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67화
“앞 팀 촬영 방금 끝났나 보다. 어, 어머!”
“저거 명도혁 씨 아니야? 도혁 씨 맞죠?”
반가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배우 전서윤이었다.
프로필 사진 촬영을 위해 스튜디오에 방문한 것이다.
“어! 저, 전서윤씨? 그 깨끗한 참소주 맞죠? 와! 와!”
“네. 맞습니다. 도혁씨 친구분들인가요?”
전서윤의 한마디에 서로 악수를 하겠다고 강태오와 이진우가 서로 밀치며 앞으로 나섰다.
손바닥의 땀을 웃옷에 닦아대고 난리가 났다.
그걸 본 전서윤이 웃으며 다가와 인사했다.
“역시 도혁 씨 친구분들이라 그런지 멋있으신데요? 인상도 좋으시구요.”
“감사합니다! 전서윤 님 팬입니다. 제가 팬이에요!”
아, 촌스럽게 정말.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인 거냐.
도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전서윤과는 함께 깨끗한 참소주 광고를 찍기도 했지만, 전생에도 연예인이라면 신물 나게 봐왔던 그였기에 강태오와 이진우의 과민 반응이 촌스럽게 느껴진 것이다.
“서윤 씨 그만 괴롭히고. 프로필 촬영 오셨다고 했죠? 언제 한번 식사라도 하시죠.”
“그래요. 제가 도혁 씨 덕분에 국민 이슬녀 됐잖아요. 그 뒤로 광고 몇 개나 더 찍었어요. 제가 우리 도혁 씨한테 한턱 크게 쏴야지 늘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별말씀을요. 콘티를 찰떡같이 소화해 주신 덕분입니다.”
“참, 우리 밥 먹을 때 친구분들도 함께 오세요. 제가 대접할게요.”
“와! 정말입니까? 가문의 영광입니다!”
다시 주접을 떠는 둘의 팔을 끌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카페에 앉자마자 상기된 강태오와 이진우가 당장 날짜를 잡으라며 도혁을 재촉했다.
“빨리! 언제가 좋겠냐, 어? 도혁아.”
“실물이, 와.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예쁘죠? 카메라가 다 담지를 못하네요. 와.”
“흠. 전서윤 배우랑 식사하고 싶으면…….”
“싶으면?”
“공모전 하나 더 잡아먹읍시다. 그럼 생각해 볼게요.”
도혁이 미리 준비한 일정표를 들이밀었다.
“어우, 하여간 명도혁, 틈을 안 줘요.”
“일단 요거 하나 진행하고, 그리고 전서윤 배우랑 밥 먹읍시다. 며칠 전에 태오 선배가 메일로 보내준 공모전 중에 적당한 것들을 추려봤어요.”
“관공서뿐이네?”
“네. 봄까지 관공서 집중 공략하려구요.”
“별의별 캠페인이 다 있네요.”
이진우가 목록을 훑어보며 혀를 내둘렀다.
“물, 상하수도, 문화유산, 경찰, 가스 안전. 와 대박입니다. 하나하나 도장 깨듯이 해보면 좋을 것 같은데요?”
“이 중에서 내가 생각하는 주력 공모전은 서울시 홍보 캠페인이야. 1월 말까지라서 시기도 딱 맞는 것 같고. 다들 어떻게 생각해?”
“난 괜찮은 것 같아. 일단 상금이 제일 높고, 서울이랑 전국 곳곳에 깔릴 거 아니야.”
“아마 서울 방문 홍보 영상이니 해외에도 방영될 겁니다.”
“이거 되게 괜찮은데?”
‘무엇보다 큰 도시 관공서에 줄을 뚫을 수가 있지. 주무관부터 국장급까지는 안면도 틀 수 있을 거고.’ 도혁은 속으로 진심을 중얼거리며 서울시에서 작년에 주최한 대학생 홍보 캠페인 공모전 대상작을 보여주었다.
벚꽃이 만발한 서울의 풍경, 그리고 서울을 방문하자는 취지의 메시지가 감각적인 영상에 담겨 있었다.
“영상과 비슷한 톤으로 인쇄 광고도 뽑아야 해. 방금 봤다시피 메시지도 중요하지만 크리에이티브적인 감각과 안정적인 구도가 핵심이야.”
“내가 이 광고 전부터 유심히 봤었어. 화려하고 영상미도 좋은 편이라 눈에 띄더라고. 대상 수상작이었구나.”
작년 작품의 카피와 영상을 대조해 보며 전체적인 윤곽에 관한 의견이 오고 갔다.
“일단 최근 5년 동안 수상작들 서치하고 해외 사례도 찾아보자. 도시광고 중에는 싱가포르와 오사카, 방콕이 유명해.”
“오케이! 그럼 내일부터 또 동아리방에 모여서 달려볼까?”
“선배, 우린 주말밖에 안 되는데. 미안하네.”
태강애드의 일로 바쁜 도혁과 한수철이 미안해하자 강태오가 별소리를 다 한다고 격려했다.
“둘 다 직장인 아니냐! 방학 때 백수인 우리가 더 뛰어야지.”
“감사합니다. 선배. 진우 너도 고맙다.”
“별말씀을요. 그런데 정말 우리 서울시 공모전 대상 타면 전서윤 배우님과 식사하는 겁니까? 명백하게 확답을 주십시오!”
“당연하지. 아까 말했잖아. 바로 추진할게.”
“역시, 도혁 선배님! 사랑합니다!”
와락 엉겨 붙는 이진우를 겨우 떼어내고 다시 회사로 향했다.
도혁의 머릿속에는 벌써 몇 편의 광고 문구들이 스쳐 가고 있었다.
* * *
모든 프레젠테이션은 떨린다.
경쟁이든 아니든, 직접 발표를 할 때도 그렇고 보고 있기만 해도 떨리기는 매한가지다.
특히 오늘처럼 광고주 쪽의 대표가 두 명인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다모아 샴푸 광고의 1차 기획 프레젠테이션이 펼쳐질 예정인 대회의실 안에는 태강애드 임직원, 그리고.
두 명의 광고주가 앉아 있었다.
바로 다모아 샴푸의 차혜진 대표, 그리고 일레라 가구의 김영석 대표였다.
마치 대형 마트 매대의 원 플러스 원 행사 상품처럼 대표 두 명이 나란히 앉은 모습을 보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내를 따라온 것이 민망했는지 김영석이 먼저 운을 떼었다.
“오늘은 차혜진 대표의 남편 자격으로 온 게 아니고 광고비 투자자의 입장으로 참석한 겁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사비를 털어 다모아 샴푸의 광고 매체비를 전격 지원할 생각입니다.”
“네. 잘 오셨습니다. 김영석 대표님 당연히 참석하셔야죠.”
김철준이 투자자의 당연한 권리라며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그리고 드디어 프레젠테이션이 시작되었다.
오늘의 프레젠터는 명도혁이었다.
처음부터 광고주가 AE를 지명했고, 처음 차혜진 대표를 만난 것 역시 도혁이었으므로 담당 AE는 명도혁 이름으로 진행되었다.
때문에 프리젠터로 나서게 된 것이다.
심호흡으로 긴장을 녹인 도혁이 단상 앞에 섰다.
“안녕하십니까. 태강애드 기획1팀 신입 명도혁입니다.”
“오늘은 프레젠터로 나서셨네요! 이렇게 보니까 더 반갑습니다.”
“네. 담당 AE로서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그럼 기대하겠습니다.”
불이 꺼지고 커다란 화면 위에 한 글자씩 단어가 새겨졌다.
[민머리, 그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에 관하여.]
‘헤어 나올 수 없는’이라는 글자가 나오자마자 몇몇의 입에서 옅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주로 4050 임원들의 한숨이었다.
김영석 대표 역시 미간을 좁힌 채 조금은 씁쓸한 눈으로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풍성한 머리카락, 다양한 스타일링. 하지만 그들 역시.
예. 비. 탈. 모. 인.]
이번에는 비교적 젊은 남자 직원들이 숨죽여 화면에 집중했다.
예비 탈모인.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탈모는 남자의 전유물?
여성 탈모, 전체 탈모 인구의 40% 육박.]
여직원들과 차혜진 대표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도혁이 드디어 설명을 시작했다.
“대한민국 사람 5명 중 한 명이 탈모인 시대입니다. 유전은 말할 것도 없고 스트레스, 나빠지는 환경, 여성이라면 임신과 출산 등의 요인으로 성인이라면 남녀를 불문하고 탈모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늪. 제가 탈모를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으로 표현했는데요, 중의적인 표현이죠. 헤어가 나올 수 없고, 또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대형 스크린에서는 의인화한 머리카락이 늪에서 허우적대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조금 충격적인 영상이죠? 저희가 머리카락을 사람처럼 표현해 봤습니다. 빠져나올 수 없는 탈모의 늪이라는 컨셉을 잡아 직관적으로 그렸는데요. 물론 광고가 이렇게까지 무섭게 나가지는 않을 거구요. 헤어 나오지 못한다, 헤어 나온다 등의 카피를 설명드리기 위해 PT용 영상을 제작한 것입니다.”
“어이구, 충격요법이라면 성공하셨습니다. 하아. 이거 프레젠테이션이 아니라 미스터리 다큐멘터리 같은데요?”
농담을 던지는 김영석의 표정이 썩 밝지는 않았다.
그 역시 소갈머리가 휑했기 때문이었다.
의도대로 가라앉은 분위기의 회의실을 한번 휘익 둘러본 도혁이 리모컨으로 장면을 전환했다.
BGM이 깔리고 병원에서 처방하는 탈모약의 종류가 화면 가득 펼쳐졌다.
“이토록 비참한 현실이지만 다행히도 탈모엔 약이 있습니다. 미녹시딜 등 바르는 약과 피나스테라이드 등의 경구 치료제, 국소 스테로이드나 면역 요법 등이 큰 효과를 보고 있습니다. 다만 독하다는 인식과 부작용이 소비자들에게는 진입 장벽으로 다가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에 무분별한 민간요법이 성행하고 있고, 탈모 완화라는 달콤한 말로 소비자를 유혹해 폭리를 취하는 업체들도 많습니다.”
화면에는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탈모 제품들이 즐비하게 나열되었다.
도혁도 조사를 하면서 놀랄 만큼 비싸고 다양한 제품이 쏟아져 나왔다.
“놀랍네요. 사람들의 약점을 이용해 저 정도로 팔아먹다니. 거의 사기급인데요?”
“그렇습니다. 탈모 샴푸 회사들이 저렇게 신문 기사인 척 가장한 기사형 광고를 내고 있습니다. 거기에 전화를 걸어 판매하는 텔레마케팅 형식의 광고가 유행입니다. 모든 업체가 폭리를 취하는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도혁이 말을 끊고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탈모 시장 전체가 시쳇말로 호구인 건 사실입니다. 아주 안타까운 현실이죠.”
“제가 그게 분해서 이 제품 연구를 시작한 거예요. 정말 분해서.”
차혜진 대표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도혁이 끄덕이며 설명을 이어갔다.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탈모엔 병원 약을 써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 단계가 지나게 되면 모발 이식을 해야 하구요. 하지만 보조적으로 샴푸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약의 효능을 높이고 더 빠지지 않게 두피에 직접 영양을 공급하는 것입니다.”
화면에 드디어 오늘의 주인공 다모아가 등장했다.
“여기 차혜진 대표님이 수년간 연구한 한방 샴푸와 두피 앰플 다모아가 있습니다. 두피에 좋은 창포부터 인삼 동충하초 황련 등 한방 재료를 정성껏 모아 달인 진액을 이용했습니다.”
“심지어 가격도 합리적인 이만 원대로 구성합니다. 한방 재료를 듬뿍 사용했기에 비록 일반 샴푸에 비해서는 조금 비싼 편이지만 아까 보셨다시피 탈모 샴푸는 기본 십만 원대에서부터 시작하는 실정입니다.”
모두 끄덕이며 화면을 지켜보았다.
화면 속에는 차혜진 연구소의 전경과 샴푸를 만드는 과정, 그리고 제품 속에 들어가는 한방 재료의 모습이 차례로 담겨 있었다.
“처음 차혜진 대표님을 만났을 때가 생각납니다. 탈모로 평생 고통받았던 친정 오빠가 차라리 대머리보다는 다른 장애를 앓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할 만큼 힘들다고 하셨다구요. 단지 외모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스꽝스러운 이미지, 놀림, 사람들의 편견이 더 견디기 힘들다고 말입니다.”
“이에 우리는 천만 탈모인에게 다음과 같은 광고를 제안하고자 합니다. 대머리의 편견을 부수고자 합니다.”
툭, 화면 속에 드디어 광고 시안이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