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55화
“파이팅!!!”
놀랍게도 교체해서 들어온 선수는 태강애드의 수장, 김철준이었다.
보통 광고 회사 대표들은 이런 행사에 얼굴이나 비치고 가는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매체국장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직접 뛰어든 것이다.
긴급한 상황에 투입된 김철준의 눈빛이 비장하게 굳었다.
‘하아, 설마 구멍 마이 볼의 재등장은 아니겠지?’
걱정하던 도혁의 눈앞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어이! 저쪽으로!”
“모두 정신 차려! 자자, 할 수 있어. 파이팅!”
주장 완장을 차고 들어온 김철준이 파이팅을 외쳤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듀스! 14:14! 듀스야!!”
순식간에 전세를 역전해 듀스를 만들어 버렸다.
구멍을 메운 김철준 대표, 그는 신이었다. 족구의 신.
바람처럼 날아들어 번개같이 공을 차며 족족 공격을 성공시켰다.
파죽지세로 몰아붙이는 태강애드의 공격에 대일기획 팀의 팀워크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야 씨, 정신 차려!”
“죄송합니다.”
“똑바로 앞을 보라고! 야, 이 자식아!”
상대 팀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오고, 도혁은 승리를 직감했다.
김철준은 원래의 성격대로 더 집요하게 끝까지 몰아붙였다.
“최종 스코어 3대0. 태강애드의 승리입니다!”
경기 초반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압승이었다.
신이 난 김철준이 선수들과 하이 파이브를 하고 벤치로 들어왔다.
그를 향한 직원들의 찬사가 쏟아졌다.
매체국장은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대표님!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대단하세요! 와, 공격하실 때마다 대일기획 선수들 우르르 넘어지는데 어찌나 통쾌하던지요.”
지금까지 체면 때문에 한 번도 경기에 직접 뛴 적은 없었단다.
하지만 이번에는 들어오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매체국장의 부상 투혼에 발가락이 간질거려서 말이지.”
그럴 리가. 대일애드 때문이겠지.
김철준의 승부욕을 아는 도혁과 직원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매체국장의 아부는 계속되었다.
“대한민국 아마추어 족구의 생태계를 교란하는 수준이었습니다. 혹시 선수 생활하셨습니까?”
“프로라기보다는 조상이지.”
김철준이 광고 카피 같은 말을 뱉으며 물을 벌컥 삼켰다.
“내가 족구의 진원지 공군 11전투비행단 출신이야! 거기서도 에이스였다고!”
“족구의 진원지, 11전비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우리 11전비에서 족구가 처음 생겼다는 전설, 다들 들어봤지? 활주로에 줄 그어놓고 딱 족구 룰 만들어서 시작한 게 그러니까, 일천구백육십육 년도에…….”
김철준이 족구의 역사를 읊으며 시원하게 웃어젖혔다.
“이거 오랜만에 기분이 아주 좋구만. 이 뒤 게임은 알아서들 하고 족구 팀은 나 따라와. 오늘은 사비로 한턱 크게 쏘지.”
“감사합니다. 대표님!”
그날 족구 팀은 한풀이하듯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
마치 경쟁 PT에서 승리라도 한 듯 자축에 신이 난 술자리였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공군 11공군전투비행단에서 병장으로 만기 제대한 김철준은 그렇게 광고계의 족구왕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 * *
오랜만에 신입 팀이 모였다.
탁기준 선배가 의뢰한 매체 계획안의 초안 작성을 위해 오랜만에 신입1팀을 호출한 것이다.
“기준 선배가 천천히 하라고는 했지만 이번 주에는 마무리를 해야겠어.”
“그러니까. 공모전에 기말고사, 체육대회까지 겹쳐서 정신없었어. 난 완전히 까먹은 거 있지?”
도혁은 매체 계획안을 짜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렸다는 한수철을 보곤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다른 애들은 아직 안 온 거야?”
“AE들은 선배 따라 광고공사 들어갔고, 디자이너들은 저기 오고 있네.”
“명도혁! 한수철! 이야, 오랜만이다. 대상 탄 거 축하하고!”
최민아가 둘을 보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신입들은 매체 팀 여기저기 흩어져 선배들의 일을 돕고 있어서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는 건 꽤나 오랜만이었다.
“광고공사 들어간 애들은 오려면 멀었어?”
“거기야 뭐, 기약이 없지. 공사는 들어가 봐야 알잖아.”
“매체도 그렇지.”
도혁의 뚝 끊어진 말에 팀원들이 무슨 말이냐는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광고 걸어봐야 매체가 제대로 들어갔는지 알 수 있다고.”
“하긴. 비싼 매체비 감수하면서 S급 시간대 들어갔는데, 프로그램 폐지되는 경우도 허다하니까.”
“맞어. 매체국 선배들 따라다녀 보니까 시간대가 전부는 아니더라고. 타깃만 잘 맞으면 C급이 더 나을 때도 있다니까?”
신입들이 매체국에서 헛시간을 쓴 건 아닌가 보다. 디자이너까지 저런 말을 할 정도면 말이다.
하지만 미래의 프로그램 폐지 정도는 가뿐하게 기억하고 있는 도혁은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공중파 광고만을 말한 것이 아니었다.
도혁은 그동안 구상해 왔던 매체 계획을 설명하기 위해 기획안을 펼쳤다.
“일단 광고주는 중견 건설 기업이고 쇼핑몰 론칭을 준비하고 있어.”
“어? 잠시만 여기 준공일이 좀 미뤄졌네?”
“그러니까 천하의 탁기준 선배가 매체안 가져오라고 압박하지 않겠지? 지금 사업이 난항을 겪고 있으니까 당장 들이대긴 그럴 거고, 시간을 두고 영업하려고 준비하는 중일 거야.”
“이 사업 엎어질 수도 있는 거지?”
“그렇지는 않을 거야.”
“그걸 어떻게 아냐! 이런 쇼핑몰 사업 삽도 못 뜨고 엎어지는 경우 많잖아.”
한수철이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지만, 그 쇼핑몰은 잘 지어질 예정이다.
회귀 전에 천호동 랜드마크였으니까. 건설 시행사도 그대로였고.
다만 그걸 말할 수는 없어 도혁은 눈썹을 잠깐 말았다.
“엎어지든 말든 우리가 신경 쓸 일은 아니고. 우린 매체안만 잘 제안하면 되니까.”
“하긴. 그건 그래. 사업에 대해 고민할 일은 아니지.”
“그럼 시작해 볼까? 민아는 디자이너니까 트렌드에 민감하잖아. 이 지역에 패션 쇼핑몰을 열면 어떨 것 같아?”
“난 사업성이 있다고 생각해. 내가 어릴 때 천호동 살았는데, 그땐 엄청 변두리였거든. 근데 세상에, 얼마 전에 친구 만나러 갔는데 완전 다른 동네가 됐더라고.”
“맞아. 강동 쪽으로는 쇼핑몰, 백화점, 계속 들어설 거야. 돈 있으면 땅이라도 좀 사놓든가.”
사실은 뼈가 되는 진담이지만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대학생인 팀원들이 도혁을 보고 어이없어했다.
“커피 먹고 죽을 돈도 없구만, 땅은 무슨.”
“말이 그렇다는 거지. 강남땅 살 돈은 더 없을 거 아니야.”
“으이구,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기획안 안에 있는 조감도 느낌은 나쁘지 않았어. 쇼핑몰 브로슈어 만들고 싶어서 손끝이 간질간질했지.”
“역시 최민아답다. 건설 광고주 매체 제안이니까 인쇄 광고는 당연히 들어갈 거야. 신문까지 일괄 단가표로 정리해 줄 수 있어?”
“알겠어. 그건 디자인 쪽에서 알아서 할게.”
최민아가 다이어리에 야무지게 회의 내용을 메모했다.
강박적으로 퀄리티와 숫자에 집착하는 최민아였다.
도혁은 믿을 만한 디자이너에게 인쇄 매체 쪽을 맡기고 한수철과 고민을 시작했다.
“그럼 인쇄는 됐고, 보통 이런 광고는 TV, 라디오, 옥외나 지하철, 버스도 간혹 들어가고. 그치?”
“맞아. 최대한 많이 들어가면 좋지.”
도혁이 펜을 들고 타깃부터 정리를 시작했다.
“우리의 주요 타깃이 투자자라고 생각해, 아니면 소비자라고 생각해?”
“론칭 광고니까 투자자 쪽 아닌가?”
“아니, 둘 다야.”
도혁이 고개를 가로젓자 한수철이 의아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건설 광고 론칭인데 소비자를 공략한다고?”
“공략이라. 그렇게 볼 수 있지.”
“소비로 이어지지 않을 텐데? 건설 분양 광고와 쇼핑몰 대소비자 광고는 톤앤매너가 아예 달라.”
한수철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같은 쇼핑몰 광고라도 분양 광고와 쇼핑몰 소비자를 겨냥한 광고는 완전히 다르다.
분양 광고는 투자자를 유치해야 하는 이성 소구를, 쇼핑몰은 주 타깃인 여성들을 겨냥한 감각적인 소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수철아. 충성도를 이끌어내는 본격적인 대소비자 광고 전에 인지도를 높일 수는 있지 않을까?”
“그거야 분양 광고 많이 뿌리면 되잖아.”
“그렇지.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야. 분양 광고를 통해서 이름이라도 소비자가 인식하게 된다면 성공이란 말이지. 천호동에 CG 쇼핑몰이 오픈한다. 이걸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것. 그게 이 광고의 두 번째 목표가 될 거야.”
“아, 소재를 다르게 만드는 게 아니고?”
“그럼. 두 가지 광고 만드는 비용으로 매체를 다각화하는 게 훨씬 효과적일 거야.”
이제 이해했다는 듯 한수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매체를 다각화한다면, 최대한 많은 채널에 노출되는 게 좋겠네.”
“응. 그래서 분양 광고에서 사용하는 모든 매체에 노출하되 거기에 케이블 TV를 추가할까 하는데?”
“케이블 TV? 케이블 프로그램 광고 말이야?”
한수철이 기획안 위에 YTM, MBM 등 뉴스 채널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더불어 여성들이 주로 보는 패션과 드라마, 예능 채널의 이름을 적는 그를 보고 도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채널마다 들어가면 매체비는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긴. 내가 쓰면서도 좀 그렇기는 했어.”
“TV는 그게 문제야. 정말. 너무 비싸. 공중파도 케이블도.”
최민아가 펜으로 다이어리를 툭툭 치며 말을 보탰다.
“신문 쪽은 신문사에서 알아서 시사 저널 같은 데 서비스도 넣어주거든. 작년에 잡지사에서 아르바이트할 때 봤었어.”
“신문이야 그렇지. 또 태강애드 매체팀 파워가 있으니까 가능할 거야. 버스나 지하철도 부담스러운 금액은 아닐 거고, 문제는 TV지.”
한수철과 최민아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천편일률적으로 들어가는 매체 기획안 가져가면 탁기준 선배가 뭐라고 할지 눈에 선하다.”
“아니, 그 선배는 멀쩡한 매체팀 선배들 놔두고 우리한테 이런 걸 시켜야겠니?”
“우리 팀에서 반짝 뭔가 튀어나올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거겠지.”
“이게 다 명도혁 때문 아니야? 자꾸 잘하니까 더 시키잖아.”
“왜 갑자기 불똥이 나한테 튀어. 그리고 뭔가 만들어주면 될 거 아니야. 반짝거리는 거.”
도혁의 말에 둘의 눈동자가 정말로 반짝거렸다.
“대책이 있는 거야? 분양 광고 다 엇비슷하잖아. 매체는 더 그렇고.”
“그럼. 내가 언제 대책 없이 너네 부른 적 있냐?”
“올~ 명도혁! 빨리 말해봐. 난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1도 새로운 게 안 떠오르는데 말이지.”
“나도. 너무 궁금해. 얼른 말해봐.”
“그게 말이지. 너네 케이블 TV에 두 종류가 있는 거 알아?”
“두 종류?”
한수철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두 종류라니? 최민아 역시 기대에 찬 눈으로 도혁을 바라보았다.
도혁은 문득 둘을 놀리고 싶어졌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출입문으로 발을 돌렸다.
“목이 말라서 말이지. 커피 좀 사 올게. 둘 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지?”
“야! 명도혁! 여기서 끊는다고?”
“두 가지 케이블 뭔데. 어?”
도혁은 웃으며 회의실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