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57화
-툭
탁기준이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입꼬리가 사악하게 말려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도혁은 거친 손길로 머리카락을 툭툭 털어내며 박스를 노려보았다.
바이플렉 코리아에서 출시한 초강력 변비약.
신규 때 제품 분석한답시고 저걸 먹곤 일주일 내내 고생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때 아마 변비 있는 사람 손 들라고 해서 들었다가 그 고초를 겪었었지.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며 고생한 결과 현대인의 고질병이라는 치질까지 걸릴 뻔했단 말이다.
회귀하고서 시간이 꼬이더니 이렇게 일찍 바이플렉 코리아를 만날 줄이야.
도혁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공포의 브랜드명이 탁기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장편한 아침. 어때, 네이밍 마음에 들어?”
“장편한 아침. 변비약인가 보네요.”
디자이너 서인기가 패키지에 그려진 대장 그림을 유심히 바라보며 물었다.
순진한 신입들이 눈빛이 반짝거리는 걸 보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바이플렉 코리아에서 이번에 장편한 아침이라는 생약 성분의 변비약을 출시했어. 중견 기업이고 재무가 탄탄한 회산데 아쉽게도.”
“아쉽게도 대표 제품이 없군요.”
“그렇지. 명도혁. 역시 딱 집어내는구만.”
“바이플렉은 다른 기업 대상으로만 계속 사업을 하면 좋겠습니다. 전문의약품 만드는 업체에서 왜 이렇게 욕심을 내는 겁니까.”
“뭐야, 명도혁. 자세히도 알고 있네. 주변에 의사나 약사 있어?”
“아, 아닙니다.”
변비약을 보는 순간 당황해서 너무 많은 정보를 말하고 말았다.
도혁은 서둘러 말을 돌리며 탁기준을 바라보았다.
“그냥 의학 분업에 관심이 있어서 그 당시 기사를 자세히 봤을 뿐입니다. 바이플렉은 전문의약품 위주로 생산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맞아. 근데 그럴수록 지명 구매(이름을 말해서 제품을 사는 것)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더라고. 제약 쪽은 특히 지명 구매에 집착하는 회사가 많아.”
“하긴. 대표 상품이 있으면 영업하기 편한 부분도 있으니까요.”
“빙고. 그래서 말인데. 바이플렉 대표가 이 변비약 장편한 아침을 간판 제품으로 밀고 싶어해.”
하. 피할 수 없는 가혹한 현실을 직감했다.
신이시여. 시간을 뒤죽박죽 섞으시더니 이렇게 바이플렉을 일찍 만나게 하시다니요.
도혁은 숨을 한번 훅 내쉬고 박스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속에는 뜻밖의 제품이 함께 들어 있었다. 처음 보는 이름의 제품이었다.
“참편한 저녁? 이건 또 뭡니까?”
“참 유산균 제품이야. 장편한 아침의 자매품이라는데 이것도 효과가 좋다고 하더라고. 대표님이 사실 이 제품에 더 애정이 있다고 하시면서 같이 주셨어.”
“자매품이라구요?”
도혁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신입 사원들의 희생을 딛고 장편한 아침 캠페인은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생약 성분을 강조한 전국 광고로 변비약 광고의 붐을 일으켰다고나 할까.
그 뒤로도 쭉쭉 변비약 론칭이 줄을 이었고, 그 후광을 입고 선두 기업으로서 바이플렉 코리아는 우뚝 서게 된다.
하지만 유산균이 함께 있다면?
얽힌 시간의 타래 속에서 새롭게 변형된 과제를 받아 든 느낌이었다.
도혁은 생각에 잠긴 채 두 제품의 설명서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탁기준이 신입들에게 제품을 돌리며 설명을 이어갔다.
“자, 일단 제품 구경 열심히들 하시고. 내가 메일로 회사 연력이랑 제품 소개 간단히 적어서 뿌릴 테니까 참고해.”
“넵! 알겠습니다.”
“메일 분석하고 각자 조사해서 기획안을 한번 잡아 와봐.”
“각자요?”
“맞아. 팀으로 말고 각자. 개인 기획 역량 파악해서 앞으로 업무에 참고하게. 디자이너들도 얼렁뚱땅 넘어가지 말고. 기획을 이해하지 못하는 광고 디자인은 그냥 그림일 뿐이니까.”
“네! 선배님.”
모두 다이어리를 챙겨 들고 일어설 때였다.
“잠시만. 제품은 가져가야지.”
“아, 가져가도 되는 겁니까?”
“당연하지. 내가 패키지 구경하라고 가져왔겠냐? 제품부터 써봐야 한다고 누누이 말해줬는데.”
“의약품인데 함부로 먹으면 안 되죠!”
도혁이 냉큼 막아서자 탁기준이 유산균 제품을 내밀었다.
“유산균 있잖아. 유산균. 그리고 변비 있는 사람 없어? 이거 일반 의약품이야. 약국에서 변비약으로 팔고 있는 거라고.”
“저 변비에요. 한번 먹어볼게요.”
최민아가 손을 들고 나섰다.
도혁은 전생에 제 모습이 겹쳐 보여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렸다.
변비를 퇴치해 보겠다며 자진해서 나선 과거의 나를 혼내주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해 최민아를 말려보았다.
“저기, 민아야. 잠시만. 다시 생각해 봐.”
“왜, 뭐 어때. 어차피 제품력 확인도 해야 하잖아. 먹어봐야 어떤 점이 좋고 어떤 점이 불편한지 알지.”
“그렇지! 최민아. 역시 자세가 됐어.”
“그럼 나도 먹어볼까? 장단점 파악해야 하잖아.”
탁기준이 최민아의 맞장구를 치자 신입들이 하나둘 나서서 변비약을 챙겨가기 시작했다.
“야! 약은 함부로 먹고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에이, 명도혁. 약한 모습! 변비가 있다니까 그러네.”
“아니, 내가 약하고 그런 게 아니라고. 야! 다들 조심해서 나쁠 게 없어. 제발 어른이 말하면 좀 들어라. 어?”
“어른 같은 소리 하네. 사나이답게 나도 좀 가져가야겠어. 선배님 두 팩 정도면 되겠습니까?”
“당연하지. 여기 두 팩! 더 받아라!”
탁기준이 멀찌감치 앉은 서인기에게 변비약을 던지며 환영을 표했다.
“자, 그럼 약들 잘 챙기고 기획국 인사 돌러 가자. 웰컴투더 헬. 신입1팀 여러분, 기획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태강애드 극강의 업무 강도를 자랑하는 기획국에서 겨울방학 신입 업무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헬 게이트의 문이 열렸다.
* * *
본격적인 겨울방학. 그리고 본격적인 신입 업무에 올인하기 전 도혁은 애드포인트를 찾았다.
기말고사도 완전히 끝나고 캠퍼스는 제법 한적했다.
제법 쌀쌀해진 바람을 가르며 오랜만에 한가로이 교내의 길을 가로질러 걸었다.
멀리서 이진우가 도혁을 보고 달려왔다.
“선배님! 시험 다 끝났죠? 동아리방 가십니까?”
“어. 너도?”
“네. 참, 이 잡지 혹시 아십니까?”
이진우가 손에 든 잡지를 보여주었다.
“오늘 대학이라고 들어보셨죠? 여기서 동아리로 연락이 왔데요. 우리 애드포인트 공익광고 대상 팀을 촬영하고 싶다구요.”
“그래? 강태오 선배가 전화 받은 거야?”
“네. 아마 수락하셨을 거예요. 우리 동아리에 인물 좋은 명배우 한 명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걸 들었거든요.”
“아, 태오 선배. 못 살겠다.”
어이없는 한숨을 뱉으며 동아리방 문을 열었다.
동아리방 테이블에는 제법 멀끔해진 강태오와 3학년 선배들이 모여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들.”
“저기, 오시네. 명배우님.”
“태오 선배. 오글거리게 왜 이러세요. 오늘 대학에서 연락 왔다면서요. 수락하신 겁니까?”
“그래. 시간 되지? 언제 우리가 표지 모델 할까 싶어서 하겠다고 했지. 이야. 오래 살다 보니까 별일을 다 겪는다.”
“선배, 내가 타임지 표지에도 나오게 해줄까요?”
도혁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 타임지 표지 장식.
그걸 같이하자고 강태오에게 제안한 거다. 꿈은 클수록 좋은 법이니까.
“명도혁 너랑 일하면 타임지 인터뷰 할 수 있는 거냐?”
“네. 꼭 나오게 해드릴게요.”
“이 자식 자신감 하나는 인정이다.”
“진짠데요.”
농담처럼 진담을 던지며 도혁이 미소 지었다.
그리고 선배들이 모여 있는 풍경 속에서 한 사람을 떠올렸다.
광고 천재 차현우. 정말 타임지의 표지를 장식했던 명도혁의 우상 말이다.
“선배님들, 혹시 현우 선배 소식 아시는 분 있습니까?”
“아, 현우? 우리랑도 연락 잘 안 해. 태오 넌 통화하고 사냐? 너하곤 제법 친했잖아.”
“나 며칠 전에 전화해서 안부만 잠깐 물었어.”
강태오가 인상을 찌푸리며 생수를 들이켰다.
“나름대로 절친이었는데 현우 이 자식 연락도 없어서 연락 한번 해봤지.”
“현우 선배 어떻게 지낸대요?”
“뭐 그냥저냥 살아는 있나 봐. 동생들이 많고 뭐, 집안 형편이 안 좋아서 노가다 일 다닌다고 하더라고.”
“아……. 그렇구나.”
“경기도 어디 건설 현장이라고만 하더라.”
선배들의 한숨이 깊어졌다.
차현우에게 재능이 있다는 건 한두 번만 함께 아이데이션을 해보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한 가지 아이디어를 백 가지로 만드는, 그리고 그 속에서 가장 적절한 기획을 뽑아내는 탁월한 능력이 있는 타고난 마케터.
언젠가 명도혁에게 가장 필요한 인물이 될 것이다.
도혁은 그의 생각에 한숨을 내쉬며 동아리 벽에 붙은 게시판을 들여다보았다.
“정말 전국에 공모전이 엄청 많네요.”
“일 년을 쭉 놓고 보면 정말 많지? 왜 명도혁 또 공모전 참가하게?”
“네. 나름대로 재미도 있고 상금도 많고. 일석이조더라구요. 태오 선배, 같이하시죠.”
“악! 태오는 안 돼!”
선배들이 소리를 질렀다.
또 거지꼴로 동아리방을 떠도는 귀신을 보긴 싫다고 난리가 났다.
“그래도 태오 선배를 빼놓고 할 수는 없어요. 장차 타임지 표지를 장식할 아트 디렉터가 되실 몸인데요.”
“이야. 우리 도혁이가 이렇게 띄워주는데 당연히 나도 같이해야지. 내가 겨울방학 전부 반납하고 공모전에 올 인한다.”
“콜! 선배 콜한 겁니다! 무르면 안 돼요.”
“당연하지. 사나이 강태오, 한 입으로 두말 안 해. 그럼 내일부터 다시 동아리방에 자리 좀 펴볼까?”
강태오가 동아리방 구석에 마련된 온돌에 몸을 뉘며 아저씨처럼 감탄사를 뱉었다.
“어이구 뜨끈하고 좋네. 집에 갈 이유가 없어!”
“아! 강태오!”
도혁이 원성을 퍼붓는 선배들을 잠재우려 중국요리와 소주를 시켰다.
“오늘은 제가 쏘겠습니다. 공모전 두 개나 상금 탔잖아요. 시간 되시는 분은 늦게까지 같이 드시죠.”
“오! 그럼 우리 오랜만에 동방에서 밤 좀 새워볼까?”
“좋습니다. 해 뜰 때까지 드시고 배려 좀 해주세요. 우리가 겨울방학에도 동아리방 좀 쓰겠습니다.”
“그래. 뭐 어차피 방학 땐 동아리방이 비니까. 그리고 이 미친 강태오도 어차피 집에 잘 안 들어가잖아.”
“미치지는 않았어. 안 씻어서 그렇지.”
“어이구, 더러운 건 잘 아네.”
투덕거리는 선배들을 보고 있으니 차현우 선배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
저기 같이 앉아서 광고 카피 같은 말들 툭툭 뱉곤 했는데.
말수가 적어도 센스가 넘치는 그의 촌철살인에 모두 감탄하곤 했었다.
빨리 상금을 모으고 조그만 사무실이라도 열어야겠다는 마음이 다시 솟구쳤다. 큰 자본이 드는 일은 아니니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향상심에 심장이 불끈거렸지만 도혁은 마음을 잠깐 내려놓았다.
오늘 밤만큼은 오랜만에 소박한 대학생으로서의 즐거움을 만끽하려고 한다.
아무튼 기말고사가 끝났고, 겨울방학이었으며 곧 몰아치는 공모전과 기획국에서의 빡빡한 신입 업무가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미친 듯이 몰아칠 겨울의 혹독함을 이길 전야제를 맞이한 기분이었다.
도혁은 유리잔 가득 콸콸 소주를 들이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