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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천재 명도혁-58화 (58/252)

광고 천재 명도혁 58화

잔인한 아침이 밝았다.

대학생의 여유를 즐겼던 어젯밤과 달리 태강애드 기획1팀의 아침은 한마디로 ‘들락날락’이었다.

“와, 이거 효과가 대박인데? 어제 세 번 먹었는데 화장실을 몇 번 갔는지 몰라.”

“유산균도 그래. 잠시만, 내가 먼저 화장실 가면 안 될까?”

“으읏. 비켜봐!”

신입들이 번갈아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고, 탁기준은 그걸 바라보며 느긋하게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선배님, 이 변비약 효과 빠른 거 알고 계셨죠?”

“그럼. 나도 먹어봤지. 남용하면 큰일 나겠던데, 한두 번은 시원하고 괜찮더라고.”

“아주 장이 싹 비는 느낌이 들죠.”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도혁을 보고 탁기준이 의아해했다.

“변비약 먹어본 거야? 지금 먹은 거 같진 않은데.”

“먹지는 않았지만 저도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어제 과음을 해서요.”

“오호! 술이라. 기획1팀에 들어올 자세가 됐구만.”

“네?”

“아무것도 아니야. 화장실 다녀오라고.”

의미심장하게 입매를 늘이는 탁기준이 찜찜했지만 화장실로 발을 돌렸다.

남자 화장실에선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온 신입1팀 남자들이 손을 씻고 있었다.

“이건 미친 약이야. 어떻게 이렇게 빨리 신호가 오지?”

“변비가 심한 편이었어?”

“그렇긴 하지만 와. 어젯밤에도 화장실 들락거렸거든.”

“대박이지?”

아무튼 모두 각자의 볼일을 마치고 기획팀 회의실에 모였다.

탁기준이 테이블에 놓인 제품을 뒤적거리며 피식거렸다.

“제품력 확인은 잘하고 왔냐?”

“죽을 만큼 하고 왔습니다.”

“효과 정말 빠르던데요.”

“저는 몸무게까지 줄었다니까요?”

몸무게가 줄었다는 한수철의 말에 모두 웃음이 터졌다.

“한수철 어지간히 무겁게 짊어지고 다녔나 보네.”

“그러니까. 참, 유산균 먹은 사람은 없어? 변비 없는 사람들은 유산균 먹었을 거 아니야.”

“내가 먹어봤어.”

카피라이터 강시원이 양손을 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산균도 효과 대박이야. 잠깐 부글거리더니…… 완전…….”

“너무 자세히 묘사하지 마라? 어?”

최민아가 눈살을 찌푸리며 눈치를 주었다.

탁기준이 유산균 패키지를 만지작거리며 설명을 보탰다.

“참편한 저녁 유산균 제품은 장내 유익균의 균형을 맞춘다고 하더라고. 변비 있는 사람은 처음엔 좀 부글거리는데 곧 괜찮아진대. 장기 복용하면 장 건강에 도움이 되는 제품이야.”

“반면 장편한 아침은 급할 때 쓰는 변비약이군요? 완전히 막혔을 때.”

도혁은 다이어리에 두 제품의 차이점을 적은 후 생각에 잠겼다.

“강점은 일단 효과가 빠르다는 거고.”

“정말 빨라. 진짜 1㎏정도 줄었다니까?”

“부작용은 없었어?”

“아직은 딱히 없어. 화장실 못 가는 상황에서 먹으면 큰일 난다는 것 정도지.”

효과 빠른 변비약과 역시 효과가 빠른 유산균. 하지만 유산균은 장기 복용이 가능하다.

도혁이 탁기준에게 광고주에 관해 물었다.

“광고주는 둘 중에 어느 쪽을 주력으로 밀고 싶어 해요?”

“아무래도 장편한 아침이라고 하더라고. 보다시피 효과가 워낙 즉각적이라서 광고 효과도 빠를 거라고 믿고 있어. 참편한 저녁은 약이 아니니까 그렇게까지 빠른 효과를 보긴 힘들겠지?”

“그래도 광고주는 참편한 저녁에 애착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맞아. 평생 연구한 제품 중에도 단연 최고라고 입에 침이 마르더라. 브리핑 내내 유산균 자랑을 얼마나 하던지. 균주가 어떻네, 유산균이 몇백만 마리네, 장내세균을 아주 진심으로 사랑하는 분이야.”

“혹시 언제 또 바이플렉 들어가시나요. 가실 때 저도 같이 대표님을 한번 만나 뵐 수 있을까요?”

도혁의 말에 탁기준이 잠깐 생각에 잠겼다.

“보통은 기획안 나오면 다시 들어가기는 하는데. 왜, 가보고 싶어?”

“근처에 왔다가 잠깐 들렀다고 하면 되지 않을까요? 인사나 드리러 왔다고.”

“내가 일정 한번 알아볼게. 뭐 짚이는 거라도 있냐?”

“네. 감도 없이 광고주 만날 만큼 우리가 한가하지는 않잖아요?”

“이 자식. 또 국장처럼 말하지. 어?”

탁기준은 구박하면서도 눈동자에 기대가 서렸다.

도혁은 빠르게 회의를 정리했다.

“일단 기초 자료부터 준비하자. 변비약, 유산균 시장 상황과 제품 분석, 그리고 해외 광고 동향 파악부터 진행하면 되겠어. 사흘이면 되겠지?”

“이제 AE라고는 나 혼자뿐인데, 설마 혼자 기획 쪽 다 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한수철이 볼멘소리를 하자 최민아가 장난을 쳤다.

“당연한 거 아니야? 다 각자의 역할이 있는데. 원래 자료 조사랑 기획안, PPT, 발표까지 다 기획팀 일이잖아.”

“와, 최민아. 이렇게 나올 거냐?”

“왜, 우리 한수철 유능하잖아.”

“진짜 이럴 거냐?”

낭패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한수철을 탁기준이 격려해 주었다.

“그래도 광고주는 명도혁이 만나준다고 하잖아? 나도 도와줄 거고.”

“선배님, 진짜 저 혼자 해야 합니까?”

“그럼. 그게 회사의 숙명이지. 기획국 사람 사표 냈다고 제작국 직원 데려올 수 있나?”

탁기준은 장난처럼 말했지만 뼈를 심은 말이었다.

실제로 저런 일이 비일비재하거든.

각 국 결원에 맞춰서 공평하게 채용해도 이상하게 기획이나 제작, 한쪽으로 직원이 쏠리는 경향이 있다. 지금 신입1팀처럼 말이다.

혼자 난감해하는 한수철에게 도혁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모두 말은 그렇게 해도 도와줄 거야. 나도 마찬가지고. 일단 내가 광고주 만나고 와서 타깃팅 회의할 때까지 수철이가 주도해서 기초 자료 조사 진행하면 될 것 같아.”

“그래. 역시 명도혁밖에 없다! 내 친구. 구세주. 도혁아!”

“징그럽게, 떨어져라. 야! 가까이 오지 마!”

오글거리게 안겨오는 한수철을 겨우 떼어내는 걸 보고 모두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곧 팀원들은 웃지 못하게 되었다.

다시 신호가 온 것이다.

“저기, 화장실 좀…….”

이래저래 바쁜 기획1팀의 첫날이었다.

* * *

금요일 오후, 바이플렉 코리아와의 미팅이 잡혔다.

“어우, 명도혁, 그렇게 입으니까 제법 AE 같은데?”

“이번에 시상식 참석하려고 슈트 장만했죠.”

“금요일에 미팅이 잡혀 버려서. 도혁이는 광고주 만나고 데이트 가면 되겠네.”

“여자 친구 없습니다.”

도혁이 씁쓸하게 웃으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운전하던 탁기준이 의외라는 듯 돌아보았다.

“어! 명도혁 여친 없어? 인기 많아 보이는구만.”

“인기가 없지는 않습니다만, 마음이 안 가서요.”

간혹 도서관이나 강의실에서 말을 걸어오거나 쪽지를 건네는 여학생도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명도혁, 잘 생각해. 대학 때 연애 안 하면 언제 하냐. 나중에 크게 후회해요.”

“어릴 때 만난 여자랑은 끝까지 못 만나잖아요. 결국은 마음에 여유가 있을 때 만난 사람이랑 결혼하게 되더라구요.”

“쪼끄만 게 별소리를 다 하네. 결혼은 무슨.”

탁기준이 결혼이라는 말에 코웃음을 치며 도혁을 돌아보았다.

“이 자식 보기보다 실용적이네. 결혼할 여자 아니면 연애도 안 하시겠다?”

“낭비 같아서요. 끝까지 갈 여자한테만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아내의 얼굴을 애써 떨치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물, 상처, 이혼 그리고…… 꼬리를 무는 상념에 침묵하자 탁기준이 의아해했다.

“연애도 안 한다는 자식이. 너 지금 실연당한 얼굴인 거 아냐?”

“그런가요. 후우. 선배, 바이플렉 다 왔습니다. 둥그런 지붕, 저 건물이죠?”

“그래. 다 왔네. 내립시다.”

가라앉은 마음을 애써 정돈하고 옷매무시를 바로잡았다.

기획국에 있는 동안 광고주 미팅에는 최대한 참석할 생각이었다.

기획국의 핵심은 영업이기에 탁기준을 악착같이 따라다닐 생각이었다.

공장에 붙어 있는 바이플렉 사무실은 초라할 만큼 소박했다.

제법 괜찮은 규모의 중견 기업인데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표실 역시 마찬가지였다.

낡은 대표실의 문을 두드리자 배가 불룩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옆집 아저씨 같은 인상의 대표가 밖으로 나왔다.

작업복 차림에 워낙 소탈한 인상이라 회사 안에서 지나쳤으면 대표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을 것이다.

“이쪽으로 오시죠. 오늘은 한 분 더 오셨네요.”

“안녕하십니까. 명도혁이라고 합니다.”

“잘 오셨습니다. 이태호라고 합니다. 이거 사무실이 누추해서 민망합니다.”

“별말씀을요. 이게 다 연구비에 모든 걸 쏟아부으시는 대표님 성향 때문 아니겠습니까. 잘 지내셨지요, 대표님?”

탁기준과는 나름대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 듯 보였다.

도혁은 이 대표가 직접 타준 믹스커피를 마시며 빠르게 대표실 안을 훑어보았다.

그가 속한 공간을 보면 성향을 대충 파악할 수 있었으니까.

정말 소박한 실내였다. 책상과 의자, 테이블에 작은 냉장고 정도가 전부인 작은 사무실.

다만 벽장에 가득 상과 상패를 전시해 둔 게 인상적이었다.

그중 한가운데 놓인 대통령상과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이 눈에 띄었다.

이럴 때 유능한 AE라면 한마디 해야 하는 거겠지?

“대통령상도 받으셨나 봅니다. 대통령이 직접 수여하셨네요.”

“이례적인 경우라고 하더라구요. 청와대까지 가서 상을 받았습니다. 이런 말 제 입으로 하긴 좀 그렇지만, 우리 바이플렉이 유산균 쪽으로는 세계 정상급이라고 자부합니다.”

“유산균이라면 참편한 저녁 제품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유산균의 효능은 다 말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합니다…….”

이때부터 제품 자랑이 시작되었다.

저 수많은 상장과 상패는 자랑을 위한 빌드업이라고나 할까.

이 기나긴 광고주의 자랑을 흐트러짐 없이 경청해야 하는 거구나.

탁기준은 마치 시청률 1위의 예능을 보는 듯 흥미로운 표정을 유지한 채 광고주의 말에 하나하나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탁기준을 보며 또 하나 배워간다.

덕분에 광고주의 자랑은 점점 길어지고 있었지만.

“복부팽만, 설사, 변비, 가스, 더부룩함, 전부 증상은 달라도 이유는 하나입니다.”

“장내 유익균과 유해균의 균형이 깨져서 그렇단 말씀이시죠?”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어린이 항생제 남용, 심각한 수준입니다. 그 항생제가 유해균만 잡아먹는 게 아니에요!”

“맞습니다!”

확실히 광고주는 변비약보다는 유산균에 완전히 꽂혀 있었다.

차라리 이쪽으로 광고 방향을 돌려볼까, 고민을 하며 영업 미소를 계속 짓고 있었다.

억지 미소에 끌어올린 입꼬리가 점점 한계에 달해 부들거리기 시작할 때쯤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서 나타난 구세주인지 고맙기 이를 데가 없었다.

“대표님, 어머, 손님이 계셨네요. 죄송해요.”

“어이구,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우리 탁기준 씨랑 얘기하다 보면 이렇게 정신을 놓고 말하게 된다니까요.”

대표와 얘기를 나누는 여자를 무심코 돌아본 도혁은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했다.

“어? 여긴 어쩐 일이야?”

“어? 명도혁. 너야말로 여기서 뭐 하고 있냐?”

“두 분 아는 사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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