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52화
“공익광고 공모전 결과, 발표됐어.”
“형! 빨리 말해요. 우리 어떻게 됐는데!”
강태오가 말을 끊곤 한번 뜸을 들이자 한수철이 재촉했다.
“우수상.”
“네?”
“왜. 실망이냐?”
“그런 건 아닌데…….”
우수상. 전국에서 몰려든 대학생, 특히 광고홍보학과 학생들의 작품이 몰리는 공익광고 공모전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조금 아쉬운 성적이었다.
아니, 그 시안이 안 통했다니. 대한민국 대학생의 크리에이티브 수준은 도대체 얼마나 높은 것인가.
명도혁, 요즘 잘나갔다고 방심했나 보다.
실망과 동시에 자책이 밀려들었다.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앙다무는 순간, 강태오가 핸드폰 화면을 들이밀었다.
“TV-CF 부문 우수상이야. 우리 인쇄 부문은 대상 탔어!”
“네? 태오 선배! 진짜 이럴 겁니까?”
“아!! 대상! 진짜 대상이에요?”
“그래, 봐봐. 무려 대통령상! 문자메시지로 사전 통보 왔어. 내가 받자마자 통화도 했다고!”
“와!! 정말요?”
한수철이 강태오의 팔을 붙들고 소리를 질렀다.
거구의 강태오에게 달려들어 고목나무에 달라붙는 매미처럼 매달렸다.
주위의 학생들이 무슨 일이냐는 듯 두리번거렸지만, 부끄럽지도 않았다.
한수철이 실감 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도혁을 바라보았다.
“도혁아. 우리 대상이래. 와! 올해 신내림 받았나. 또 대상! 아!! 살다 보니 대통령상을 다 받네.”
“그래, 다행이다.”
“어! 도혁이 담담한 거 봐. 이야. 대상 얘기 듣고 흥분도 안 한다. 와.”
“이 정도면 흥분한 거예요.”
지금 감정은 흥분이라기보다 안심에 가까웠지만.
도혁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강태오가 둘을 바라보며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너네 정장 있냐?”
“난 마땅한 건 없는데. 어! 혹시 시상식 하는 거예요?”
“맞어. 프레스센터에서 전시회 겸 발표회도 있을 예정이래. 되도록 깔끔하게 입고 오라는데, 정장까지는 아니라도 신경 써야겠다.”
“대통령상까지 받았는데 옷 사러 갈까요? 와. 아직도 실감이 안 나요 선배.”
두 개의 대상 수상으로 완전히 고무된 한수철이었다.
도혁이 강태오를 보며 물었다.
“옷이야 같이 사러 가면 되고, 발표회요?”
“맞아. 발표회 준비하라고 하더라고.”
“PT처럼 준비하면 되겠네요. 발표는 태오 선배가 할 거죠?”
“그래야지. 덜덜 떨리겠지만 준비해 봐야지. 와. 졸업 전에 내가 한을 푼다. 정말. 어! 저기 진우 오네. 내가 도서관 앞으로 오라고 했거든.”
멀리서 소식을 들은 이진우가 미친 속도로 뛰어오고 있었다.
저 자식 군대에서 저렇게 빠릿빠릿했으면 엄청나게 좋았을 텐데.
도혁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달려오는 이진우를 바라보았다.
“선배님, 도혁 선배! 아!”
“천천히 와도 돼. 야! 감동한 건 좋은데 그만 달라붙어!”
“대상이라니요. 이게 무슨 일입니까!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도혁은 덥석 안겨들며 매달리는 이진우를 겨우 떼어내고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게 다 진우 덕분이다. 네가 그린 CF-콘티도 우수상이야.”
“좀 더 잘 그렸으면 좋았을 텐데요.”
“내가 연기를 못해서 더 이상 아이디어가 안 나온 거지.”
도혁이 씁쓸하게 웃었다.
연기를 해서 즙 짜듯 아이디어를 더 짜보자던 생각과 달리 명도혁의 발 연기는 모두의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었거든.
머리를 긁적이는 둘을 보며 강태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소리를 다 한다. 원래 대상은 몰아주지 않아. 전국에서 지원했는데 그럴 수가 없지. 두 부문 수상도 기적 같은 일이야. 아마 최초가 아닐까 싶은데?”
“아무튼 선배님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너도 고생했다. 대상 받은 인쇄 광고 초안, 진우가 그렸잖아.”
“저야 아이디어 말씀하신 대로 그림만 그렸죠. 애드포인트 팀에 숟가락 얹게 돼서 너무 기쁩니다. 대통령상이라니요. 가문의 영광입니다.”
“그래? 진심이지?”
“네! 그럼요.”
“그럼 한 가지만 더 부탁해도 되겠냐?”
“네. 도혁 선배님, 말씀하십시오.”
“태오 선배 좀 도와드려. 시상식 날 발표하실 거거든.”
“그럼요.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와! 시상식도 합니까? 레드 카펫이요?”
이진우가 완전히 격앙돼 소리쳤다. 도혁은 웃으며 흥분한 애드포인트 멤버들을 한 번에 진정시켰다.
“자, 그럼 이제 기말고사 준비하러 가볼까?”
“야! 명도혁 오늘 같은 날에 기말고사라니. 언제부터 공부를 그렇게 했다고.”
“나 조금 전까지 공부하다 나왔는데?”
“명도혁 너 자다가 나왔는데?”
함께 웃음이 터지고 도혁은 마지못해 간다는 표정으로 앞장섰다.
“할 수 없지. 오늘 같은 날은 한잔할 수밖에. 가자.”
“그럼, 그럼. 대상인데. 내가 크게 한턱 쏠게.”
강태오가 시험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북적이는 학교 앞 호프집에 들어서며 호기롭게 소리쳤다.
“아주머니, 냉장고에 깨끗한 참소주 몇 병 있습니까?”
“뭐? 소주야 박스째 있지.”
“막걸리는요?”
“한, 열댓 병?”
“다행이네. 들어가자.”
강태오가 멤버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오늘 여기 냉장고 술 다 비우고 간다. 오늘 집에 갈 생각들 하지 마!”
“넵!”
그날 밤 그들은 정말로 집에 가지 못했다.
* * *
시청 앞 지하철역에서 애드포인트 멤버들이 모였다.
쫙 빼입은 정장 차림으로.
“저기, 선배님들. 드레스 코드가 이게 맞는 걸까요.”
“그럼 인마. 당연히 대통령상인데.”
“우리 너무 튀는 것 같습니다.”
이진우가 프레스센터 쪽을 향하는 대학생 무리들을 가리켰다.
“우리처럼 완전히 아빠 정장 입은 사람은 별로 없는데요.”
“대상이라서 괜찮아. 나만 믿고 따라와!”
강태오가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펴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도혁은 회귀 후 처음 입는 슈트였지만 기분이 굉장히 좋았다.
쇼윈도에 비친 모습이 퍽 마음에 들었거든.
‘배가 안 나오니까 옷발이 사는구만. 명도혁 젊었을 때는 제법 괜찮았네. 어?’
혼자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다가 한수철에게 한 소리 들었다.
“명도혁 잘생긴 줄 아니까 얼른 가자. 태오 선배 연습도 해야지.”
“수철아. 발표 못 하게 돼서 서운하지 않아?”
“에이, 당연히 태오 선배가 해야지. 졸업하기 전 마지막이잖아.”
“내년에 한수철이 발표하려면 또 대상 타야겠는데?”
“내년에 또 하게?”
“아니, 계속할 건데? 공모전. 전국에 광고, 캠페인, 마케팅 공모전 전부 다 할 건데?”
“어우 농담도 섬찟하게도 한다.”
한수철이 팔에 돋은 소름을 훑으며 몸서리를 쳤다.
농담이라니. 도혁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한수철을 바라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거의 다 왔네. 들어가자.”
“와! 진짜 레드 카펫 아니야? 저거? 영화제처럼 촬영 부스도 있어!”
공사에서 나름대로 신경 쓴 표시가 많이 나는 시상식장이었다.
“이쪽으로 오셔서 이름표 받으시고 가세요.”
“명도혁입니다.”
“어머! 대상 팀이네요. 축하드려요. 기념 촬영하시고 전시관 따라 들어가시면 우측에 컨벤션 홀이 있어요.”
“감사합니다.”
멤버들은 벌써 갖가지 포즈로 촬영 중이었다.
만세, 슈퍼맨 등 온갖 촌스러운 동작으로 사진을 찍고 전시관으로 들어섰다.
복도를 따라 쭉 전시된 공익광고 공모전 당선작들.
톡톡 튀는 아이디어와 촌철살인의 카피를 바라보며 역시 공익광고 대전이라는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이건 고등학생이 만든 건가? 와!”
“요즘 고등학생들도 만만치 않아. 아니지 오히려 더 신신하다니까.”
“맞아. 광고 동아리도 많고. 대한민국 광고계의 미래가 밝구만.”
한국은 일본, 태국과 더불어 아시아의 광고 강국이다. 그 저력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좋은 광고가 많았다.
도혁은 복도를 따라 수상작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걸어 나갔다.
“와! 선배님들. 여기 완전 좋습니다! 결혼식장 같아요.”
“쉿. 촌스럽긴. 조용히.”
조용히 하라고 이진우를 구박하는 한수철 역시 흥분한 표정이었다.
화려한 조명이 드리운 거대한 컨벤션 홀에 들어선 애드포인트 멤버들은 두리번거리며 자리를 찾았다.
[인쇄 부문 대상 / TV-스토리보드(콘티) 부문 우수상
애드포인트 강태오, 명도혁, 한수철, 이진우 팀]
제일 앞자리 한가운데 마련된 대상석에 명패가 놓여 있었다.
강태오가 긴장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이런 자리는 처음이라 좀 당황스럽네. 그냥 회의실에서 상 주고 발표만 하는 줄 알았더니. 이거 와인 잔이냐?”
“그러니까요. 결혼식장 같다니까요. 여기 행사 식순이랑, 와! 메뉴도 적혀 있어요. 스테이크 줍니다. 스테이크!”
행사 진행을 맡은 공사 직원이 흥분한 멤버들의 곁에 다가왔다.
“대상 팀이네요. 축하드립니다. 발표하실 분이 누구신가요?”
“저입니다!”
“발표자께서는 있다가 수상하고 나면 대기실로 가실 거예요. 잠시 따라오시겠어요?”
직원의 안내에 따라 강태오가 잠깐 자리를 비우고, 남은 멤버들이 행사장을 휘이 둘러보며 구경하고 있던 찰나였다.
“어이! 명도혁. 한수철. 이야. 축하해. 대상이라니. 크으, 옷도 쫙 빼입었구만.”
“어! 교수님!”
“P대 광고홍보학과를 애드포인트보다 크게 써야지, 어?”
이진태가 명찰을 힐끗 보며 도혁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가 해낼 줄 알았지. 하긴 명도혁이를 이길 수가 있나. 내가 만든 팀은 CF 부문만 우수상 받았어.”
“그래도 선전했네요.”
“크으. 가진 자의 여유인가. 이 팀은 TV-CF 우수상도 탔잖아.”
도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최철우가 그 실력으로 우수상이라니.
공정성을 중요시하는 이진태가 광고에 직접 손을 대지는 않았을 테지만, 기준 미달의 시안을 걸러주긴 했을 거다. 3학년들은 벼르고 달려들었을 거고.
선배들이 에모라 때 이를 갈았었거든.
멀리서 그 선배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도혁과 한수철이 일어서 인사했다.
“선배님들 안녕하십니까?”
“그래. 축하한다. 명도혁, 한수철. 둘 다 동아리에서 해버려서 너무 아쉬워. 내년에는 우리 광고홍보과에서 진행해 보자고. 졸업하기 전에 대상 좀 타보게.”
“네. 선배님들도 축하드립니다. 참, 최철우는 같이 안 왔습니까?”
“아, 철우. 그 자식은 따로 온다던데? 저기 있네.”
선배가 가리킨 곳에서는 최철우가 광고공사 임직원인 아버지와 함께 관계자들에게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어! KBN 사장님이시네. 난 이만 가볼게. 두 팀 다 축하해!”
“감사합니다. 교수님.”
이진태가 최철우 있는 쪽으로 걸어가고 선배들의 씁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철우 저 자식 뭐냐? 뭔데 저렇게 높으신 분들이랑 있는 거야?”
“나도 얼핏 들었는데 할아버지가 KBN 전 사장이고 아버지도 광고 공사 다닌다고 하더라고.”
“어쩐지 좀 재수가 없더라니.”
재수 없다는 소리를 한 선배가 도혁과 한수철의 눈치를 보았다.
아무래도 한 팀인데 뒷담화를 하는 게 마음에 걸렸는지 선배들이 서둘러 자리를 떴다.
“우리는 자리로 가볼게. 나중에 술이나 한잔하자.”
“네. 선배님.”
“내년엔 꼭 우리랑 하는 거다! 어? 명도혁 너 내가 예약했다?”
선배들이 끝까지 침을 바르며 가고, 도혁은 최철우 쪽을 노려보았다.
‘배경 믿고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지켜보도록 하지. 달려봐라. 어디.’
도혁은 의자에 등을 대고 다리를 꼬았다.
최철우와 허공에서 시선이 부딪힌 건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