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60화
“최 부장님 괜찮으시겠냐? 본인이 달라고 하긴 했지만 말이지.”
“변비약은 몇 알 안 드리고 유산균 드렸어요. 유산균도 효과가 좋으니까 하루 이틀은 화장실 들락거리시겠지만요.”
“하긴 바이플렉, 제품은 좋으니까. 그럼 그 좋은 제품 광고 짜내러 아이데이션 시작해 볼까?”
탁기준이 회의실로 신입1팀을 불러 모았다.
꼭 처음 인턴십을 하던 그날처럼 눈꼬리를 날카롭게 올린 채로 팀원들을 둘러보았다.
“자, 모두 모였지. 각오했겠지만 지금부터 지옥 레이스 시작이다. 자, 시장조사한 거 가져와 봐.”
“네. 선배님.”
한수철이 빠른 손길로 서류뭉치를 가져왔다.
“야. 한수철!”
“네. 말씀하십시오.”
“너는 내가 X으로 보이지? 어?”
평소의 장난기가 싹 걷힌 눈빛이었다. 회귀 전에 썩 많이 봐왔던 눈.
그의 말대로 진짜 지옥 레이스 시작이구나.
도혁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 이거 봐라. 대놓고 한숨을 쉬네? 명도혁! 내가 오냐오냐하니까 정신 못 차리지?”
“죄송합니다.”
“그리고 한수철. 이거 나 보라고 가져온 거냐? 천년만년 시장조사만 들여다보고 있을까?”
“죄송합니다. 선배님. 다시 해 오겠습니다.”
탁기준이 한 손으로 서류뭉치를 내던지며 소리쳤다.
“백 데이터 철저하게 준비하고 이거 요약해서 한 페이지로 보고서 만들어 와.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본진에서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한 탁기준은 분위기부터 달랐다.
그가 눈치를 보고 있는 제작 쪽 신입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전에는 내가 장난처럼 기획은 한수철만 남았으니까 혼자 해라, 그런 농담 했는데 그건 말 그대로 농담인 거 눈치껏 파악했겠지?”
“네. 그렇습니다. 선배님.”
“거기 카피, 디자인 지원자들. 이제 카피고 디자인이고 다 잊어버려. 여기선 모두 기획자다. 기획국 들어서는 순간 제작 지원자라는 거 머리에서 지워 버리길 바란다.”
“네. 알겠습니다.”
“디자인, 카피는 당연히 우리 기획국에서 안 뽑을 거야. 기획안 통과하는 대로 제작 1팀으로 넘겨 버리면 그만이니까. 총력을 기울여서 기획에 올인하도록. 너네는 전부 AE다. 명심해라.”
“네. 선배님.”
“그리고 광고주 미팅, 돌아가면서 참여한다. 필요하면 작은 광고주 PT는 직접 할 수도 있고.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신입들이 기합이 바짝 들어간 목소리로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럼 출장 나간 동안 기획 초안 정리해 놓도록.”
“초안 말입니까? 시장조사만이 아니구요?”
“그래. 기획 초안 완성해 놔. 원 페이지로 한 번에 알아먹을 수 있게. 이상!”
탁기준이 휘이 신입들을 둘러보며 문을 쾅 닫고 나갔다.
서인기는 탁기준이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걸 완전히 확인하고서야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와, 탁기준 선배 무섭네. 하긴 처음 인턴십 멘토로 들어왔을 때도 카리스마 쩔었지.”
“그러니까. 그동안 친하게 지내면서 잊고 있었어. 목이 타들어 가서 혼났어.”
그래, 나도 잊어버렸구나. 탁기준이 제작국 직원들 물고 다니던 미친개라는 걸.
도혁 역시 생수를 들이켜며 한수철이 만들어놓은 시장조사안을 들여다보았다.
“뽑아놓은 자료, 정말 많기는 많다. 제약 쪽이 좀 복잡하지?”
“맞아. 특히 변비약은 마땅히 눈에 띄는 광고가 없었어. 그리고 유산균은 건강기능식품으로 분류돼서 신문광고가 많더라고.”
“아, 어르신들 기사인 줄 알고 전화해서 구입하는 광고 말이야?”
신문사에 돈을 주고 하는 이른바 기사형 홍보가 가장 잘 먹히는 제품군이 바로 건강기능식품이었다.
아무도 안 속을 것 같지만 제법 매출이 좋은 편이다.
하지만 여기에만 의존하긴 좀 아쉬운데?
도혁이 손끝으로 테이블을 툭툭 치며 생각에 잠겼다.
최민아가 유산균 패키지를 가리키며 조금 아쉬워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패키지 디자인이 너무 옛날 스타일이야. 제품은 정말 좋은데. 효과가 빠르기도 하지만 속이 편하더라고.”
“맞아. 대표님이 이 유산균주 개발에 평생을 바쳤다고 자랑을 엄청 하시더라고.”
“디자인 너무 아쉽지만 어르신들이 타깃이니까 상관없겠지?”
테이블을 두드리던 도혁의 손가락이 순간 뚝 멈추었다.
“타깃이 어르신이다?”
“그렇지. 이 설명서랑 상자 생긴 걸 좀 봐. 너무 옛날 느낌 아니니?”
최민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패키지를 가리켰다.
“요기 제품 이름 써놓은 폰트 봐봐. 훈민정음인 줄 알았네.”
“민아야, 너 지금 손가락 간질거리지?”
“어떻게 알았어? 이 노란색 배경 명채도 손 좀 보고 폰트만 바꿔도 그림이 확 살겠구만.”
“하고 싶으면 해야지. 패키지 그려봐.”
“에이, 아까 탁기준 선배 눈빛 못 봤어? 너네는 AE야! 디자인할 생각하지 마! 어우, 그림 그리다가 들키면 뼈도 못 추릴걸?”
“괜찮아. 기획안에 넣을 그림이라고 하면 되니까. 내가 책임질게.”
“진짜지? 책임져야 돼. 난 그럼 패키지 디자인에 올인한다!”
“응. 욕 먹어도 내가 먹을 테니까 예쁘게 잘 만들어봐. 감각적으로 세련되게.”
“그럼 도혁 오빠 믿고, 오케이!”
신이 나서 빈 종이에 도안부터 짜보는 최민아를 보며 한수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겠냐? 탁 선배가 난리칠 텐데.”
“기획의 일환으로 디자인하는 거니까 그렇진 않을 거야. 물론 최민아를 책임지려면 제대로 된 기획안이 나와줘야겠지만.”
도혁이 노트북을 펼쳐 들었다.
* * *
끝없는 회의가 이어졌다.
신입들은 온종일 꼼짝도 하지 않고 회의실에 틀어박혀 머리를 맞대었다.
종이컵이 테이블 위에 가득 쌓여가고 서인기는 벽에 머리를 쿵쿵 박아대고 있었다.
변비약을 처음 먹은 날처럼 다크서클이 내려앉은 얼굴들이었다.
출장에서 돌아온 탁기준은 문을 열자마자 깜짝 놀랐다.
“이 자식들,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기준 선배님이 초안 잡아놓으라고 하셔서 죽어라고 머리 쥐어짜던 중이었습니다.”
“올~. 그래서 하루 만에 뭐 좀 나왔냐?”
탁기준이 기대에 찬 눈으로 테이블의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자, 그럼 좀비처럼 변할 정도로 회의한 결과물 한번 들어볼까? 누가 할래?”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서로 눈치를 보는 신입들 사이에서 도혁이 나섰다.
그리고 일단 약속한 책임을 졌다.
“먼저 아이데이션 과정에서 최민아는 제외해 주시길 바랍니다. 패키지 디자인을 하고 있어서요.”
“뭐? 왜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패키지야.”
탁기준의 눈썹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노려보는 날카로운 눈빛에 최민아가 마른침을 삼켰다.
“기획안에 꼭 필요한 부분이라서 유산균 제품 패키지 손보고 있습니다. 제가 부탁했어요.”
“일단 들어보지. 말해봐.”
탁기준이 팔짱을 끼며 도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부담스러운 눈빛이었지만 도혁은 꿋꿋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시장조사 결과 아직 변비약 시장에는 이렇다 할 대표 광고도, 제품도 없습니다. 약국에선 변비약을 찾을 뿐 특정 제품의 이름으로 구매하지 않는다는 거죠. 따라서 이번 캠페인이 성공하면 선발 주자가 될 것으로 판단됩니다.”
“알겠지만 선발대는 광고 시장을 개척해야 하는 부담이 있어.”
“하지만 선점이 그만큼 큰 이익을 가져다줍니다. 후발 주자들이 광고해서 시장을 넓혀주는 만큼 1등 기업은 반사이익을 받아먹으면 되니까요.”
“그렇지. 하지만 시장을 만드는 데는 그만큼 돈이 들잖아? 기존에 존재하는 광고판에 숟가락 얹는 거랑은 차원이 달라.”
“제왕이 되려면 왕관의 무게는 견뎌야죠.”
짧게 끄덕인 탁기준의 눈썹이 순간 움찔했다.
“무엇보다 선배도 알다시피 기회가 굉장히 좋습니다. 다행히 제품력이 좋고 그 제품력을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통해서 광고할 예정이니까요.”
“그건 맞아. 바이플렉 대표는 민망하다면서 출연을 고사하려 했지만, 돈 주고도 못 얻을 기회긴 해.”
“그렇습니다. 그 프로그램을 통해 소비자들은 제약 제품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를 취득할 겁니다.”
“여기서 잠깐. 서인기, 도혁이가 말하는 제약 제품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가 뭔지 알아?”
“그럼요. 지금까지 회의했는데요. 제품의 신뢰도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 장편한 아침의 최고 강점인 생약 성분의 변비약을 만드는 공정을 공중파 방송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
탁기준이 몸을 앞으로 세우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하루 종일 틀어박혀 있더니 뻘짓한 건 아니네. 명도혁이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는 줄 알았더니.”
“저희 모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한수철이 큰 소리로 외치고 나머지 팀원들도 고개를 주억였다.
도혁은 기세를 이어 노트북을 펼쳐 들었다.
“여기 백 데이터 정리 자료입니다. 해외 사례까지 끌어모아서 제약 광고 Case Study 진행 중입니다. 괜찮은 광고가 많더라구요.”
“좋아. 그럼 다음 진도로 넘어가 보지. 메인 타깃은?”
“그게 지금 우리 최민아 씨가 패키지를 그리는 이유입니다.”
뜻밖의 대답에 탁기준의 눈이 커졌다.
“광고주한테 말하듯이 툭툭 카피처럼 던질 거야? 지금 나한테 PT하냐?”
“저희한테는 광고주보다 탁기준 선배님이 더 무서운데요? 더 중요한 컨펌처럼 느껴져서 떨고 있습니다.”
“웃기시네. 하나도 안 무서워하면서.”
탁기준의 권위를 은근히 세워주자 그가 피식 웃으며 도혁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침에 각 좀 잡았다고 이러는 모양인데, 그냥 편하게 말해.”
“네. 계속하겠습니다. 일단 삼 단계로 로드맵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어쭈, 그사이 삼 단계 로드맵을 다 짜셨다? 내가 직접 보도록 하지.”
도혁의 말에 탁기준의 눈동자에 장난기가 걷혔다.
노트북을 돌려 모니터를 제 앞으로 가져온 탁기준이 놀라며 말했다.
“이거 캠페인 규모가 너무 커지는데?”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랬다고, 대표가 공중파 다큐 프로그램에 메인으로 출연하는데 이 기회를 놓치긴 좀 그렇지 않습니까?”
“어라, 이건 뭐야. 유산균이랑 변비약 광고 같이 간다고? 건강기능식품은 신문이 강세야.”
“아직은 그렇죠.”
“아직은, 이라니?”
도혁은 이 지점에서 설명하기 상당히 갑갑한 것을 느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건강기능식품, 특히 유산균은 다양한 연령대에서 큰 사랑을 받는 제품으로 부각된다. 물론 아직은 아니었지만.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에 따른 트렌드의 변화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조금 답답했다.
다행히 아이데이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한수철이 거들어주었다.
“두 제품 모두, 특히 유산균은 메인 타깃을 논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제품입니다. 어린아이부터 중고생, 그리고 술을 많이 드시는 직장인, 다이어트하는 여성분, 심지어 노년층까지 모두 어필할 수 있는 제품군이죠.”
“그래서 내가 메인 타깃을 물어본 거야. 우리 신입1팀은 어떻게 특정 지었는지 궁금해서.”
탁기준의 말에 도혁과 한수철이 동시에 마주 보았다.
그리고 도혁이 천천히 질문에 대답했다.
“메인 타깃은 없습니다.”
“뭐? 메인 타깃이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