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48화
“설마 일반인 심사위원인가?”
도혁은 에모라 화장품 대회의실 문을 열자마자 눈을 끔뻑였다.
회의실 한가운데 자리에 앉은 다섯 명의 심사위원, 그리고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객석에는 젊은 남녀들이 앉아 있었다.
언뜻 봐도 백 명은 되어 보이는 뜻밖의 관중을 보고 공모전 팀들이 어안이 벙벙한 채 서 있었다.
“공모전 결선 참가자들이시죠? 이쪽으로 오세요.”
미리 마련된 대기석 쪽으로 안내를 받았다.
이지원이 목을 쭉 빼어 주변을 둘러보곤 속닥거렸다.
“대학생인 것 같아. PT 점수 매기려고 부른 건가?”
이지원의 말을 듣기라도 한 듯 사회자가 앞으로 나가 PT 룰을 설명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에모라 화장품 대학생 공모전 결승 사회를 맡은 홍보팀장입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네. 반갑습니다.”
“오늘은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예선을 통과한 네 팀의 대학생 참가자들이 발표를 위해 자리했는데요, 우선 에모라 화장품의 신규 론칭 상품에 관심을 가져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주변을 한번 둘러본 홍보팀장이 심사위원단을 소개했다.
“먼저 오늘의 심사위원을 소개하겠습니다. 에모라 화장품의 대표님을 비롯해, 전무님 등 임원진 여러분이 모두 참석하셨습니다. 박수로 맞아주세요!”
심사위원들이 객석을 향해 묵례했다.
맨 앞자리에 이진태의 모습도 보였다.
P대학 팀이 두 팀이나 결선에 올라 심사는 못 하고 참관하러 온 듯했다.
이진태는 평소 장난스러운 모습을 쏙 빼고 엄숙하고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가 도혁 팀을 잠깐 바라보더니 엄지를 살짝 추켜올리며 격려해 주었다.
도혁은 미소로 화답했다.
심사위원 소개가 끝나고 드디어 사회자가 의문의 객석에 관해 말해주었다.
“오늘 이 자리에는 에모라 화장품의 관계자 외에 특별한 게스트 분들을 초대했습니다. 이번 공모전 결선에서는 소비자인 일반인 심사위원 제도를 도입했어요. 서울 시내의 남녀 대학생 100분을 오늘의 일반인 심사위원으로 모셨습니다. 어려운 걸음 해주신 여러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주변이 조금 웅성거리자 소음을 정돈하며 사회자가 순서를 정하기 위해 발표자를 불러 모았다.
도혁은 일반인 심사위원을 바라보며 내심 감탄했다.
‘타깃 홍보 하나는 제대로 하는구만. 대학생 공모전에 심사위원 신청까지. 이것만 해도 샘플 뿌릴 DB(Database, 고객정보) 엄청 확보했겠어.’
CRM(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 고객 특성에 기초한 마케팅 활동), 그러니까 고객 맞춤형 서비스의 초창기 단계에 진입한 시점이었다.
에모라 화장품은 이걸 이용해 새로운 마케팅의 활로를 넓혀보려는 것이다.
잠깐 생각에 잠겼던 도혁은 빠른 손길로 기획안의 맨 마지막 줄을 지우고 새롭게 무언가를 써 내려갔다.
어느덧 순서를 뽑고 대기석으로 돌아온 한수철이 순번이 적힌 공을 보여주었다.
“4번. 마지막 순번이야.”
“잘됐네.”
“뭐? 성질 급한 명도혁이 웬일이래. 매도 빨리 맞는 게 좋다면서.”
“오늘은 아니야. 뒷부분을 급히 수정 중이거든.”
무슨 말이냐는 듯 바라보는 한수철과 팀원들에게 고친 수정안을 보여주었다.
“이 부분을 강조하면 어떨까?”
“대박. 명도혁 미쳤다. 이걸 방금 생각해 낸 거야?”
“대학생까지 불러 모은 것을 보면 대고객 일대일 마케팅에 상당히 신경을 쓰는 모습이야. 그래서 생각해 봤지. 개념은 이해했지?”
“응. 개념 자체는 간단하니까. 이런 건 쉽지만 이걸 생각해 내기가 어려운 거잖아. 근데 시나리오 수정하고 발표 가서 제대로 말하려면 시간이 필요하긴 해.”
“그래서 마지막 순서라 잘됐다고 말한 거야.”
“오케이!”
한수철이 바뀐 기획안을 바라보며 PT 시나리오 수정에 들어갔다.
순번이 확정되고 소란한 실내가 정돈되었다.
사회자가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발표 순번이 모두 확정되었습니다. 이번 대회 결선 통과자 네 팀 중에는 두 팀이 P대 광고홍보학과인데요, 그중 한 팀이 첫 번째 발표네요. 발표자 앞으로 나와주세요.”
놀랍게도 앞으로 나선 것은 최철우였다.
[1학년을 발표자로 세웠네. 민폐 끼치기 싫어서 발표하겠다고 했으려나?]
놀란 이지원이 메모를 적어서 보여주었다.
그녀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치며 입술을 깨물었다.
[얼마나 잘하는지 두고 보자.]
도혁은 이지원이 적은 메모를 보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잘할 거야. 최철우가 발표 하나는 잘하거든.
사람들 눈에 띄는 것들은 귀신같이 잘하고 챙기는 최철우였다. 그게 얄밉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었지.
카피라이터 출신인 최철우는 발표를 할 일이 흔치 않았음에도 제작 발표회 등에 적극적으로 나서곤 했었다.
‘최철우가 나오는 줄 알았으면 내가 발표할 걸 그랬나.’
그래도 한수철이 꾹꾹 잘 밟아줄 거라고 굳게 믿으며 무대의 정면을 바라보았다.
최철우가 발표를 시작했다. 그의 얼굴은 긴장으로 조금 굳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P대 광고홍보학과 1학년 최철우라고 합니다.”
“1학년?”
“발표자가 1학년이라고? 와! 능력 있나 보다.”
이걸 노린 건가.
대학생 심사위원들이 1학년이라는 말에 동요하고 있었다.
최철우가 안경을 한 손으로 추어올리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저희 P대 광고홍보학과 학생들은 최근 브랜드 네이밍 과제를 받았습니다. 살아 있는 마케팅의 전설, 이진태 교수님의 과제였는데요. 거기서 채택된 안이 바로 저희 팀에서 만든 스킨엔 푸드입니다.”
잠시만. 최철우!
도혁 팀 멤버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어이없어 했다.
최철우가 과제 팀원이었던 건 맞지만 본인의 팀이 브랜드 네이밍을 만든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벌떡 일어나 아니라고 외칠 수도 없고,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 그래, 기를 쓰고 달려봐라. 구경해 줄 테니까.’
도혁은 이를 악물고 최철우 팀의 발표를 지켜보기로 했다.
최철우는 잠깐 도혁 팀을 바라보더니 마이크를 고쳐 잡았다.
“그럼 본격적으로 저희 팀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스킨엔 푸드. 피부가 먹는 화장품이라는 주제를 저희는 이렇게 풀어봤습니다.”
기획 방향과 시장조사 등 기초 설명을 간단하게 끝낸 최철우가 시안을 열었다.
클릭과 동시에 화면에는 화장품 크림을 떠먹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펼쳐졌다.
“아이가 먹어도 되는 화장품, 그만큼 순수한 제품이라는 것을 강조한 광고입니다.”
최철우답게 잘도 베껴갔다.
사실 이 정도 베껴갈 것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브랜드 네이밍 회의 당시 사람이 직접 먹는 CF 방향에 대해 논의한 적도 있었기에.
그걸 안 베껴갔으면 최철우가 아니지.
도혁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화면 속의 시안에 집중했다.
광고계의 3B 중 하나인 ‘Baby’를 사용한 광고의 비주얼은 훌륭한 편이었다.
3학년 선배 중에 포토샵을 잘 만지는 사람이 있는지 제법 괜찮은 시안이 나왔다.
이어지는 CF-콘티 역시 자연주의를 강조했다.
순진한 모습으로 화장품 크림을 떠먹는 아이.
“어머, 얘 화장품 먹었어. 어떡해.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니야?”
“괜찮아.”
“괜찮긴! 자기가 화장품 연구한다고 아무 데나 두니까 애가 떠먹은 거잖아.”
“괜찮다니까. 이거 봐.”
에모라 화장품 연구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아이와 함께 화장품을 함께 떠먹는다.
“어머, 뭐 하는 거야?”
“먹어도 될 만큼 건강한 재료로 만들었으니까 안심해.”
아이처럼 순수하게. 자연의 순수함을 믿습니다. 스킨엔 푸드CF 방영이 끝나고 주위가 조용해졌다.
‘이 방향성은 약간 의문인데?.’
도혁은 인상을 찌푸리고 CF 속 어린이를 바라보았다.
아이가 정말 화장품을 먹는 모습이 TV에 방영되는 것은 너무 위험해 보였기 때문이다.
공중파 광고는 아이들이 따라 할 수도 있는 만큼 공익적인 부분도 신경을 써야 한다.
먹을 수 있을 만큼 자연주의라는 컨셉은 베껴갔지만 이걸 저렇게 풀어가다니.
너무 무리수를 둔 것으로 보였다.
사회자와 심사위원들의 반응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이가 화장품을 먹는 장면에 거부감이 든 모습이었다.
물론 공익적인 면뿐 아니라 마케팅적으로도 문제가 많았다.
이진태 교수가 최철우 팀의 에모라 광고에는 손을 대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이걸 보고 지적하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이 광고는 2030 화장품 광고라기보다는 아토피 어린이를 위한 민감성 화장품 광고에 적합해. CF 안에서 타깃을 잘못 보여줬어.’
도혁의 생각처럼 이진태도 복잡한 심경인 모양이었다.
눈썹을 잔뜩 찌푸린 이진태가 다이어리에 뭔가를 휘갈기고 있었다.
“아이가 화장품을 먹는 모습이 파격적이면서도 좀 놀라웠는데요. 아무튼 첫 번째 팀의 발표가 끝났습니다. 다음 팀 나와주시죠.”
사회자의 진행으로 두 번째 팀인 S대 발표자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걸 본 이진태가 자리를 고쳐 앉으며 턱을 어루만졌다.
S대 광고홍보학과는 P대와 오랜 숙명의 라이벌 관계였다.
이진태가 가는눈을 뜨며 S대 발표자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십니까. 우선 이 자리에 서게 되어 무한한 영광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또한 오늘 함께 자리해 주신 심사위원과 대학생분들 반갑습니다.”
S대 팀은 최철우 팀과 대조적으로 서론이 길었다.
인사가 길 때 알아보긴 했는데, 시장조사부터 기획안 발표까지 지루하게 발표가 이어졌다.
심사위원들이야 체면이 있으니 크게 동요하지 않았지만, 대학생 심사위원들의 얼굴은 썩어갔다.
그만큼 굉장히 지루했다.
발표 자체는 크게 나쁘지 않았지만 진행이 미숙했다고나 할까.
깔끔한 초록의 시안이 나오기도 전에 모두 지쳐 버렸다.
‘시안은 무난하네. 그린의 이미지와 자연 재료를 잘 버무렸어. S대 제법인데?’
하지만 일반인 심사위원에게 좋은 반응을 얻기는 어려워 보였다.
눈에 띄는 면이 없이 고만고만한 기성품 같다고나 할까.
오히려 광고대행사에서 제안할 법한 상업적인 스타일이었다.
에모라가 대학생 공모전을 했을 땐 신선한 걸 기대했을 텐데. 공모전의 취지를 거스르는 무난한 광고였다.
세 번째는 Y여대의 차례였다.
20대 여성에게 충분히 어필할 만한 비주얼의 상큼한 광고안을 가져왔다.
“저희는 걸 그룹 모델을 추천합니다. 고등학생부터 타깃을 잡아가자는 의미인데요, 1, 2년만 지나면 대학생이 될 친구들이니까요. 물론 대학생에게도 선호도가 높은 모델로 제안합니다.”
발표자가 보여준 광고 시안 안에서는 당대 최고의 걸 그룹이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어이구, 다른 팀은 몰라도 이 팀 광고안으로 가면 에모라 망하겠네.’
전생에 저 걸 그룹의 메인 보컬이 팀 내 불협화음을 폭로했던 기자회견장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한동안 1면 기사를 장식했었지 아마.
머지않아 폭망할 걸 그룹을 모델로 사용한 시안을 끝으로 세 번째 팀의 발표가 마무리되었다.
에모라가 걸 그룹 따라 망하지 않도록 우리가 나설 차롄가.
도혁이 한수철에게 눈짓을 보내고 둘이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의 마지막 팀입니다. P대의 발표를 보시겠습니다. 어, 이 팀은 발표자가 둘인가요?”
“아니요. 저는 연기자인데요?”
도혁이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제가 직접 시연하겠습니다. 준비한 CF 먼저 보시죠.”
발표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