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66화
광고주가 원하는 모델, 중견 배우 김태정과의 미팅이 곧바로 잡혔다.
역시나 수완이 좋은 탁기준이 사방팔방의 인맥을 동원해 스케줄을 만들어내었다.
“역시 기준 선배. 이럴 때는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입바른 소리를 다 하고 우리 명도혁 진짜 AE 다 됐구만. 어?”
“진심입니다. 저 광고주한테 말고는 이런 말 해본 적 없습니다.”
“나야말로 고맙다. 이렇게 새벽같이 불렀는데 군말 없이 나와줘서.”
현재 시각 새벽 5시 30분.
급하게 일정을 잡다 보니 빡빡한 김태정의 촬영 스케줄 때문에 새벽같이 촬영 현장으로 찾아갈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동이 트지도 않은 이른 새벽 출발한 둘은 경기도 인근의 한 낚시터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촬영을 준비하는 김태정을 만날 수 있었다.
“반갑습니다. 김태정 선생님.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어! 연락은 받았는데 정말 새벽같이 오셨네요. 광고 회사에서 귀한 분들 오시는데 자리가 누추해서 죄송합니다.”
“별말씀을요. 저희가 서둘러 미팅 잡았는걸요. 정말 괜찮습니다, 선생님.”
“간의 의자뿐이라 미안하네요. 이쪽으로 앉으시죠.”
도혁이 휘이 촬영 현장을 둘러보았다.
스태프들은 분주히 오갔지만 아직 주연배우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선생님께서 촬영장에 제일 먼저 오신 겁니까? 다른 배우들이 안 보여서요.”
“요즘 젊은 친구들이 그렇죠, 뭐.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야 아침잠이 없으니 이런 새벽 촬영도 할 만한 거고, 젊은 사람들은 원래 잠이 많잖아요.”
연기자 중에는 최고참이지만 촬영장에 제일 먼저 도착해 준비하는 모습이 진정한 프로다웠다.
무언가를 발견한 탁기준이 김태정에 물었다.
“선생님 이건 대본집입니까? 잠깐 봐도 될까요?”
“별것도 없는데. 보시지요.”
김태정은 무언가가 빽뺵하게 가득 적힌 대본집을 탁기준에게 넘겨주었다.
그 속에는 자필로 적은 연기의 포인트와 동선에 관한 메모가 가득했다.
촬영 현장에 가장 먼저 와서 대본을 준비하는 모습에 절로 고개가 숙어졌다. 대배우의 철저한 면모를 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선생님.”
“아이구, 이건 그냥 성격입니다. 지랄 맞은 거지 뭐. 이제 슬슬 이런 쓸데없는 완벽주의는 내려놓으려구요.”
김태정이 묵묵한 눈길로 대본집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예전에는 더 철저했습니다. 대본에 메모를 많이 해서 빈 자리가 없었죠. 그리고 주연이라고 늦게 다니는 친구들에게 호통도 많이 쳤습니다. 다 부질없는 짓이더라구요.”
“심경에 어떤 변화가 있으셨던 걸까요.”
도혁이 조심스레 물었다. 이 대배우의 심리 변화가 지금 설득의 핵심이거든.
무엇이 이 진중한 이미지의 ‘대표님 전문 배우’가 코믹 시트콤에 출연하게 만들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최근에 어머니가 많이 아프셨습니다. 지금은 다행히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건강하시지만요.”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오다가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더라구요. 즐겁게 즐기면서, 좀 웃으면서 살자. 이까짓 인생 지나고 나면 이승에 여행 왔다 가는 거 아니겠습니까?”
김태정이 넉넉한 미소를 지으며 매니저가 타 온 커피를 권했다.
“이렇게 새벽 공기 마시면서 젊은 사람들이랑 커피도 마시고. 얼마나 좋습니까. 이렇게 이 순간을 즐기면서 남은 생을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카르페디엠. 지금 이 순간을 즐기자, 이런 말씀이시군요. 멋진 생각입니다!”
도혁은 숨을 깊이 들이켜며 지난 생을 반추했다.
방향조차 생각하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렸던, 그게 최선인 줄 알았지만 돌아봤을 때 주변에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았던 전생의 아픔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울컥 심장이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도혁은 마른 입술을 떼어내 입을 열었다.
“선생님 말씀을 듣고 나니 열심히 달려가면서도 언제나 내가 지금 어느 길로 가고 있는지. 그리고 나를 위해 살고 있는지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젊은 친구가 아주 속 깊은 말을 하네요. 우리 아들 또래 같은데, 게임이나 하고 있는 내 자식이랑 비교됩니다. 허허.”
“별말씀을요. 게임은 저도 많이 하는걸요. 저희 아버지가 보시면 저도 한심한 아들일 겁니다.”
“에이, 이렇게 새벽같이 일하러 나온 청년을 한심해할 리가 없죠. 참, 그래서 말인데.”
드디어 용건을 말하려는 모양이었다.
김태정이 처음보다 한결 온화해진 얼굴로 둘을 번갈아 보았다.
“두 분은 무슨 일로 이렇게 이른 시간에 오신 겁니까? 광고회사 분들이니 광고 일일 거라고 짐작은 하고 있습니다만.”
“저희가 매니저를 통해서 제안서부터 전달할까 하다가 직접 찾아뵙고 말씀드리는 것이 예의인 것 같아서 이렇게 왔습니다. 이걸 한번 봐주시겠습니까?”
“그러죠.”
한 손으로 돋보기를 당겨 쓴 김태정이 한참 동안 제안서를 들여다보았다.
그 표정만으로도 무언가 주변을 압도하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도혁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설득할 말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까의 온화한 모습과 달리 깐깐한 손길로 페이지를 넘기는 김태정의 미간이 더 깊이 좁혀졌다.
고요한 낚시터에 종이 넘기는 소리만이 고요히 번졌다.
팽팽한 긴장이 버겁다고 느껴질 때쯤 김태정이 드디어 입을 뗐다.
“제품이 변비약이네요?”
“네. 그렇습니다.”
“흠…… 광고 컨셉은 마음에 드는데…… 광고주도 마음에 들어했겠어요.”
“네. 가족을 대상으로 한 부분을 특히 강조하고 싶은데, 아버지 역할로 김태정 선생님이 나오시면 좋겠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이것 참.”
김태정이 조금 난감한 기색을 보이며 손가락 끝으로 낚시 의자의 팔받침을 툭툭 건드렸다.
의자에 등을 기대어 생각에 잠긴 그를 보며 탁기준이 설명을 이어갔다.
“기획안에 나와 있듯 세대를 관통하는 타깃을 선정한 저희로서는 높은 인지도와 주부들의 충성도를 동시에 확보한 모델이 필요한 실정입니다. 현재로서는 김태정 선생님 외의 대안은 없다고 보여지구요.”
“에이, 제가 그 정도까지는 아니구요.”
“전 국민이 얼굴을 아는 아버지 배우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특히 김태정 선생님처럼 이미지까지 좋은 분은 더 드뭅니다.”
“이미지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 광고가 저랑 맞을까요? 저기, 아까 속 깊은 얘기했던 친구 이름이 명…….”
“명도혁입니다.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도혁이 자세를 고쳐 앉고 본격적인 설득에 들어갔다.
“아까 인생관이 많이 바뀌었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혹시 연기 변신 같은 걸 시도해 보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이 광고를 통해서 코믹 이미지로 변신을 꾀하라는 말인가요?”
“꼭 광고가 아니라도 말입니다.”
“안 그래도 사실, 시트콤 대본이 하나 들어와서 고민 중이었습니다. 내 그 피디한테도 똑같이 말했지. 이 역할에 내가 어울리겠냐, 왜 나를 캐스팅했냐.”
“혹시 뭐라고 하던가요?”
“안 어울려서 캐스팅했다는 묘한 말을 합디다.”
“정확히 저희도 그렇습니다. 아이러니를 노리는 겁니다.”
“아이러니요?”
도혁이 부드럽게 입매를 끌어올리며 캐스팅의 이유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내성적인 사람이 주도적으로 발표할 때, 중후한 배우가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줄 때 등 우리는 고정관념을 깨면서 발생하는 충격을 기억합니다.”
“오호. 그 충격을 대중이 기억한다는 거군요.”
“맞습니다. 국민 대표님이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와 손을 잡고 나온다거나 시트콤에서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이면 개그맨이 한 것보다 효과가 배가 되는 겁니다.”
“일리가 있네요.”
“더구나 저희는 제품의 신뢰도도 획득하게 될 겁니다. 김태정 배우님의 이미지가 워낙 좋으시니까요.”
“허허, 칭찬은 이렇게 나이가 들고 빈말인 줄 알아도 듣기가 좋다니까요.”
“빈말 아닙니다. 이 통계를 보시겠습니까?”
도혁은 당시 신문의 연예면에 실린 광고 모델 선호도 조사 결과를 보여주었다.
김태정은 그렇게 높은 순위는 아니었지만 전 세대를 통틀어 50위권에 들어 있는 유일한 중견 배우였다.
“광고주의 강력한 희망 사항도 있었지만 충분한 통계를 통해 오늘 이렇게 찾아뵙게 된 겁니다. 저희 태강애드와 함께해 주신다면 영광으로 생각하고 좋은 광고 한번 만들어보겠습니다.”
“내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탁기준의 마무리로 미팅이 끝나고 둘은 가뿐한 마음으로 촬영장을 빠져나왔다.
초겨울 새벽의 신선한 공기가 시원하게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도혁은 낚시터의 맑은 공기를 한껏 들이켜며 차에 올랐다.
역시나 예감이 좋은 아침이었다.
* * *
오랜만에 공익광고 공모전 팀이 모였다.
대학생 공모전 대상 이후 섭외가 들어왔던 오늘대학 잡지 표지 촬영을 위해 스튜디오에 온 것이다.
도혁과 한수철은 바쁜 일정 때문에 겨우 점심시간에 짬을 내 촬영장으로 올 수 있었다. 오랜만에 봐도 어제 본 듯 식상한 남자들끼리의 조우였지만, 그래도 반가웠다.
“어! 태오 선배. 잘 지냈어요? 진우 너도 잘 있었어?”
“어떻게 시상식보다 더 떨리냐?”
“하던 일이 아니라서 그렇죠. 어! 설마 우리 메이크업하는 거예요?”
“네. 맞아요. 마무리되는 대로 바로 촬영 진행할게요. 이번 촬영분은 다음 호에 게시될 거예요.”
모두 청바지에 흰 셔츠를 맞춰 입고 메이크업까지 받았다.
강태오가 투덜거리면서도 손수 립밤을 바르는 모습에 아티스트의 웃음이 터져 버렸다.
“가만히 좀 계세요. 그런데 마스크가 정말 좋으시네요? 그런 말 많이 듣죠?”
“이상하게 머리 밀고 더 많이 들어요. 이게 어울리나?”
“장두형이고 이목구비가 커서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혹시 혼혈은 아니죠?”
“아, 아버지가 한국계지만 혼혈이세요. 스코틀랜드 사시구요.”
“오! 역시 느낌 있네. 그쪽 느낌 있어요.”
도혁도 모르던 사실이라 강태오를 돌아보았다.
“저기 태오 선배, 파주 저 끝 시골 마을에 산다고 하지 않았어요?”
“할머니 집이야. 부모님 전부 영국에 계시지.”
“아무리 봐도 깡촌 스타일인데.”
“뭐 인마?”
장난을 치는 도혁을 보고 스태프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사실 이 후배분 쪽이 더 유럽 스타일이기는 해요. 스마트한 느낌?”
“오늘 촬영 협조 잘하라고 많이 띄워주시네요.”
“정말로요. 체격도 좋고, 모델 하자는 명함 받아본 적 없어요?”
“모델보다는 아이돌 스타일 아닙니까?”
“큼큼. 촬영 들어가시죠!”
도혁이 스태프들과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준비가 끝나고 드디어 촬영이 시작됐다.
“이쪽 보시구요. 좀 더 환하게 웃으시구요.”
“저희가 회사에 들어가 봐야 해서요. 얼른 끝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럼 더 이가 보이게 활짝 웃어주세요. 그렇지! 좋아요!”
어색하게 입매를 억지로 끌어올리며 최대한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찰칵, 찰칵.
“좋습니다! 오케이!”
드디어 촬영 기자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고 막 포즈를 풀고 있을 때였다.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시간을 체크하던 도혁의 귀 끝이 바짝 곤두섰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앞 팀 촬영 방금 끝났나 보다. 어, 어머!”
“저거 명도혁 씨 아니야? 도혁 씨 맞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