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54화
“야이 자식들아,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국장님. 저희가 혹시 잘못한 거라도 있을까요?”
“그걸 아직도 모른단 말이야?”
소리를 지르던 매체국장이 도혁을 보더니 태세를 전환해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명도혁, 한수철. 공익광고제 대상 탔다면서. 커피를 사 오면 어떡하냐. 선배들이 다 준비해 놨는데.”
“네?”
-펑!
여기저기서 폭죽이 터졌다. 탕비실에 숨어 있던 선배들이 케이크를 들고나와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축하해. 도혁 씨.”
“축하합니다. 둘 다 대단하네요!”
공익광고 공모전 대상 수상 소식에 매체국에서 깜짝 파티를 준비했단다.
졸지에 커피를 두 잔씩 먹게 됐다며 매체국장이 너스레를 떨었다.
“광고 공사 직원들이 어찌나 태강애드 신입을 치켜세우던지. 명도혁, 한수철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 어제 광고 공사 들어갔다가 내가 다 으쓱했다니까.”
“그러니까요, 국장님. 공사 들어갈 때마다 우리 신입들 데리고 다녀야겠어요. 프라임타임 좀 받아 오게.”
선배들이 진심을 다해 축하해 주었다.
신입들의 수상에 파티까지 열어주는 배려에 조금 감동했다.
회귀 전에도 느꼈던 거지만 역시 매체국은 분위기가 훈훈했다.
“학기 중이라서 매체국 와서 한 것도 없는데 이렇게 축하해 주시고. 정말 감사합니다.”
“왜 한 게 없어. 광고 공사 행사에서 제일 큰 상 받아 왔는데. 전국에서 제일 큰 공모전 아니야.”
“맞습니다. 태강애드의 위상을 드높인 거죠. 매체국 입장에서는 이만한 수확이 없어요.”
“아, 잠깐만.”
매체국장이 한 손을 들어 직원들의 말을 끊었다.
그러곤 도혁과 한수철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우리 신입들 다음 달이면 다른 국으로 이동하지?”
“네. 겨울 학기에는 기획국으로 간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떠나기 전에 우리 매체국을 위해 좀 더 기여를 하고 가면 어떨까?”
“네?”
매체국장의 눈동자에 짧은 광기가 서렸다.
순간 불길한 기분이 머리를 스쳐 갔다.
뭐길래 저렇게 비장하지?
도혁과 한수철이 어리둥절해 서 있는데 매체국장이 성큼 둘의 앞으로 다가서며 둘을 자세히 훑어보았다.
“피지컬 좋고, 키도 크고. 적격이야. 아주 좋아.”
“저기, 국장님. 뭐가 좋다는 말씀이실까요.”
“결정했다. 너희에게 대태강애드 매체국을 위해 몸을 바칠 기회를 주지. 너희는 오늘부터 태강 선수촌에 입단한다. 알겠나?”
“태강 선수촌이요?”
도혁과 한수철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 * *
“어이, 마이 볼.”
“에이, 이쪽으로. 아니, 마이 볼, 아니, 노 볼. 앗!”
퇴근 직후 태강애드 사옥 근처의 공원.
한창 간부급과 매체국 직원들이 한데 모여 족구를 하고 있었다.
매체국장에게 콕 찍힌 도혁과 한수철은 당연히 선수로 참여 중이었고.
매체국장의 말대로 도혁과 한수철은 이른바 태강 선수촌에 입단해 태강애드의 체육 꿈나무로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공익광고 공모전이 끝나고 겨울이 오기 전, 광고공사에서 대대적인 체육 대회를 기획했다고 한다.
광고공사와 방송국 등 매체사, 그리고 대행사 직원들이 참여하는 큰 행사라고.
회귀 전에도 이런 행사를 했던 것 같긴 한데, 솔직히 제작국이라 큰 관심은 없었다.
아무튼 신입들은 선수로 불려 가 연습에 몰두했다.
공을 놓친 매체국장이 한숨을 몰아쉬며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원래 다른 국은 광고공사 행사에 관심이 없어요. 매체국만 열심히 참여했는데, 우리가 광고 시간은 잘 잡아와도 운동은 좀 젬병이거든.”
“그렇군요.”
“하지만 이번엔 우리 신입들이 있으니까 기대해도 되겠지? 젊은 피 아닌가!”
매체국장이 젊은 피를 강조하며 도혁에게 물었다.
“매체국의 핵심 가치는 뭐다?”
“설마, 조, 족구입니까?”
“그렇지! 역시 명도혁 씨 눈치가 빠르구만! 다른 경기는 몰라도 족구에서 지는 것만큼은 못 참지. 으하하.”
매체국장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운동장을 쩌렁쩌렁 울리고, 다시 족구가 시작되었다.
매체국장의 헛발질 역시 함께했다.
“마이, 마이 볼! 그렇지.”
“어이구.”
“국장님 괜찮으십니까?”
헛발과 동시에 쓰러진 매체국장을 직원들이 부축했다.
“아우, 저놈의 마이 볼.”
한수철이 공중에 어이없이 벙 뜬 매체국장의 공을 바라보며 복화술로 투덜거렸다.
겨우 경기를 마치고 벤치에 걸터앉아 물을 벌컥이는데 반가운 얼굴이 다가왔다.
“신입들, 족구 하느라고 애쓴다. 출장 갔다 오는 길에 누가 이렇게 운동을 열심히 하나 봤더니 우리 1팀 애들이잖아.”
“탁기준 선배님. 잘 지내셨습니까?”
“매체국장님이 여기저기 자랑이 늘어졌어. 신입들이 이번 광고 공사 체육대회 씹어 먹을 거라던데?”
“하, 마이 볼만 없으면 뭐든지 씹어 먹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뭐? 마이 볼?”
“그런 게 있습니다. 선배님.”
한숨을 내쉬는 도혁을 보며 탁기준이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족구는 족구고, 너네 대상 탔다면서. 짜식들, 진짜. 대단하다.”
“감사합니다.”
“포스터 느낌 좋더라고. 외주 줬냐? 하여간 요즘 대학생들은 돈도 많아요.”
“아니요. 공모전에 외주라니요. 우리 동아리 선배님이 직접 작업한 겁니다.”
“뭐?”
탁기준의 눈에서 장난기가 걷혔다.
한쪽 눈을 가늘게 뜨곤 잠깐 생각에 잠겼다.
“기성 디자이너가 아니라고? 아이디어도 좋았지만 시안 완성도가 상당한 수준이던데. 그런 고수가 동아리에 있다는 거야?”
“네. TV 스토리 보드 콘티도 우리 동아리 친구가 직접 그린 거예요.”
“동아리 수준이 상당한데? 그대로 옮겨서 광고 회사 차려도 되겠어.”
탁기준이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곤 턱짓으로 족구장을 가리켰다.
“근데 광고회사 차리기 전에 족구부터 해야겠다. 너네 부른다.”
“네……. 선배님. 또 뵙겠습니다.”
“힘내라! 파이팅!”
도혁은 족구장으로 달려가면서 도혁은 탁기준의 말을 곱씹었다.
태강애드 안에서도 시안 보는 눈이 날카롭기로 유명한 탁기준이었다.
어지간한 기성 디자이너의 시안에도 끌끌 혀를 차며 성에 차 하지 않던 탁기준인데, 강태오의 디자인이 그의 눈에 한 번에 든 거였다.
‘태오 선배 정말 놓치면 안 되겠는데?’
어떻게든 사업을 시작할 때 강태오를 꼬드겨서 데려가야겠다고 다시 결심했다.
남은 공모전 일정과 사업 구상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단꿈을 꾸고 있는데, 매체국장이 신입들을 향해 소리쳤다.
“신입들 빨리 와봐. 여기 대진표 도착했다. 이놈의 대일기획은 어딜 가나 걸리적거리는구만.”
“대일기획이요?”
“그래. 예선부터 우리랑 붙는다니까?”
대진표에 나온 첫 번째 족구 예선전은 대일기획과 태강애드의 대결이었다.
“이놈의 대일기획이랑은 항상 이런 식이야. 하필 이번에는 족구에서 붙어버리네.”
“두 회사가 라이벌 사이라는 걸 광고 공사에서도 아는 게 아닐까요.”
“어! 명도혁. 대일기획하고 우리 회사의 역사를 알아?”
“네, 선배님들께 주워들었습니다.”
“잘됐네. 이건 한일전이나 다를 게 없어.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아?”
“네? 한일전…… 이요?”
“그럼! 다른 팀은 몰라도 대일기획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 족구 역시 마찬가지지. 자, 알아들었으면 다시 연습하자고! 파이팅!”
무조건 이겨야 하는 대일기획과의 족구 경기란다.
도혁과 수철은 눈짓을 나누며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있을 공모전 계획 새로 세우고 구상하기도 바쁜데. 당분간 정신없이 보내겠구만.’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심장이 뜨거워지는 건 20대로 돌아왔기 때문만은 아닐 거다.
도혁은 족구 공을 하늘 높이 차올렸다.
* * *
“시작합니다!”
드디어 광고공사 체육대회의 날이 밝았다.
공교롭게 맞붙은 대일기획과의 첫 족구 시합이었다.
매체국장이 비장한 눈빛을 지글거리며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강조했듯이 다른 경기는 몰라도 족구만큼은 이겨야 해.”
“네!”
“무슨 일이 있어도 대일기획은 이겨야 한다고. 다들 알고 있지?”
흡사 한일전과 같은 비장한 각오였다.
움켜쥔 국장의 손등으로 푸른 핏줄이 곤두섰다.
“지금까지 우리가 연습해 온 것으로 충분하다. 젊은 피도 수혈되었으니 승산이 있어!”
“그럼요.”
“투 톱 명도혁, 한수철 중에 아쉽게 한수철이 부상을 당했지만.”
한수철은 평소 성격대로 몸을 바쳐 연습하다가 다리를 삐끗했다.
지금 파스를 붙이고 벤치 신세로 나앉은 상태였다.
통한에 찬 표정으로 매체국장이 한숨지었다.
하지만 곧 각오에 찬 눈빛으로 족구 팀을 돌아보았다.
“우리에겐 원톱 명도혁이 있다.”
“그렇습니다! 명도혁 파이팅!”
“파이팅!!!”
매체국장의 말에 직원들이 도혁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
도혁은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부담스러운 시선에 화답했다.
‘이길 수 있을까? 차라리 경쟁 PT를 하는 게 마음이 편하겠다.’
도혁은 속으로 진심을 삼켰다.
사실 태강애드 족구 팀에는 고질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그건 한수철의 부재 따위가 아니었다.
바로 주장 완장을 차고 있는 태강애드 팀의 구멍, 매체국장 때문이었다.
의욕은 넘치고 몸은 안 따라 주는데 본인이 에이스인 줄 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하지만 직위가 높아서 아무도 싫은 소리를 못 하는, 직장인 스포츠 팀의 흔한 골칫거리 말이다.
도혁은 한숨을 내쉬며 운동화 끈을 고쳐 매었다.
경기가 시작되었다.
-쉭, 슉
“마이 볼! 여기, 이쪽으로!”
“자, 잠시만요, 국장님! 아니!”
-삐빅,
“태강애드 오버코트(네트 너머로 신체 부위가 넘어가는 반칙)!”
과하게 흥분한 매체국장의 발이 네트를 넘겨 버렸다.
정작 넘어가야 할 공은 연거푸 넘어가지 못했고, 국장은 여전히 헛발질이었다.
축구라면 인원이라도 많아서 묻어갈 텐데. 달랑 네 명이 하는 족구에서 저렇게 큰 구멍이 있다 보니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12:4
도혁은 전광판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 4점도 대일기획 쪽 실책으로 얻은 점수였다.
“마이 볼! 마이 마이!”
국장이 달라는데 안 줄 수도 없고, 직원들이 계속 국장에게만 토스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저놈의 마이 볼 소리만 안 해도 5점은 더 따겠구만.’
흘깃 쳐다본 한수철 역시 벤치에서 ‘저놈의 마이 볼’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삐빅.
다시 마이 볼 소리가 들려올 때였다.
매체국장의 높은 비명이 운동장을 가득 울렸다.
“마이, 보올…… 으윽.”
멀쩡한 땅에서 매체국장이 제 발에 걸려 넘어졌다.
툭 쓰러진 채 일어나지 못한 그가 들것에 실려 나갔다.
나가면서도 그는 도혁의 손을 잡고 당부의 인사를 잊지 않았다.
“명도혁 씨…… 최선을 다해주게. 무조건 이겨야 해. 무조…… 건…….”
“네. 그럼요. 염려 마십시오.”
도혁은 필승의 각오를 다지며 승리를 약속했다.
드디어! 태강애드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매체국장이 실려 나감과 동시에 선수들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돌았다.
벤치에 앉아 있던 한수철은 벌떡 일어나 앉기까지 했다.
-삐빅. 선수 교체!
매체국장의 순수한 열정에 경의를 표하며 새 선수가 달려 들어왔다.
“됐다! 내가 들어왔어! 모두 정신 차리고!”
“네! 알겠습니다. 파, 파이팅!!!”
놀랍게도 교체해서 들어온 선수는 태강애드의 수장, 김철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