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51화
“아이고, 주님 오셨습니까?”
일주일 뒤, 태강애드 출근길에서 탁기준과 마주쳤다.
도혁을 만나자마자 주님이란다. 에모라 광고주님이라고 놀리는 거였다.
“설마, 벌써 에모라 화장품 측에서 연락이 온 거예요?”
“그럼. 그 대표님 성격 급하시더라. 김철준 대표님께 직접 전화해서 우리 대상 팀이 컨트롤할 거라고 몇 번을 강조하셨대.”
“하긴. 공모전 처리하는 속도 보니 초스피드시더라구요.”
그 속도감으로 십 년 안에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에모라 화장품이었다.
태강애드로서는 비전 있는 광고주를 잡은 셈이다.
“에모라 화장품, 태강애드에서 잘 관리해서 오래가면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맞아. 재무도 튼튼하고 무엇보다 여기, 현금 박치기라고 소문났어.”
“잘됐네요. 건설 광고주처럼 어음 몇 개월씩 끊고 날라버리면 골치 아프잖아요.”
“야! 명도혁 이게 무슨 말이야. 네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탁기준이 눈을 크게 뜨고 도혁을 바라보았다.
말하는 순간 아차 했다.
이런. 아침이라 잠이 덜 깨서 또 아는 걸 말해 버렸다. 이러니 미래에서 왔다는 말을 듣고 다니지.
“명도혁 인마, 신입이 그런 업계 사정을 어떻게 아냐고. 어?”
“매체국 선배님들한테서 주워들었습니다.”
“에이, 매체국 인간들 애한테 벌써 별소리를 다 했구만. 내가 회사 돌아가는 것도 좀 알려주고 생색내려고 했더니.”
도혁이 어색한 웃음으로 무마하며 급히 화제를 돌렸다.
“참, 전에 말씀하신 매체 계획은 언제까지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아이고. 천천히 주십시오. 제가 주님께 감히 업무를 안겨 드리다니 민망할 따름입니다.”
탁기준을 따돌리려 발길을 서둘렀다.
서두른 보람도 없이 입구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김철준 대표를 만나 버렸다.
“어! 광고주님이시네. 아이고 우리 에모라 광고주님 명도혁 씨. 잘 부탁드립니다!”
“아, 대표님까지. 민망합니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어이구, 이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최선은 우리가 다해야죠.”
신입에서 광고주님으로 신분 격상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신분 격상의 길이 녹록하지는 않았지만.
한수철과 함께 아침부터 임원 회의에 불려 간 것이다.
회의실 문을 열자마자 김철준과 임직원들이 동시에 도혁과 한수철을 돌아보았다.
“두 분 이쪽으로 앉으시죠. 저희가 에모라 화장품 브리핑을 받아야 해서, 아침 티타임 시간에 불렀습니다.”
“네. 오늘 이렇게 될지 모르고 캐주얼하게 입고 왔네요. 죄송합니다.”
“별말씀을요.”
임원들의 깍듯한 존댓말이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아, 대표님. 말씀 편하게 해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그럼 우리 명도혁 광고주님의 의견을 적극 수용하여, 그럴까? 일단 차부터 들지.”
김철준이 커피 잔을 드는 두 신입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대상 받았다면서. 아주 이진태 학과장님이 칭찬에 입이 부르트겠어. 여기저기 자랑하느라고 정신이 없어요.”
“네. 운이 좋았습니다.”
“에이, 겸손도 정도껏 해야지. 행운도 한두 번이어야 행운이라고 불리는 거야. 벌써 세 번째 대박을 냈는데 이걸 어떻게 운이라고 하나.”
“맞습니다. 대표님. 우리 신입들 대단합니다.”
임원들이 맞장구를 치며 임원들이 추켜세웠다.
“에모라 화장품은 우리 신입 덕분에 거저 수주한 거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러니까 말입니다. 재무 구조가 아주 탄탄하더라구요. 알짜 기업이에요. 요즘 대일이랑 사이가 틀어졌다고 소문나서 슬쩍 제안 들어가려고 준비 중이었던 곳인데 덜컥 계약이라니요.”
“이거 기획국장 손 안 대고 코 풀었네요.”
임원들이 돌아가면서 신통방통한 신입들을 칭찬했다.
끄덕인 김철준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혹시 에모라 공모전에 냈던 기획안 가지고 왔나?”
“네. 여기 기획안과 PT 시나리오입니다.”
한수철이 기획안을 전달하고 종잇장 넘기는 소리가 회의실을 울렸다.
“볼수록 대박이구만. 이걸 대학생 공모전에서 써냈다고?”
“CRM(고객 특성에 기초한 마케팅 활동) 파트 보셨습니까? 이거 원, 우리 온라인 마케팅 팀에서 분발 좀 해야겠습니다?”
아직은 매체국 내 구석에서 몇 명 되지 않는 인원으로 꾸려지던 온라인 팀이었다.
김철준의 표정이 금세 진지해졌다.
“기획국장 말대로 온라인 마케팅 쪽 보강해야겠어요. 인사팀장 인원 체크해서 온라인 팀 충원 계획서 올리도록.”
“네. 알겠습니다.”
도혁은 고개를 갸웃하며 임원들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전생의 태강애드는 온라인 사업부가 취약한 편이었다.
그건 십수 년 뒤 태강이 쇠퇴 일로를 걷게 되는 이유이기도 했다.
‘미래가 또 바뀌는 건가?’
태강애드 한번 씹어 먹어주고 뻥 차려고 했더니, 그 과정에서 태강이 점점 강력해지고 있었다.
에모라도 태강애드 광고주는 아니었거든.
조금씩 달라지는 미래에 당황했지만 도혁은 속으로 미소 지었다.
아무튼 도혁은 사업을 꿈꾸고 있었기에 태강애드가 커지면 나쁠 것은 없었다.
광고계에서 가장 깊은 인연을 가진 곳이 태강애드고 창업 초창기에는 태강 같은 큰 대행사에서 수주받는 게 제법 쏠쏠할 테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태강애드 뻥 차지 말고 적극 이용해 줘야겠다.
도혁이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동안 꼼꼼하게 기획안을 체크한 임원진이 질문을 시작했다.
광고주님이라고 떠받들 때는 언제고 몇 시간을 붙잡아 진이 빠지도록 질문을 쏟아냈다.
“혹시 대상 기획안에서 더 붙이고 싶은 내용은 없어?”
“아, 나중에 모델안 확정되면 확인할 수 있겠죠? 광고주 이미지에 맞춘 모델로 진행했으면 해서요.”
도혁은 앞으로 커갈 모델이 누군지 정확히 알고 있으니 최대한 유망주로 선정할 생각이었다.
“아니, 제법 광고주 같은데? 명도혁, 설마 에모라 화장품에 진짜 취업이라도 한 거야?”
“안 될 말이지. 엄연히 우리 명도혁, 한수철은 우리 신입인데 이중 취업이잖아!”
도혁이 어색한 미소를 짓자 김철준이 진담 반 농담 반으로 회의를 마무리했다.
“우리 광고주님 시간을 너무 빼앗았네요. 저희 태강애드에서 최선을 다해 CF 제작하겠습니다. 그럼 컨펌 때 뵙겠습니다.”
회의 끝인사만 광고주님이었던 신입들의 고단한 오전이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고 어느덧 기말고사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말도 안 돼. 중간고사 본 지 며칠 안 된 거 같구만, 벌써 기말이라고?”
“그러니까. 이건 미친 거야. 아! 현실을 부정하고 싶다!”
“너, 또 혼자 공부하지 마라, 한수철.”
“웃기시네. 공부 안 했다던 명도혁 중간고사 성적이 어땠더라. 이 배신자야.”
“안 한 건 사실인데?”
한수철의 말대로 배신자 소리 들을 만큼 성적이 잘 나오기는 했다.
아는 게 많으니 적을 것도 많을 수밖에.
그래도 공부를 따로 하지 않은 건 사실이니까, 거짓말은 아니지.
한수철이 억울하다는 듯 도혁을 보고 외쳤다.
“공부하는 사람이 성적 잘 받는 정의로운 세상에서 살고 싶다. 그리고 우리 지금 이러고 있을 마음의 여유가 없다고.”
“왜?”
“오늘 공익광고 공모전 결과 발표일이야.”
어느덧 추워졌고, 기말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으며, 공익광고 공모전 결과 발표일이 되었다.
시간, 참 빠르다.
도혁은 투덕거리는 한수철과 이지원을 바라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소슬바람을 타고 구름이 빨리 지나가고 있었다.
시쳇말로 20대의 시간은 20㎞, 30대는 30㎞, 40대는 40㎞라고 했던가.
회귀한 도혁의 시간은 어떤 속도인 걸까. 분명 전생의 20대 때의 도혁이 느낀 시간의 속도보다는 체감적으로 훨씬 빠르게 느껴졌다.
영혼이 40대라서 그런 건가.
하긴 남들보다 두 배의 인생을 살고 있으니, 이 정도 빠르게 내달리는 건 당연한 건지도.
다른 사람과 달리 두 번의 기회와 행운이 주어졌다.
과거의 여러 마케팅 사례들을 조합해 새로운 캠페인을 벌이면서 조금씩 미래가 달라지고 있었다.
바뀐 미래를 제대로 설계하는 것이야말로 두 번 살게 된 운명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도혁은 새삼 두 번째 삶에 대한 각오를 다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침 최철우가 도서관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흘깃 도혁 쪽을 보곤 휙 돌아서 가버렸다.
또다시 선배를 보고 인사도 하지 않는 최철우의 모습을 본 이지원이 발끈했다.
“저게 아주 막 나가는구만. 분명히 우리 보지 않았니?”
“내버려 둬. 저렇게 살다가 죽겠지.”
“전에도 그렇게 말하더니. 도혁이 너는 속도 좋다. 확 가서 내가 한마디 할까?”
“됐네요. 쓸데없는 데 에너지 낭비하지 말고 공부나 하러 갑시다.”
최철우가 전생과 달리 어디까지, 어떤 방식으로 흑화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게 있었다.
그 비열함의 시작은 콤플렉스에서 비롯됐다는 거.
원래도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번 공모전을 치르며 확신했다.
전생에서도 최철우는 도혁의 아이디어를 질투했었다.
자신은 감각이 없다며, 배우고 싶다며 붙어 다니던 그가 뒤통수를 치고 카피를 훔쳐 간 건 콤플렉스 때문이었다.
굳이 엮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저딴 놈 상대하기엔 할 일이 너무 많은 시간이다.
다만, 다시 한번 내 삶을 방해한다면 그때그때 제대로 밟아줄 생각이었다.
도혁은 최철우에 대한 생각을 물리고 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의외로 기말고사를 위해 공부를 해야 할 과목은 많지 않았다.
2학년이라 전공은 오픈북이 많았고, 이진태 교수의 과목들은 에모라 공모전 대상으로 학점을 약속받았다.
교양과목 역시 전략적으로 영어를 주로 수강했기에 따로 공부할 것은 거의 없었고.
“몇 과목 안 되는데 쭉 한번 달려볼까?”
“그래도 요즘은 좀 살 것 같다. 이제 슬슬 탁기준 선배 거 매체 전략 수립해야지?”
“응. 그거 대충 큰 그림은 그려놨는데, 일단 시험부터 보자고!”
야심 차게 앉았는데.
“지원아, 저기 도혁이 잔다.”
“이이구. 일단 시험공부부터 하자고 큰소리치더니. 오 분이나 지났니?”
한수철과 이지원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도혁을 재밌다는 듯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을 때였다.
“명도혁! 수철아!!”
“쉿! 태오 형! 쉿!”
흥분한 강태오의 목소리에 한수철이 손가락으로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했다.
강태오가 손짓하며 그들을 불렀다.
“빨리 나와봐. 도혁이 데리고! 얼른.”
“도혁이 자는데요, 형.”
“지금 잠이나 잘 때가 아니야. 아우 이 자식 왜 이렇게 깊이 잠들었냐. 여기가 제집 침대인 줄 아나.”
“책 펴자마자 잠들었어요.”
강태오가 도혁의 어깨를 세차게 흔들었다.
“어! 태오 선배 왔어요?”
“쉿. 야. 명도혁, 너 자고 있을 때가 아니야, 지금.”
“네?”
“둘 다 얼른 밖으로 나와봐.”
강태오가 뜸을 들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밖으로 나온 도혁은 잠이 덜 깬 눈으로 어리둥절한 채 그를 쳐다보았다.
“나 전화 받았어!”
“전화요? 어! 설마!!”
“맞아. 너네가 생각하는 그 설마.”
“그럼! 결과 나온 거예요?”
도혁과 한수철이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강태오가 웃으며 핸드폰을 높이 들어 올렸다.
“맞아. 공익광고 공모전 결과, 발표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