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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천재 명도혁-69화 (69/252)

광고 천재 명도혁 69화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의 아내와 결혼할 겁니까?”

기혼자라면 간혹 누군가로부터 한 번쯤 듣게 되는 질문이다.

아니, 이것보다 이 질문을 먼저 생각해야 하나?

“다시 태어난다면 결혼이라는 걸 다시 할 생각입니까?”

전생의 도혁은 이런 우스개를 들으면 농담처럼 대답했었다.

넬슨 만델라도 이혼했다고.

27년의 모진 감옥살이와 고문을 이겨낸 넬슨 만델라도 결혼 생활 6개월 만에 이혼했다고 말이다.

하지만 회귀한 후에는 이 장난스러운 농담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진짜 돌아와 버렸거든.

정말 이번 생에도 결혼이라는 걸 할 것인지, 만약 하게 된다면 전처와 다시 시작할 건지 선택이 가능해진 것이다.

자, 이쯤에서 솔직해지자. 명도혁.

솔직히, 아주 솔직히 결혼도 하고 이혼도 해봤기에 이번 생에는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하거나 살아보면 어떨지 고민하지 않은 건 아니다.

굳이 갈등 많고 상처까지 있었던 관계를 다시 이어가야 할까?

하지만 결국 생각의 끝에는 늘 한우주가 있었다. 최선을 다하지 못한 못난 남편의 후회라고 해두자.

언젠가 우주를 다시 만난다면, 전과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다시 잘해볼 거라고 마음속으로만 다짐했었지.

물론 한우주를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그런데 오늘 문득 궁금해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찾아와 버렸다.

우주를 처음 만났던 날처럼 첫눈이 내리고, 맥주를 한 캔 마신 지금.

명도혁은 그녀의 집 앞에 서 있었다.

어스름 외등을 타고 우주의 방이 보였다.

홀로 회한에 한숨짓던 순간이었다.

“거기, 누구세요?”

“……!”

“누구신데 남의 집을 그렇게 유심히 보시냐구요.”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바로 전생의 아내, 한우주였다.

우주는 고개를 기울인 채 아래위로 도혁을 훑어보았다.

도혁은 자세를 바로잡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이상한 사람은 아니에요. 제가 아는 어떤 분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갈 길 가보세요.”

한우주는 새초롬한 얼굴로 한번 도혁을 돌아보며 대문 쪽을 향해 걸어갔다.

도혁은 저도 모르게 입매를 끌어올렸다.

여전하네. 똑 부러지고 예쁘고, 아니, 여전한 게 아니라 원래 그랬다고 해야 하나?

회한에 젖어 발길을 돌리던 그의 발끝이 여자의 목소리에 붙들렸다.

우주가 다시 그를 부른 것이다.

“저기요. 혹시.”

뚜벅뚜벅. 도혁의 앞으로 걸어오는 그녀의 발소리에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명도혁, 지금 긴장했냐?

키 차이가 제법 났기에 한참 고개를 들어 올린 우주가 눈을 깜빡거리며 물었다.

“혹시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없어요?”

“그런 적은 없는 것 같지만 저도 낯이 익네요.”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얼굴인데. 제가 다른 분과 헷갈렸나 봐요.”

“전생에 인연이 있었을 수도 있죠.”

“전생이라니 재밌는 분이네요. 그럼 이만.”

우주는 단정하게 입매를 끌어올린 채 짧게 눈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집을 향해 뛰어가는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차가운 바람을 타고 가슴에 한줄기 시릿한 것이 스쳐 갔다.

갑자기 만나 놀랐지만 반가웠다. 우주야. 인연이니 곧 다시 만나겠지.

도혁은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렸다.

밤새도록 여린 첫눈이 그치지 않던 겨울밤이었다.

* * *

“어이구 선생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별말씀을요. 대표님께서 출연하신 TV 다큐멘터리 잘 봤습니다. 연구에 매진하시는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중견 배우 김태정이 바이플렉 광고를 수락했다.

촬영 현장에서 만난 바이플렉 대표와 김태정이 서로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곁에는 최철우의 아버지인 광고공사 부장까지 함께였다.

예전에 최 부장이 바이플렉 대표를 소개해 달라던 걸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탁기준이 CF 촬영장을 참관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한 것이다.

‘하여간 최 부장도 머리 회전 하나는 빠르다니까. 최철우가 아버지를 쏙 빼닮았어.’

광고공사는 CF를 매체사에 걸어주는 미디어랩 역할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생각보다 공사 직원이 CF 촬영을 직접 볼 일이 없었다.

최 부장은 신기한 듯 촬영장의 여기저기를 다니며 열심히 구경 중이었다.

탁기준이 중년의 세 남자가 모여 명함을 주고받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어르신들끼리 모여 계시니 얼마나 좋냐. 서로 심심하지도 않고, 우리도 계속 어르신 말씀 안 들어도 되고.”

“최 부장님은 그냥 광고주만 소개해 달라고 했었는데 촬영 현장까지 부르셨네요.”

“좋잖아? CF 구경도 하고, 인맥도 넓히고. 일석이조구만.”

도혁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거렸다. 난감해하고 있는 제작팀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거든.

기획팀이야 이제 일이 끝났으니 정말 CF 촬영을 구경하는 차원이었지만, 제작 쪽은 그렇지가 않을 테니까.

졸지에 광고주에 공사 부장님까지 모시고 촬영하게 된 피디의 얼굴에 침침한 다크서클이 가득했다.

다행히 김태정을 포함해 가족 연기를 하는 연기자들이 모두 잘 따라주어 촬영 자체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특히 시트콤 연기를 하기 전인데도 찰떡같이 코믹 연기를 하는 김태정의 모습에 도혁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

“저런 코믹 연기 처음이실 텐데 대단하시다. 진짜 프로야.”

“나도 감탄 중. 캐릭터는 CG 처리할 거라서 맨땅에서 연기하시는 거잖아. 근데도 어색한 느낌 없이 정말 자연스러워. 괜히 연기 경력 30년 노장 배우가 아니야.”

신입팀은 연기에 집중하는 김태정을 보며 모두 엄지를 추켜올렸다.

그렇게 평화롭게 촬영이 이어지던 차에 김태정이 손을 들어 타임을 외쳤다.

“어이구, 이거 같은 장면에서 자꾸 대사가 걸리네요. 잠시 연습을 좀 하겠습니다.”

“컷컷! 피디님 우리 김태정 배우님이 시간을 좀 달라고 하시네요. 그리고 저기, 내가 촬영장에 간식이라도 돌리고 싶은데…….”

최 부장이 매니저라도 되는 듯 김태정을 보호하고 나섰다.

그러곤 최 부장이 신용카드를 꺼내려 하자 바이플렉 대표가 일어섰다.

“우리 회사 광고인데 제가 사야지요. 제가 커피라도 돌리겠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광고주께 얻어먹을 수는 없습니다. 태강애드 광고주면 저에게도 광고주입니다. 제가…….”

다시 강조해 말하면서 서로 카드를 내겠다고 난리였다.

음식점 계산대에서 볼 수 있는 어르신들의 흔한 기싸움이라고나 할까.

그걸 보고 있던 조감독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가 카페에 다녀오겠습니다. 아메리카노와 라떼 섞어서 사 올게요.”

“나는 녹차로 부탁하네.”

“저는 쌍화차가 좋겠습니다. 하하. 옛날 사람이라서요.”

“저도 그렇습니다. 여기도 쌍화차 추가요. 계란까지는 필요 없습니다! 허허.”

허허, PD가 마지못해 입꼬리를 올리며 카드를 꺼냈다.

한숨을 삼킨 조감독이 카페로 달려가고 아무튼 잠깐 쉬는 짬이 생겼다.

멀리서 PD가 탁기준을 미친 듯이 노려보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탁기준이 애써 그 시선을 모른 척하며 화장실로 도망을 가버렸다.

그러자 화살이 만만한 신입들에게 돌아왔다.

“너네 신입팀도 바이플렉 기획 참여했지? 명도혁, 한수철도 담당 AE 아니야?”

“네. 그렇습니다…….”

“CF 촬영장에 어르신을 왜 두 명이나 더 달고 와. 어?”

“하아. 선배님. 그게…….”

“광고주도 모자라 공사 임원까지. 죽을래?”

주변에 들릴까 봐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지만, 분노를 느끼기엔 충분한 음성이었다.

어금니까지 앙다물고 있었다.

죽을래?

PD의 마지막 말에 도혁은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

제작국 선배에게 저 죽을래 소리를 들으면 진짜 죽을 것 같은 일이 떨어졌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애꿎은 신입팀에게 엄청난 미션이 내려왔다.

“자, 내 얘기 잘 들어라. 우리 신입들한테 제작국에서 선물을 좀 주고 싶어서 말이지.”

“선배님, 저희가 지금 좀 많이 떨리네요.”

“도혁 씨, 수철 씨. 우리 신입팀들. 내 말을 잘 들어. 제작국에는 말이지, 유서 깊은 전설이 하나 있어.”

“저, 전설이요?”

“제작국 구석탱이에 아주 후미진 곳이 있어.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국장실 쪽 복도의 서쪽 기둥을 넘어 북쪽 구석 자리 끄트머리에 작은 손잡이 하나가 있는데 말이지.”

‘헉. 설마! 하…… 안 돼.’ 속으로 몸부림치는 도혁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PD가 그를 확 노려보았다.

“우리 명도혁 씨 일 잘한다고 사내에 소문이 자자하던데? 응?”

“저, 저기 선배님.”

“그래서 내가 그 명성에 걸맞은 레전드 미션 하나 내려주려고. 제작국의 그 후미진 창고 안에 아주 오래된 전설이 있어……. 우린 그 전설의 방을 신입 여러분에게 맡길 거예요. 아시겠어요?”

하, 정말 그걸 나한테 시키려는 건가? 미치겠네.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도혁의 앞에 PD가 한 발 두 발 다가와 코앞에서 열쇠를 흔들었다.

장난스러우면서도 약간은 사악한 눈동자가 예리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자, 이 열쇠를 가지고 신입팀 전부 태강애드 제작국으로 지금 당장 이동한다.”

“네, 선배님.”

“창고 문을 열면 무언가 쏟아져 내릴 거야. 그거 정리해 놓으라고.”

“정리요?”

“전부 다 말끔히. 그리고 규칙에 맞추어서.”

최민아가 눈을 끔뻑거리며 PD를 올려다보았다.

“편하게 창고 정리한다 생각해. 참, 그게 제작국장님께서 PD 시절부터 모아 놓은 건데, 나름대로의 배열이 있어.”

“저기, 선배님. 죄송한데 무슨 말씀이신지 알아듣게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가보면 알아. 여기는 탁기준이랑 나한테 맡기고 지금 당장 출발해. 알겠나?”

“네…….”

“큰 소리로 대답 못 해?”

“네! 알겠습니다!”

도혁은 훅 거친 숨을 뱉으며 열쇠를 움켜쥐었다.

영문도 모르고 냅다 뛰는 다른 팀원들과 달리 앞일을 뻔히 알고 있는 도혁은 가슴이 갑갑해져 왔다.

‘세상에, 이 짓을 또 해야 해? 다시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서둘러 뛰어간 태강애드의 제작국 앞에서 한수철이 길을 헤매고 있었다.

“잠시만. 그러니까 제작국장님 실 복도의 서쪽 기둥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길게 틀어서…….”

“다들 따라와. 이쪽이야. 후우.”

안내를 하면서도 가슴이 웅장해져 왔다.

무슨 열대우림도 아니고 제작국 창고 하나 찾는 게 이렇게까지 힘들 일인가.

아무튼 도혁은 의자로 꽁꽁 막혀 있는 비밀 창고의 입구를 찾아내었다.

의자 위에 자욱하게 쌓인 먼지를 훅 불어 털어내는 그를 보고 팀원들이 어이없어했다.

최민아가 더러운 입구를 보곤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세상에, 이게 다 뭐야? 비밀의 창고가 아니라 먼지의 창고 아니니?”

“난 좀 섬뜩해. 여기 혹시 시체라도 묻어둔 걸까?”

“어! 그러고 보니 명도혁 너는 여기를 어떻게 알아. 어? 피디님들이랑 같이 묻었어?”

“다들 농담 그만하고. 모두 숨 참아. 문 연다!”

“으읏. 읍!”

-끼이익

금단의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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