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64화
번개처럼 한 주가 지나갔다.
기획안 프레젠테이션을 위해 바이플렉을 찾았다. 연구소 입구부터 촬영으로 잔뜩 소란한 모습이었다.
도혁과 탁기준을 본 바이플렉 대표가 반갑게 그들을 맞았다.
“어이구, 태강애드에서 구세주들이 오셨네요. 촬영 잠깐 쉴 수 있겠습니다. 두 분 잘 지내셨지요?”
“이 대표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이야, 일주일 만에 뵙는데 카메라를 받아서 그런지 더 멋져지셨습니다.”
“저 같은 아저씨야 만날 똑같죠. 두 분 대표실로 들어가시죠.”
복도로 들어서자 독하게 촬영 스케줄을 이어갔을 게 분명한 명현진이 도혁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어! 도혁이 왔네?”
“누나, 잘 살았냐? 어떻게 우리는 집보다 바이플렉에서 더 자주 만난다?”
“그러니까 말이야. 기준 씨도 잘 지냈죠?”
“그럼요. 이렇게 일하는 모습 보니까 멋진데요?”
탁기준은 명현진의 대충 묶은 머리가 잔뜩 떡 져 있는 걸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칭찬했다.
역시 탁기준은 비위까지 좋은 탁월한 AE가 아닐 수 없었다.
도혁은 명현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누나.”
“이게 돌았나. 아우 징그러워. 야, 저리 안 떨어져?”
“나 좀 도와주라. 우리 프레젠테이션하는 거 영상으로라도 잠깐 넣어주면 안 돼?”
“왜, 명도혁 방송 타고 싶냐?”
“그런 게 아니라 다큐멘터리 보면 참편한 저녁 광고 준비에 한창이었다, 오늘은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온 광고대행사에서 프레젠테이션을 준비 중이다. 이런 식으로 성우가 멘트하고 화면만 보여주잖아. 그런 거 좀 넣어달라고.”
“청탁하냐?”
“부탁한다.”
명현진이 잠깐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홍보 티 나면 안 되니까 제품명은 빼고 갈게. 괜찮지?”
“그럼. 상관없어. 유산균 제품 프레젠테이션 중이다, 정도로만 나가줘도 땡큐지.”
“일단 찍어가 보긴 할게. 국장님 선에서 잘릴 수도 있어.”
“오케이. 고마워 누나. 뭐 해줄까? 안아줄까?”
“우웩 꺼져라. 진짜.”
명현진이 팔꿈치로 도혁의 옆구리를 가격하곤 촬영감독에게 뛰어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바이플렉 대표가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두 분 정말 부럽습니다. 사이도 좋아 보이고.”
“어떤 부분이 부러우실까요? 꺼져야 하는 거요? 아니면 얻어맞는 거 말씀이십니까?”
도혁이 찔린 옆구리를 손으로 훑으며 바이플렉 대표에게 물었다.
“저도 남매를 키우고 있는데 투덕거리기라도 하면 좋겠구만, 둘이 아예 말도 안 섞어요.”
“바쁘게 살다 보면 다들 그렇죠.”
“가족만큼 소중한 게 없는데 그걸 애들이 몰라요. 명도혁 씨네 남매처럼 정 있게 지내면 좋을 텐데.”
도혁은 명현진을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느끼하게 보지 말라고 다시 입 모양으로 욕을 먹어야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촬영팀까지 달라붙은 광고주 프레젠테이션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로 기획안을 오픈하는 자리인 만큼 대표실에는 보이지 않는 긴장이 흘렀다.
탁기준이 준비한 빔으로 화면을 열고, 도혁은 보조를 맡았다.
카메라 두 대가 동시에 탁기준을 찍기 시작하고 드디어 기획안 발표가 시작되었다.
화면에 한 줄 명언이 펼쳐졌다.
[기회는 어느 날 누군가에게 갑자기 나타난다. 하지만 그 기회를 잡는 건 준비된 사람뿐이다.]
“평소 좋아하는 명언입니다. 책상 앞에 붙여두고 한 번씩 들여다보는 글귀이죠. 그리고 이 문장을 볼 때마다 저는 바이플렉 이태호 대표님을 떠올립니다.”
“어이구, 이거 시작부터 너무 거창하게 비행기 띄우시는 거 아닙니까? 편안하게 하세요.”
“아닙니다. 저는 마케팅을 위해 바이플렉의 재무구조와 제품을 열심히 연구한 한 사람으로서 대표님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중견 기업인으로서 귀감이 되기에 이렇게 다큐 프로그램까지 촬영하는 거겠죠.”
탁기준이 촬영팀을 돌아보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번 바이플렉의 장편한 아침과 참편한 저녁 제품의 론칭을 준비하면서 준비된 대표님께 진짜 기회가 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게 론칭에 맞추어 방송국에서 특집 프로그램을 기획하다니, 공중파의 공신력은 큰 호재로 작용할 겁니다.”
“저희는 이 기회를 절대 날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캠페인을 진행할 것입니다. 평생 국민 건강과 유산균주에 바친 대표님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이에 3단계 마케팅 추진안을 제안합니다.”
탁기준의 말에 도혁이 화면을 넘겼다.
[1단계 홍보 추진안.
: TV 다큐 프로그램 및 언론 보도 자료를 통한 인식 함양.]
“광고와 홍보는 다릅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광고는 판매, 홍보는 이미지 구축을 목적으로 합니다. 브랜드 평판을 관리하고 상품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을 각인하는 것. 그것이 1단계 홍보 추진의 목표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을 겁니다. 저기 계시는 존경하는 명현진 피디님께서 연구 개발에 매진하는 바이플렉의 이미지를 제대로 표현해 주실 겁니다. 그렇죠?”
명현진이 멀리서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였다.
“바이플렉의 미래 가능성을 집중 조명하는 TV 프로그램과 더불어 유산균에 대한 국민 인식 개선을 위한 보도 자료를 집중 배포할 생각입니다. 기사형 광고 역시 함께 진행됩니다.”
“아, 기사처럼 생긴 건강보조식품 광고 말씀이시죠?”
“그렇습니다. 매출로 즉각적으로 이어지는 광고인 만큼 1차에 병행할 생각입니다. 기사인 줄 아는 소비자도 많으니까요.”
여기까지 말한 탁기준이 눈짓을 보내고 도혁이 다음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2단계 ‘장편한 아침 & 참편한 저녁 동시 브랜드 광고’.
: 애니메이션을 통해 친근한 이미지 전달. 브랜드 론칭 시 인지도 극대화.]
“2단계에서는 브랜드명을 널리 알리는 것에 주목합니다. 아래 그림을 보시죠.”
화면에서는 크게 확대한 대장이 꿀렁거리고 그 속에서 살아서 돌아다니는 유산균 캡슐의 모습이 코믹한 애니메이션으로 표현되었다.
살아 움직이며 장 속을 돌아다니고 활약하는 유산균의 표정과 효과음이 귀여웠다.
마지막으로 ‘장 편해요. 참 편해요’라는 기계음이 나오자 모두 웃음이 터져 버렸다.
제작팀에 맡길 거라고 신입1팀은 그림 한 장 그리지 말고 기획만 하라더니, 탁기준이 최민아에게 급하게 지시해 만든 애니메이션이었다.
도혁은 미소 지으며 애니메이션을 함께 바라보았다.
“장의 유동 운동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유산균의 모습을 재밌게 표현해 봤습니다. 변비는 세대를 따지지 않죠. 아주 어린 아이부터 노인까지 다양하게 고통받는 질환입니다. 이에 착안해 우리는 메인 타깃을 따로 두지 않고 모든 세대에 편안하게 어필할 수 있는 코믹 소구로 만들었습니다.”
“우리 유산균, 표정이 살아 있어요. 기계음도 재밌구요.”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 단계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도혁이 곧바로 다음 페이지로 화면을 이동시켰다.
[3단계 브랜드 충성도 확보.
: 타깃의 공감을 끌어낼 모델 전략]
“3단계에서는 지명 구매를 이끌어낼 충성 고객 확보에 주력합니다. 전국의 소비자들은 약국에서 변비약이 아닌 장편한 아침을, 유산균이 아닌 참편한 저녁을 찾게 되겠죠.”
“듣기만 해도 배부르네요. 크으.”
바이플렉 대표가 안 먹어도 이미 부른 듯한 두둑한 뱃살을 두드리며 흡족해했다.
도혁이 모델 제안 페이지로 화면을 넘겼다.
“여기 가족의 모습으로 제품을 광고할 십 대부터 육십 대까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배우를 추천합니다.”
“모델이 많네요. 비용이 많이 들 텐데요.”
“대표님은 저 배우 중에 이름을 아는 모델이 있습니까?”
안경 너머로 눈을 치뜨며 자세히 화면을 들여다보던 대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얼굴은 알겠는데 이름은 아무도 모르겠네요. 그것참 신기하네요. 분명히 아는 사람들인데.”
“일부러 그런 분들을 뽑았으니까요. 대한민국이 얼굴은 다 아는 분들, 하지만 이름은 모르는 조연급들요.”
“아하, 그렇게 모델료를 아끼는 거군요.”
“맞습니다. 조연급은 또 다른 장점이 있는데요. 그건 바로 친근함입니다.”
탁기준이 40대를 대표하는 배우를 가리켰다.
“동네에서 흔히 볼 법한 푸근한 이웃집 아저씨로 주로 분하는 배우입니다. 대한민국 사람이면 모르는 국민이 없을 정도로 다작하시는 분이죠. 이 친근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소비자들은 자신을 대입하는 거죠. 카피 역시 현실적으로 접근할 생각입니다.”
“여기 수험 스트레스로 변비에 시달리는 딸이 있습니다. 그리고 식구들 챙기기에 바빠 본인의 식사를 제때 챙기지 못하는 엄마와 잦은 회식으로 장 트러블이 생긴 아버지도 변비로 고통받고 있죠.”
“역시 장내 불균형으로 가스가 찬 시어머니가 배를 잡고 나타납니다. 이때 우리의 친근한 유산균 캡슐 친구가 나타나 가족의 고민을 해결해 줍니다. 2단계 캠페인과 연결해 친밀감을 증대시키고 자칫 늘어질 수 있는 제품 설명을 코믹하게 풀어갈 생각입니다.”
여기까지 설명한 탁기준이 몸을 돌려 바이플렉 대표를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제품의 이미지, 인지도, 그리고 충성도까지 잡아낼 3단계 캠페인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두 가지 제품을 동시에 광고하는 겁니까?”
“하나를 강조해서 진행하고 자매품 형식으로 들어가는 게 어떨까 하는데, 제품군도 비슷하고 네이밍도 재밌어서 함께 들어가도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대표님의 의견에 따르겠습니다.”
“정말 잘 들었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자리에 앉으시죠.”
바이플렉 대표가 박수를 치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탁기준이 웃으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태강애드 기획대로만 하면 우리 제품들 대박 날 것 같은데요?”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죠. 저희가 최선을 다해 발로 뛰겠습니다.”
“다 좋아요, 좋습니다. 특히 그 의인화한 캡슐 모양 광고가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세대를 대표하는 모델을 가족의 형태로 표현한 것도 좋았고요. 다만…….”
다만이라는 광고주의 말에 도혁과 탁기준이 긴장했다.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눈빛으로 대표가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모델을 좀 바꾸었으면 합니다만.”
“아, 모델을 교체하고 싶으신 거군요. 지금 제시한 분들은 제안 사항이라서 다시 가격대에 맞춰서 알아보면 됩니다.”
“아니, 돈이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이 친구면 우정 출연도 해줄 겁니다.”
대표가 돋보기안경을 머리 위에 걸쳐 쓰고 핸드폰 액정을 뒤적거렸다.
그러곤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다른 연령은 모르겠고 50대 모델은 이분으로 진행하면 어떻습니까?”
“아, 김태정 선생님이시군요.”
“이미지도 좋고 모델로 적합할 것 같은데.”
설마 김태정? 국민 배우 김태정 선생님?
김태정의 이름을 듣자마자 도혁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거, 그림 하나 나오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