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63화
‘개척해야 할 시장이 두 개. 변비 그리고 탈모. 같지만 다른 광고.’
아침 일찍 회의실에 도착한 도혁은 노트북을 열어 아이디어를 적고 있었다.
막 출근한 한수철이 그의 모니터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명도혁 뭐 하냐? 어! 웬 탈모야?”
“아, 새로 샴푸 광고 의뢰가 들어왔어. 우리 신입1팀으로 말이지.”
“이정인 팀장님이 데려가더니 그사이 또 새 광고를 맡아 온 거야?”
“두 개 동시 진행 정도는 기본 아닌가! 응? 우리 신입들!”
탁기준이 문을 박차고 들어오며 소리쳤다.
“굿모닝! 다른 놈들은 아직 안 온 거냐?”
“여기 도착했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선배님.”
다른 팀원들이 족족 회의실로 도착하고 탁기준이 도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진짜 재밌는 놈이야, 명도혁.”
“이정인 팀장님도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구요. 저 재미 별로 없는데 말입니다.”
“아니, 구경하는 재미가 넘쳐. 정말로.”
탁기준이 노트북 화면 속의 ‘탈모 샴푸’라는 글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광고주가 AE를 소개받거나 지명하는 일이 간혹 있는데, 그게 신입팀이라니, 완전 재밌는 거 아닌가?”
“우리 팀에게 지명 의뢰를요?”
“우리 팀요?”
최민아와 서인기가 동시에 소리치자 탁기준이 귀를 막았다.
“젊어서 그런지 목청도 크네. 이 선배님 귀 안 먹었어, 인마.”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서요. 정말 우리 신입 1팀을 지명한 거예요?”
“맞아. 그런데 광고주가 만만치는 않다?”
탁기준의 말에 도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모아 샴푸의 브리핑을 시작했다.
“일단 먼저 알아야 할 점이 있어. 이번 광고주는 일레라 가구 김영석 대표님의 부인이 운영하는 회사야.”
“아, 시작부터 부담스럽네.”
“그렇지. 일레라 가구는 이제 태강애드의 주요 고객이 되었으니까. 문제는 그것보다 제품이야.”
“여기 적힌 탈모 샴푸 말이지? 이 제품군이야말로 유산균 같은 건강기능식품처럼 팔고 있지 않아? 내가 싫어하는 촌스러운 광고 말이야.”
최민아가 눈살을 찌푸리며 손사래를 쳤다.
“맞아. 현재는 대부분 그렇게 신문광고나 텔레마케팅을 이용해서 팔고 있어. 하지만 우리 광고주는 그런 방식보다는 대기업에서 나오는 샴푸처럼 유통과 판매를 하고 싶어 해.”
“차혜진`s 탈모랩, 처음 들어보는 회사구만. 너무 환상에 젖어 있는 거 아니니? 왜 탁기준 선배가 어려운 숙제라고 했는지 알 것 같다. 하아.”
“불모지와 같은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번 변비약과 탈모 샴푸, 두 광고는 일맥상통해. 두 개의 광고지만 하나와 같은 과제라는 거지.”
“에휴,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요.”
팀원들의 표정이 사정없이 굳어갔다.
한수철이 탁기준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샴푸 광고, 태강애드 입장에서는 신입팀에 넘어오는 게 유리한 거죠? 업체 규모도 작고 시장성도 없고, 태강애드 기획팀에서 맡기는 좀 부담스럽잖아요.”
“빙고. 김영석 대표 때문에 거절할 수도 없고 말이지. 이야, 한수철. 광고 물 좀 먹었다고 이제 제법 풍월을 읊는구만.”
한수철은 칭찬을 듣고도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도혁을 바라보았다.
“광고주 미팅은 다녀온 거야? 이거 너무 무거운 미션 같아.”
“응. 어제 가서 만나 뵙고 제품 받아왔어. 이름이 다모아 샴푸야.”
팀원들은 도혁이 꺼낸 갈색 병을 들고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뚜껑을 열어 향을 확인한 최민아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패키지만 보고 한약 냄새가 역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향이 부드럽네?”
“은은하고 기분 좋은 느낌이야. 한방 느낌도 나면서. 향 진짜 괜찮은데?”
“제품은 더 좋아. 대표님이 엄마의 마음으로 정성을 갈아 넣으셨다더라고. 하나씩 가져가서 집에서 써봐.”
십 년 가까이 다모아 샴푸를 직접 사용했던 도혁이 자신 있게 추천했다.
일단 도혁은 여기까지 브리핑을 마무리하고 팀원들에게 제품을 돌렸다.
도혁은 마지막으로 한수철과 탁기준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두 분도 머리카락 조심하십시오.”
“뭐? 내가 얼마나 풍성한데. 우리 집에 탈모 있는 사람 한 명도 없어.”
“우리 집도요. 그래도 뭐, 샴푸는 잘 써볼게. 광고해야 하니까.”
도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는 유전성 탈모만 있는 게 아니거든.
스트레스성 원형 탈모와 지루성 피부염으로 고생하게 될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다시 한번 강조해 주었다.
“미리 대비해서 나쁠 거 없죠. 두 분에게 꼭 필요한 샴푸라고요. 열심히 써봐요. 꼭! 한수철 너도!”
도혁이 조용히 둘의 손에 다모아 샴푸를 쥐여주었다.
* * *
또 민머리를 만나고 말았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우연히 삭발한 강태오를 만난 것이다.
“아니, 태오 선배! 날씨도 추운데 왜 머리는 잘라먹었어요.”
“어! 도혁이네. 안 그래도 추워서 모자라도 하나 살까 고민하는 중이었어. 와 씨, 너무 춥다.”
대한민국 천만 탈모인을 위해 하루 종일 아이디어를 떠올리다가 헛것을 본 줄 알았다.
강태오의 삭발한 두피 위로 휘잉, 한줄기 찬바람이 스쳐 갔다.
“머리카락은 어디 팔아먹었어요?”
“어! 팔아먹은 거 어떻게 알았어? 어린이 암 환자를 위한 가발 만들기 캠페인을 하는데 가슴이 울컥해서 그길로 잘라서 기부했지.”
“기부만 하면 되지, 누가 삭발까지 해요!”
“너무 짧아져 버려서 그냥 확 밀어버렸는데, 왜 이상하냐?”
“하여간 이런 거 보면 선배도 정상은 아니야. 근데 은근히 잘 어울리는데요?”
키가 크고 근육질인데다 이목구비가 큰 서구형 얼굴이라 나름대로 대머리가 어울렸다. 해외 운동선수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찬찬히 강태오를 훑어보는 도혁에게 그가 공모전 얘기를 꺼냈다.
“참 우리 이것저것 공모전 하기로 했잖아. 내가 괜찮은 거 몇 개 뽑아놨는데 볼래? 사전 조사를 좀 철저히 해봤지.”
“저도 찾아봤어야 했는데. 대학생 위주로 뽑는 공모전 위주로 들어가 볼까 하거든요.”
“그럼 내가 정리한 거 메일로 보내놓을게.”
“죄송해요. 선배. 저도 신경 썼어야 했는데.”
“아니야. 인마, 대 태강애드 신입은 근무하셔야지요. 지금은 내가 백수니까 스스로 열심히 굴러야지.”
강태오가 빙그레 웃으며 어색한 듯 제 민머리를 만졌다.
순간 도혁의 머리 위로 번쩍 그림이 그려졌다.
“선배. 혹시 알바 하나 할 생각 없어요?”
“알바?”
“네. 브로슈어 모델이요. 진짜 광고는 아니고 샘플로 들어갈 때 시안 사진으로 쓰면 어떨까 해서요. 일단 사진 몇 장 찍어가도 될까요?”
“짜식. 민망하게.”
어색한 표정을 지었지만 강태오는 마다하지 않고 갓길로 가 포즈를 잡아주었다.
도혁이 서둘러 핸드폰 카메라로 괜찮은 몇 컷을 뽑아냈다.
사진의 화질은 구렸지만 그럭저럭 구도는 잡혀 있었다.
“어때, 잘 나왔냐?”
“느낌만 보면 되니까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요. 고마워요. 선배 연락할게요!”
기획1팀 회의실에 도착하자마자 도혁이 최민아에게 사진을 전송했다.
“민아야, 이 사람 좀 봐봐. 어때?”
“왜, 소개해 주게? 어머, 근데 대머리니?”
“아, 대머리는 아니고 삭발한 거야. 소개해 줘?”
“어. 잘생겼는데?”
최민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그러곤 슥슥 종이에 섬네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분 실루엣 되게 좋다. 모델이야?”
“일반인 대학생 우리 선밴데 이번에 모델 서준대. 어때, 느낌 있지?”
“두상이랑 이목구비가 전체적으로 외국인 같아. 어깨도 넓고, 덩치도 크고. 이렇게 멋있는 남자 있음 진작 소개 좀 해주지 그랬어.”
“모델로 좋은 거야, 남자로 좋은 거야?”
“둘 다.”
최민아의 말에 한수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강태오 선배 엄청 또라이야.”
“어머, 이름이 강태오야? 이름도 예쁘네.”
“아니, 또라이라는 말은 아예 안 들리는 거야? 심지어 태오 선배 더럽기까지 해.”
“나도 더러워. 뭐 어때 잘생기면 다 용서돼.”
도혁과 한수철은 수염이 텁수룩한 모습으로 동아리방을 굴러다니던 강태오의 모습이 떠올라 마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잘생기면 용서된다니, 내 말 하고 있었나보네?”
“나 아닌가? 민아야, 내 얘기 하는 거지?”
잘생겼다는 말에 서로 나서는 남자 팀원들을 노려보며 최민아가 회의실 탁자를 툭툭 쳤다.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다들 앉아봅시다. 오늘 두 가지 제품 아이데이션 같이 해야 해. 이럴 시간이 없다고.”
“준비해 온 것들 좀 내놔봐. 어느 거부터 할까?”
“탈모냐, 변비냐 그것이 문제로다.”
“둘 다 사회악이로구만. 자, 캠페인으로 한번 퇴치해 봅시다.”
“그럽시다.”
야심 차게 앉아 회의를 시작했다.
도혁이 준비한 화면을 열었다.
“탈모와 변비, 어제 말했듯이 이 두 가지 캠페인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어.”
“인간을 괴롭히는 거?”
“아니. 시장이 있지만 시장은 없는 거.”
선문답 같은 도혁의 말에 팀원들의 시선이 모였다.
“분명히 소비자는 있어. 그것도 아주 간절하고 절절하게 좋은 제품을 원하는 사람들이지.”
“맞아. 한번 충성하면 영원히 충성할…… 어?”
“그렇지. 수철이가 정확히 말했어. 충성도 높은 고객으로 꾸준히 유치가 가능해. 물론 마케팅적으로 본격적인 시장이 열렸을 때 말이지만.”
도혁은 지난 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독한 병원 약을 바르면 따갑던 두피를 달래주던 순한 성분의 다모아 샴푸는 오랫동안 도혁과 함께해 온 제품이었다.
전생의 명도혁은 시장 트렌드에 민감해야 할 카피라이터이기에 신제품은 모조리 써보는 편인 변덕쟁이 소비자였다.
하지만 샴푸 하나만큼은 십 년 가까이 다모아를 고집하며 한 가지만 써왔다.
그만큼 충성도가 유지되는 제품군인 것이다.
“그럼 이 충성도 높은 고객을 어떻게 유치할 것인가. 아직 선점 기업이 없으니까 우리가 열자?”
“맞아. 활짝 열어서 정상에 팍, 깃발을 먼저 꽂는 거지.”
“또 일이 커지는구만. 명도혁다워 아주.”
최민아가 계속 섬네일을 그리며 맞장구를 쳤다.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제법 그럴듯하게 그려지는 그림을 내려다보며 도혁이 설명을 이어갔다.
“그리고 바이플렉으로 넘어가면, 이 회사는 아주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어. 중견기업이라서 인지도가 있는 편이고 무엇보다 대표가 주인공으로 등장할 다큐멘터리도 제작 중이니까.”
“그때 타깃을 여럿 잡는다고 했었잖아.”
“그게 문제야. 자칫 산만하고 설명이 늘어질 수 있는 광고를 어떻게 간결하게 만들지 고민 중이야.”
“모델을 써보면 어떨까?”
서인기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평소에 잘 의견을 내지 않는 편이라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카피는 최소화하고 20대부터 60대까지 세대를 대표할수 있는 모델을 세우는 거야.”
“모델료는 괜찮을까? 오히려 그 돈으로 S급 모델 한 명을 세우는 것이 나을 수도 있어.”
“S급은 찍으려고 하지 않을거야. 변비약이잖아.”
모델에 대한 여러 의견이 오가고 도혁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곤 노트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1, 2, 3차로 나눠서 광고 소재를 달리 가보자. 1차는 광고주 다큐멘터리에 더해서 유산균 관련 보도 자료 뿌리고 홍보에 집중, 2차는…….”
머리를 맞댄 신입1팀의 토론이 뜨거웠다.
점점 퍼즐이 짜 맞춰지고 거대한 그림에 맞춘 로드맵이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