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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천재 명도혁-53화 (53/252)

광고 천재 명도혁 53화

‘배경 믿고 어디까지 가는지 지켜보도록 하지. 어디 한번 달려봐라.’

최철우와 허공에서 시선이 부딪히고, 그가 도혁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선배님. 축하드립니다.”

“그래. 너도 축하한다.”

“TV-스토리보드 부문 우수상이시더라구요. 공동 수상이네요.”

애드포인트 팀이 인쇄 부문 대상임을 알고 있었겠지만, 굳이 우수상을 강조하며 축하한단다.

도혁은 잠깐 조소하곤 최철우 어깨 너머로 걸어오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최철우의 아버지였다.

“명도혁 씨 맞으시죠? 대상 수상자! 이거 축하드립니다.”

“네. 감사합니다. 저희 팀에서 함께 진행했습니다.”

“우리 철우가 부족한 게 많아요. 같은 과 선배라고 들었는데 잘 부탁합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철우도 이번에 수상했잖아요. 일학년인데 대단합니다.”

의례적인 인사치레로 최철우를 추켜세워 주었다.

아들을 칭찬하는 말을 싫어할 아버지는 없으니까.

최철우가 꼴 보기 싫어도 그 아버지까지 척을 질 필요는 절대 없었다. 광고 공사 사장까지 오르실 인물이거든.

“대단하긴요. 이진태 교수가 많이 챙겨준 덕분인걸요. 행사 곧 시작하겠네요. 그럼 이만…….”

“네. 정말 감사합니다.”

공손하게 인사를 나누며 바라본 최철우는 이를 꽉 앙다물었다.

도혁은 불끈거리는 그의 주먹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자리에 앉았다.

사회자가 장내를 정돈하며 행사의 시작을 알렸다.

“안녕하십니까. 이 자리에 함께하신 귀빈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 이 영광스러운 행사의 사회를 맡은 아나운서 정이준입니다.”

정이준의 목소리를 들은 도혁이 고개를 길게 빼었다.

전생에 꽤 가깝게 지냈던 방송계의 절친이었다.

프리 선언 이후 바빠져 한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풋풋한 신입 아나운서의 모습으로 마이크를 잡은 그를 보니 무척 반가웠다.

끝나고 술이나 한잔하면 좋겠구만.

아는 척할 수 없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와, 방송국 아나운서가 사회를 보네요.”

“방송계 행사니까 부탁받았나 보지. 방송 광고는 다 공사에서 진행하니까.”

“실물로 보니까 더 잘생겼는데요? 배우인 줄 알았습니다.”

이진우의 말처럼 훤칠한 정이준이 축하 공연 팀을 소개했다.

“여러분, 신인 가수 POT를 소개합니다. 박수로 맞아주세요.”

귀빈들이 많이 모인 엄숙한 자리.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아이돌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고등학생 수상 팀들이 환호하고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곧 공연이 끝나고 수상이 이어졌다.

“오시는 길에 외부 전시관에 올해의 공모전 당선작들을 쭈욱 보셨을 텐데요. 이 전시는 이번 주 내내 국민들이 볼 수 있도록 전시할 예정입니다. 또한 한 해 동안 TV, 라디오, 지하철, 옥외 등 각 매체를 통해 노출될 것입니다. 그럼 이 영광의 광고를 만든 오늘의 주인공, 수상자분들을 모시기 전에, 시상자를 안내하겠습니다.”

정이준이 시상할 한국방송광고공사 사장을 소개하고 장려상부터 수상을 시작했다.

상기된 표정의 최철우 팀, 최우수상을 차지한 S대 광고홍보학과 시상까지 마치고 도혁 팀의 차례가 되었다.

“드디어 마지막 수상자를 발표할 시간인데요. 공고문에서 보셨겠지만 올해 두 개의 상을 휩쓴 대학생 팀이 있습니다. TV-스토리보드 부문 우수상, 그리고 인쇄 부문에서 영예의 대상을 차지한 P대 광고 동아리, 애드포인트 팀입니다. 여러분 박수로 축하해 주세요!”

네 남자가 무대 앞으로 걸어 나갔다.

맞춘 듯 똑같이 입은 검은 슈트가 조금 부끄럽기도 했지만, 상관없었다.

오늘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애드포인트니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우수상과 대상을 받았다.

대통령상이다 보니 방송공사 사장이 대신 수여했지만, 대통령의 축하 영상 메시지까지 전달되었다.

그걸 본 강태오가 입술을 깨물며 조금 울컥했다.

수상 소감을 물어오는데 대답하기 힘들었는지 도혁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얼떨결에 마이크를 건네받은 도혁이 담담하게 수상 소감을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P대 애드포인트의 명도혁입니다. 먼저 이렇게 귀한 상을 두 개나 받게 되어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잠깐 말을 끊고 도혁이 짧은 소회를 전했다.

“마음을 움직이는 광고를 만들고 싶습니다. 저희가 만든 공익광고로 단 한 명의 마음이라도 움직여서 더 나은 세상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찰나의 눈길을 잡아 심장을 움직이는 것이 좋은 광고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광고 오래 만드는 광고인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여기저기서 플래시가 터지고 도혁 팀이 자리로 돌아왔다.

한수철이 팔꿈치로 도혁의 배를 쿡 치며 속삭였다.

“너, 수상 소감 연습했냐? 말을 왜 이렇게 잘해?”

“어. 연습했다. 잘했냐?”

느물거리는 말에 한수철이 미소를 짓고 강태오는 대기실로 들어갔다.

수상이 끝나고 잠깐의 휴식이 주어졌다.

그리고 곧, 대상을 비롯한 몇몇 팀이 광고안을 발표할 시간이 되었다.

“어! 최철우 팀도 발표하네?”

“최철우가 발표는 잘하니까. TV-스토리보드 쪽은 최우수상이 아니라 최철우 팀이 발표하는구나.”

“그러네. 잘 만들었나 모르겠다. 아까 전시관에서는 눈에 띄지 않아서 수상한지도 몰랐거든.”

눈에 확 들어오는 광고는 어디서 만들었나 보면서 들어왔는데, 최철우 팀의 콘티는 도혁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철우는 업계 관계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광고공사, 방송사, 신문사 등 광고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한 시상식. 눈도장을 찍어두기엔 더없이 좋은 자리였다.

도혁은 대충 최철우의 발표 내용을 흘려 보았다.

그리고 드디어, 강태오의 차례를 기다렸다.

강태오가 단상 위에 섰다.

잠깐 옷매무시를 바로잡고 인사를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애드포인트의 강태오입니다. 저희 팀의 인쇄 광고 대상 수상작을 보시겠습니다.”

화면에 광고가 크게 펼쳐지자 전시관과는 또 다른 감동이 느껴졌다.

화면을 가득 채운 키보드와 그걸 두드리는 양손이 클로즈업 된 포스터.

하지만 왼쪽과 오른쪽이 반으로 분리되어 있다.

좌우로 분할된 포스터가 화면을 채우자 강태오가 설명을 시작했다.

“여기 키보드를 두드리는 사람의 손이 있습니다. 하지만 반으로 분리되어 있죠. 왼쪽과 오른쪽. 흑과 백, 칼과 꽃이죠. 왼쪽 손의 손가락 끝에는 칼날이 꽂혀 있습니다. 날카롭게요. 그리고 그 손은 키보드를 통해 누군가를 찌릅니다.”

“반면 백으로 표시된 오른 손가락의 끝에는 꽃이 그려져 있습니다. 키보드를 통해서 누군가에게 꽃과 같은 위로를 건넬 손끝입니다.”

강태오가 관객들을 한번 둘러보며 숨을 골랐다.

“우리는 여기에 살인미수라는 카피를 얹었습니다. 공익광고 공모전의 컨셉을 잡는 동안 조사를 많이 했는데요.

눈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겨냥한 악성 댓글의 수위가 지나치더군요. 그 악성 댓글의 대상은 연예인과 공인이 많았지만, 점차 일반인에게 번지는 추세였습니다. 이런 식이라면 머지않은 미래에 온라인을 통한 학교 폭력과 일반인 피해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말이 칼이 되어 심장을 찌른다고 하죠. 이젠 글이 말이 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5초 동안 휘갈긴 악성 댓글로 누군가는 5일, 아니, 5년간 심장에서 피를 흘릴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는 여기에 착안해 손가락 끝을 칼로 바꾸고 살인미수라는 카피를 적었습니다. 그리고 오른쪽.”

“살인미수에서 미수가 아름다울 미와 손 수로 바뀌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아름다운 손. 선한 댓글을 남기는 손끝을 꽃으로 비유해 고운 말로 사람을 살린다는 표현을 써봤습니다.”

강태오가 리모컨을 누르자 흑백의 좌우 분할 화면 위에 붉은빛이 얹혔다.

왼쪽의 칼끝에 붉은 피가 맺히고, 오른손 손끝의 꽃이 빨갛게 물들었다.

흑백 화면에 피와 꽃의 붉은 색상이 대조를 이루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같은 키보드, 같은 손가락, 그리고 똑같은 빨강. 하지만 누군가는 손끝으로 사람을 죽이고, 누군가는 사람을 살립니다. 당신은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여운을 남긴 질문으로 강태오의 발표가 끝났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지고 강태오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태오 선배 진짜 최고였어요. 정말 최고.”

“고맙다. 진짜 너무 떨어 가지고 정신이 하나도 없다.”

“아니, 정말 잘했어요. 그리고 크게 보니까 더 비주얼이 좋네. 선배 크리에이티브 아티스트 해도 되겠어요.”

도혁은 화면을 보며 강태오에게 진심을 말해주었다.

흑백과 대조를 이룬 붉은 빛깔의 조화가 강렬하면서도 과하지 않고, 밸런스 또한 기가 막혔다.

선이 굵으면서도 섬세하고 집요한 완성도. 그야말로 강태오다운 스타일의 포스터였다.

도혁은 이런 금손을 놓치기 싫어졌다.

사업을 시작했을 때 꼭 데려오고 싶은 인재라고나 할까.

그런 속을 알 리가 없는 강태오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냉수를 벌컥였다.

시상과 발표로 이어진 긴장된 1부가 끝나고 2부 식순이 시작되었다.

“어! 걸 그룹 SO네요. 와!”

걸 그룹의 축하 공연과 함께 메인 요리와 와인이 나왔다.

“우와! 파티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말은 좀 작게 하면 좋을 텐데, 진우야?”

“대박! 스테이크 완전 맛있어. 어! 저거 랍스터냐?”

촌스럽게 소리를 지르는 애드포인트 팀원들을 말리지 못한, 뿌듯하고 풍성한 시상식장의 만찬이었다.

* * *

설레는 시상식을 끝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도혁과 한수철은 태강애드 로비 카페에서 수십 잔의 커피를 사 들고 사무실로 향했다.

공모전 수상 기념으로 한턱 쏘려 한 것이다.

“매체국장님, 팀장님, 우리랑 같이 공사 다니는 선배들이랑, 인턴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어. 모자라진 않을 거야.”

“도혁아, 나 상금으로 부모님 속옷 사드렸어. 엄청 기뻐하시더라고. 넌 뭐 해드렸어?”

“나? 집 사드릴 건데?”

“뭐?”

도혁은 일단 상금을 모두 저축했다. 앞으로 참여할 공모전 상금과 태강애드 월급도 고스란히 모을 거고.

최소 자본 모이면 곧바로 사업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회귀 전 지식과 아이디어를 태강애드에 모조리 바칠 생각은 없거든.

아무튼 사업으로 대박 날 때까지 부모님 선물은 보류다. 정말 속옷이 아니라 집을 사드릴 수 있을 테니까.

도혁이 미소를 머금고 어깨로 매체국의 문을 밀고 들어갈 때였다.

“야이 자식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도혁과 한수철을 보며 매체국장이 소리를 질렀다.

“정신 똑바로 안 차리고 다닐 거야? 이 자식들 이거, 명도혁, 한수철! 똑똑한 줄 알았는데 안 되겠구만!”

둘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딱히 매체국에 뭘 잘못한 건 없는 것 같은데.

중요한 일은 보조만 하고 있었고, 광고 공사 정도 함께 들어가는 간단한 업무에서 착오가 있을 리 만무했다.

“국장님. 저희가 혹시 잘못한 거라도 있을까요?”

“그걸 아직도 모른단 말이야?”

매체국장이 도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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