 무슨 말이야. 기획팀장님이나 탁기준 선배 한 명만 있어도 정신이 쏙 나가는데 사람이 없어서 조용하다는 게 말이 돼?”
“이거 폭풍 전야 같은 분위기 아니냐?”
신입들이 회의실 창문 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다시 한번 주변을 살폈다.
“농담 아니라 기획국 진짜 조용한데? 어우, 민아 말대로 이게 더 무섭다.”
“수철아, 우리 방학 얼마나 남았냐?”
“3월 1일 개학이니까 아직 멀었어. 그때까지 기획국에서 계속 일해야 하는 거지?”
“이다음에는 제작국으로 가는 건가? 난 제작국에서 좀 배우고 싶은데.”
최민아와 서인기가 눈을 반짝거리자 도혁은 애써 외면하며 냉수를 들이켰다.
그래, 이 인간들은 얼마나 많은 빌런이 제작국에 상주하는지 아직 모르는구나.
솔직히 말하자면 태강애드 제작국 멤버들은 말이지.
‘전부 제정신이 아니야……. 그리고 민아야…… 너도 만만치 않았어.’
태강애드에서도 ‘돌아이 집합소’인 제작국과 그 돌아이 중에 크게 한자리 차지하고 있던 최민아의 모습을 떠올리며 도혁은 비실비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겨우 삼켰다.
돌아이의 대모로 불리며 제작국 붙박이장처럼 붙어서 귀신같은 인생을 살았던 최민아가 아닌가.
잠깐 상념에 잠겨 있던 순간, 복도 끝에서 이정인 팀장과 탁기준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저기 시끄러운 분들 드디어 나타나셨다.”
“역시 이 여유는 한나절을 못 넘기는구만. 근데 손에 든 저건 뭐냐?”
순간 회의실 문을 박차고 이정인 팀장과 탁기준이 들어왔다.
그러곤 탁기준이 큰 소리로 외쳤다.
“신입들! 너네 우리 욕하고 있었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오해입니다. 선배님.”
“할 일이 많기는 한데, 일단 이거 먹고 시작하자. 간식이다.”
“오! 선배님 우리 생각해서 간식 사 오신 겁니까?”
탁기준이 내민 봉지 속에는 아이스크림이 종류별로 들어 있었다.
“먹고 싶은 거 골라서 먹어. 다들 어떤 제품 좋아하나?”
“난, 이거. 골드컵.”
“오! 상상바. 정말 골고루 제품이 다 있네요.”
“팀장님, 선배님! 잘 먹겠습니다.”
씩씩하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지만, 팀원들은 마지못해 손을 뻗어 아이스크림을 잡았다.
아이스크림을 먹기엔 너무, 추웠던 것이다.
따뜻한 어묵도 있고, 지하철역 앞에 붕어빵도 맛있는데, 간식을 사 와도 하필 아이스크림이라니.
한수철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저기, 선배님 오늘 영하 10도입니다. 올해 들어 제일 춥대요. 난방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 춥지 않습니까?”
“원래 이한치한이야. 맛있고 좋네!”
맛있다고 하면서도 탁기준과 이정인 팀장도 이가 시린 듯 눈썹을 찌푸렸다.
아이스크림콘을 한 입 베어 문 이정인 팀장이 도혁을 보며 공치사를 했다.
“그동안 고생했어. 우리 신입 팀. 요즘 태강애드 기획1팀 백전백승이야. 그리고 명도혁 씨, 여러 사람 몫 하고 있어!”
“별말씀을요. 이제 시작입니다.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인사치레를 하면서도 손이 떨려왔다. 정말 너무, 추웠다.
이정인은 그러든지 말든지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스크림을 하나 더 달란다.
“명도혁 씨. 거기 아이스크림 하나 더 줘봐. 오랜만에 먹으니까 맛있구만.”
“알겠습니다.”
도혁이 다양한 아이스크림 중의 하나를 골라 이정인에게 내밀었다.
“어! 누가보나바 좋아하나? 크으 나랑 취향이 비슷하네?”
“네. 우리 아버지도 좋아하셔서 심부름할 때마다 사 왔었어요.”
“역시 우리 명도혁 씨는 일머리가 있어. 어?”
아이스크림 종류의 선택과 일머리의 상관관계는 무엇인가, 생각하며 어정쩡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였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아이스크림을 먹어볼까?”
“네? 방금 먹은 걸로 충분합니다만?”
“팀장님. 정말 괜찮습니다.”
“아니, 내가 괜찮지가 않아.”
이정인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팀원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주 익숙한 눈빛이었다.
“세상에 공짜가 없어. 그치?”
“일 시키려고 그러시는군요. 설마 광고주가 아이스크림 회사입니까?”
“빙고. 역시 일머리 있는 도혁 씨가 눈치도 빨라?”
이정인이 도혁의 어깨를 툭 치며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좋은 작품 쭉쭉 뽑아내 줘야지. 잘 부탁해! 여기 내 광고주라고.”
“아. 로해 아이스 말입니까?”
도혁의 얼굴에 옅은 균열이 갔다. 로해, 로해라고?
이정인이 신입들을 돌아보며 로해 아이스크림에 대해 물었다.
“혹시 우리 신입들은 로해 아이스 제품을 얼마나 먹어봤나?”
“글쎄요. 단 걸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서 많이 먹지는 않았습니다.”
“그래? 광고하려면 매니아급으로 제품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 모두 기억하고 있겠지?”
이정인이 탁기준에게 눈짓을 보내자 그가 밖으로 나가 무언가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걸 본 모두의 입이 쩍 벌어졌다.
대형 아이스박스였다.
그리고 그 속에는 로해 아이스크림의 모든 제품이 들어 있었다.
도혁은 느리게 한숨지었다.
‘애증의 로해. 하, 로해, 로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