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65화
국민 배우 김태정. 중후하고 온화한 매력으로 이른바 ‘대표님 전문 배우’로 명성이 높았다.
그는 50대의 지긋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침 드라마의 황태자로 주부들의 사랑을 받으며 건재한 인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거, 잘하면 그림 하나 나오겠는데? 김태정 배우, 시트콤 출연해서 대박 냈잖아.’
도혁의 기억으로 김태정 배우는 이맘때쯤 파격적인 연기 변신을 시도한다. 바로 시트콤을 통해서 말이다. 그것도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는 초대박 시트콤.
당시 언론들까지 주목해 기사를 쏟아냈다.
[국민 배우 김태정, 체면 내려놓은 연기로 시트콤 스타 대변신.]
[대표님에서 시트콤의 대부가 된 김태정에 광고 러브 콜 쏟아져.]
신드롬이라고까지 불리며 코믹 광고의 유행을 휩쓴 김태정이었다.
도혁은 미소를 머금은 채 이 대표의 말에 귀 기울였다.
하지만 이런 미래를 알 턱이 없는 탁기준은 조심스럽게 우려를 표했다.
“김태정 배우님 이미지가 참 좋으시죠. 가족 컨셉에 잘 맞는 모델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비자들이 즉각적으로 아버지 역할로 받아들일 만한 배우이구요.”
“내 말이 바로 그겁니다.”
“다만 배우님의 이미지가 우리 광고와 조금 거리가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김태정 배우께서는 중후한 매력이 장점인데, 광고가 코믹 소구라서요. 수락하실지 조금 우려되는 면이 있습니다.”
“그거야 우리 두 분께서 젊은 열정으로 섭외하실 수 있지 않나,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만? 하하.”
광고주가 껄껄 웃어젖히니 함께 웃고는 있지만, 아마 탁기준 선배 속이 타들어 갈 거다.
김태정 배우 엄청 깐깐하거든. 중년 배우 중 광고주 섭외 요청 1순위, 더불어 광고 회사 섭외 거절 1순위로 유명했다.
섭외 갔던 PD들이 말 섞는 것도 쉽지 않다고 투덜대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도 광고주가 원하고, 시트콤을 찍은 걸로 봐서 이맘때쯤 무언가 심경의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일단 시도는 해봐야지.
도혁이 탁기준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입을 뗐다.
“김태정 배우님이 출연해 주신다면 제품의 신뢰도를 크게 올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죠?”
“네. 국민 배우 이미지도 좋지만, 중후한 배우가 코믹한 연기를 했을 때 아이러니한 매력이 생기거든요. 소비자의 머릿속에 강하게 각인되구요.”
“그러니까 말입니다. 꼭 좀 부탁드릴게요.”
“섭외가 쉽지는 않겠지만 저희가 최선을 다해서 진행해 보겠습니다.”
“그럼 저는 두 분만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일단은 최선을 다해보겠다는 대답을 남기고 둘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표실을 나서자마자 탁기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일단 알겠다고 말은 했는데, 명도혁! 김태정 배우님 섭외 힘든 거 모르지?”
“아, 그분 섭외가 어렵습니까? 김태정 배우님이 출연해 주신다면 제품의 신뢰도가 올라갈 거라고 생각해서 해보겠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광고주께서 너무 원하기도 하구요.”
“그래, 그분 굉장히 까다로워. 어르신 아주 꼬장꼬장하다고.”
둘은 동시에 예전 일레라 가구 때 고생했던 성우 섭외를 떠올렸다.
성우 섭외하느라고 골프까지 치고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도혁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탁기준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일단 부딪혀 보시죠. 한진성 성우 땐 우리 은퇴한 사람도 데려왔잖아요.”
“그래야지. 다른 방법이 없잖아. 광고주를 설득하든지 모델을 설득하든지.”
“우리는 성공할 겁니다. 설득의 대가 탁기준 선배가 있지 않습니까?”
“으이구, 비행기 태우지 말고.”
장난을 치면서도 탁기준은 난감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솔직히 도혁도 걱정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지금은 아직 시트콤 촬영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그러니까 김태정 배우가 바이플렉 모델을 수락한다면 이미지 변신을 광고로부터 시작하는 거였다.
회귀 전엔 시트콤으로 연기 변신을 한 후 광고 회사 러브 콜이 쏟아졌었고.
쉽게 말해 전생과 전후가 바뀐 거였다.
하지만 시트콤의 코믹한 이미지와 바이플렉 광고 기획의 느낌이 너무 잘 맞아떨어져 놓치기 아까운 것도 사실이었다.
‘어차피 전생과 똑같이 살고 있지도 않고 시간과 사건이 섞여서 더 빠르게 흘러가고 있으니까 도전해 볼 만해. 일단 찾아가서 부딪혀 보자.’
도혁은 섭외 필승의 의지를 불태우며 이를 앙다물었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배님, 예감이 좋아요.”
“그래, 명도혁 감 좋은 놈이니 한번 믿어보지. 이 바닥 연예인 이미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니까. 어제 누아르 찍다가도 오늘 시트콤 찍는 게 배우라는 직업이잖아?”
“그러니까요. 광고로 연기 변신했다고 보도 자료도 뿌리구요.”
“하여간 우리 신기한 명도혁 신입께서는 몇 수 앞을 봐요. 그래, 또 뛰어봅시다. 광고쟁이 하는 동안 이놈의 힘든 숙제 끝날 날이 오겠냐?”
“일이라는 게 다 그렇죠. 이거 해결하고 나면 다른 과제가 또 떨어질 겁니다.”
“심장이 쫄깃한 기분이 썩 나쁘지 않은데?”
기획안 통과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시 떨어진 무거운 숙제를 껴안은 채, 둘은 다시 새로운 한 발을 내디뎠다.
* * *
예감이 좋다고 탁기준 선배한테 자신 있게 말했었는데.
다음 날 아침,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탁기준과 함께 대표실로 불려가고 말았다.
“대표님, 찾으셨습니까?”
“오! 태강애드 백전백승 파트너, 탁기준 명도혁 왔구만. 오랜만에 직원들이랑 티타임을 가져볼까 해서 불렀어.”
“감사합니다. 대표님.”
“어제도 승전고를 가져왔다고 들었어. 바이플렉이 중견 기업이기는 하지만 대리급에 맡기기엔 사이즈 큰 회사인 거 알지?”
“네. 늘 기회를 주시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 여기 명도혁 씨랑 손발 잘 맞춰서 계속 위로 올라가 봐. 이러다 둘이 팀장급 빼버리고 삼전 가전 맡게 되는 날이 올지 누가 아나.”
김철준이 둘을 보고 말에 뼈를 심으며 흐뭇하게 웃었다.
누구보다 실적을 중요시하는 그였기에 정말 팀장급 빼고 단독으로 대형 광고주를 맡길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날이 생각보다 빠르게 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커피 잔에 입술을 대었다.
순간 노크 소리가 대표실을 울렸다.
-똑똑
“대표님 손님 오셨습니다.”
“기다리고 있었어. 들어오시라고 해.”
“그럼 저희는 나가보겠습니다.”
“아니, 그대로 있어도 돼.”
출입문을 열고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바로 일레라 가구 김영석 대표였다.
“이런, 반가운 분들이 함께 계셨군요. 모닝커피나 마시려고 지나는 길에 들렀는데, 이거 잘됐네요.”
“제가 김영석 대표님 오신다는 말 듣고 부러 우리 직원들 불렀습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정중하게 인사를 나누며 모두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으며 악수를 청하는 김영석을 보고 도혁이 속으로 미소 지었다.
김영석이 모닝커피나 마시려고 들를 사람이 아닌데?
급한 성격에 다모아 샴푸 진척 사항을 확인하려고 온 것이 분명했다.
“우리 김철준 대표님은 안 먹어도 배가 부르시겠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뛰는 직원들이 든든하게 버텨주니, 이거 부러워서 배가 아플 지경입니다.”
“그러게요. 제가 복이 참 많은 사람입니다.”
김철준이 흐뭇하게 도혁과 탁기준을 번갈아 보며 미소 지었다.
몇 모금의 커피와 함께 의례적인 인사가 끝나자 김영석 대표가 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온 건 다름 아니라, 우리 김철준 대표님도 다모아 샴푸 건 알고 계시나요?”
“그럼요. 당연히 보고 받았습니다. 우리 직원들이 건건이 세세한 것도 모두 보고하는 편입니다. 그래야 제가 제대로 된 판단을 하니까요.”
“크으, 역시 김철준 대표님이십니다. 이래서 제가 태강애드 믿고 맡기는 거 아닙니까.”
“그 의리 끝까지 가셔야 합니다!”
김철준이 광고주와 도원결의를 단단하게 다지며 다모아 샴푸의 진행 사행에 대해 물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김영석 대표께 어디까지 진행되고 있는지 대략적으로 브리핑 가능한가?”
“현재 광고주 1차 미팅 후 회의 진행 중입니다. 컨셉과 타깃, 매체 선정, 그리고 모델까지 다각적으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쉽지가 않지요? 제품도 특이하고 우리 집사람이 또 고집이 황소고집이에요.”
“한 번 뵈었지만 좋은 분 같았습니다. 특히 제품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 분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렇게 봐주면 고맙구요. 사실 말이 좋아서 열정이지, 아주 집요합니다. 그 제품 연구한 지 얼마나 오래됐는지 몰라요. 매일 약 달이고, 섞고 바르고 십 년간 집에서 한약 냄새 맡고 살았습니다.”
김영석이 한약 냄새라도 나는 듯 찌푸린 표정으로 도혁을 바라보았다.
“집사람이 좀 까다롭긴 한데 잘 좀 부탁합니다. 결혼 전에 연구원으로 한창 잘나갔었는데 나 때문에 꿈을 많이 포기했어요. 내가 그 사람한테 빚이 많아서요.”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일레라 가구 때 같은 강력한 한 방 기대해 보겠습니다.”
설마 일레라 가구 캠페인과 같은 파급력을 기대하는 거? 설마 그 정도 예산 줄 건가?
욕심도 많은 김영석 대표였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천만 탈모인을 위해 저렴한 가격으로 가성비 있게 다모아 샴푸의 캠페인을 진행해 보겠다 다짐하던 찰나였다.
“예산은 제가 최선을 다해 지원하겠습니다.”
“아! 정말이십니까?”
“네. 사실 집사람은 내 돈 안 받으려고 하겠지만, 제가 이번에 광고로 재미를 많이 봤잖아요.”
김영석이 도혁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잘 만든 광고가 얼마나 매출에 큰 도움이 되는지 절절하게 깨달았습니다.”
“캠페인의 힘은 생각보다 대단하죠. 실제로 광고로 부도를 막은 사례도 있으니까요.”
“그럴 수 있다는 걸 제가 이번에 제대로 느꼈지 않습니까? 이게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한번 광고 맛을 보니까 돈 아낄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역시 김영석 대표님입니다.”
“집사람이 예산에 대해서 뭐라고 하든지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기획안 잡아주세요. 일단 보면서 조율하면 되니까.”
“믿고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표님.”
역시 화끈한 김영석 대표다운 발언이었다.
솔직히 차혜진의 회사를 방문했을 때 가내수공업과 같은 규모에 예산이 얼마나 책정될까 난감했었는데.
희망이 샘솟는 기분이었다.
천군만마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구나. 하긴 광고에 있어서 천군만마가 뭐 따로 있겠나. 예산이 천군만마지.
가뿐한 마음으로 대표실을 나선 도혁이 회의실 문을 열었다.
도혁이 올망졸망 모여서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는 팀원들에게 호쾌하게 선언했다.
“다모아 샴푸 관련해서 생각나는 대로 아무거나 다 말해봐. 예산은 신경 쓰지 말고.”
“올~ 명도혁, 무슨 일 있었냐?”
“그러게, 돈 신경 안 쓰고 아이디어 말하라고? 명도혁 재벌네 막내아들 같다?”
“그런 걸로 하자. 아무튼 시작해 볼까?”
재벌네 막내아들과 같이 든든한 마음으로 다시, 아이데이션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