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47화
‘이래도 되는 걸까?’
중간고사의 마지막 날. 도혁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강의실을 나왔다.
기업홍보론, 카피라이팅, 광고 크리에이티브 전략, 커뮤니케이션학 개론그리고 카피라이팅까지.
평소 가지고 있던 광고에 대한 나름대로의 철학을 휘갈기고 나와 버렸다.
특히 21세기 미래경영론이라는 과목에서는 회귀 전 알고 있던 성공적인 미래 전략을 예견했다.
교수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에라이, 모르겠다. 난 정확한 전망을 써주고 나왔어.’
자판기 커피를 뽑아 들고 벤치에 앉았는데, 한수철이 강의실을 나오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으…… 망했어. 망했다고!”
“안 망하는 게 이상한 거 아니냐? 우리 공부 안 했잖아. 어! 한수철, 설마 공부했냐?”
“도혁아. 학생의 본분은 공부야. 전혀 안 하진 않았지. 하나 안 하나 결과는 똑같겠지만. 두 시간 자고 훑어봤는데 그냥 잠이나 잘걸.”
“와, 독하다 한수철. 일주일 내내 밤새우다시피 에모라 PT 준비했잖아. 에라 모르겠다. 그래도 중간고사 끝났는데 맥주라도 한잔?”
“그럼 그럼. 공부는 안 했어도 술은 먹어야지!”
“강태오 선배랑 진우도 데려가자. 둘 다 어제 시험 끝났어.”
“콜!”
그렇게 공모전 팀이 모여 호프집으로 향했다.
입구에 들어선 한수철이 소리를 질렀다.
“어! 전서윤이다!”
“올~ 깨끗한 참소주 캠페인 시작했나 보네.”
한수철이 가게 입구에 설치된 선서윤의 키만 한 스탠딩 배너를 보고 소리쳤다.
호프집 실내의 한가운데 붙은 포스터 속에서는 전서윤이 해사하게 웃으며 소주를 권하고 있었다.
기존의 섹시한 광고보다 청순하고 깨끗한 느낌의 포스터가 오히려 한눈에 시선을 끌었다.
“이거 누구야? 와, 엄청 청순하네. 여친 느낌?”
“전서윤도 모르냐? 요즘 메디컬 드라마에 나오잖아. 푸른거탑.”
“아! 아! 그 간호사? 와, 이렇게 예뻤어?”
슬쩍 들은 호프집 손님들의 반응도 상당히 좋았다.
전서윤이 출연한 드라마도 시청률이 고공 행진 중이었고.
도혁이 보기에도 지금껏 본 전서윤의 모습 중 제일 아름다웠다.
“뿌듯하다. 크으. 포스터 잘 뽑혔네. 실물 잘 나왔네!”
“잠깐만. 실물이라니? 전서윤 본 적 있어?”
“이 광고 태강애드에서 우리가 진행한 캠페인이에요.”
강태오의 말에 한수철이 감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진짜 이렇게 보니까 더 감동이다. 도혁이 너는 아니냐?”
“나도 그래. 전서윤 씨가 카메라 감독님한테 밥 사야겠는데?”
광고인들이 제일 뿌듯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우연히 어느 자리에서 제 손으로 만든 광고를 만날 때면 저도 모르게 속으로 웃게 된다.
아무도 내가 쓴 카피인 줄 모르겠지만 혼자 괜히 뿌듯하기도 하고, 좀 부끄럽기도 하고.
아무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 몰려들곤 한다.
도혁은 전서윤의 포스터를 바라보며 깨끗한 참소주를 시켰다.
“아주머니, 맥주 두 병이랑 깨끗한 참소주 한 병 주세요.”
“아니, 여기도? 저 아가씨가 예쁘긴 예쁜가 봐요. 남자 대학생들이 맥을 못 추네.”
“참소주 잘나갑니까?”
“냉장고에 빈 자리 보이죠? 저 칸이 전부 참소주 자리예요.”
이런 말 들을 때면 더 뿌듯하다.
광고는 상업 예술이고 잘 팔린다는 건 그만큼 좋은 광고를 만들었다는 방증이니까.
“이 광고를 명도혁이랑 한수철이 만들었다는 거야?”
“태강애드 신입팀이 모두 같이 한 거예요.”
“겸손하기는. 아이디어 도출부터 연기까지 도혁이가 다 진행한 거나 마찬가지예요.”
“역시 우리 동아리 최고의 연기자답구만!”
도혁은 연기 쪽으로 이야기가 흐르는 걸 막으려 급히 소주잔을 들었다.
도혁은 깨끗한 참소주로 넉 잔의 폭탄주를 만들었다.
모두 폭탄주 잔을 높이 치켜들자 제품 자랑을 늘어놓았다.
“깨끗한 참소주는 폭탄주로 만들면 더 맛있어요.”
“소주가 다 똑같지 인마, 이 자식 이거 팔불출이네.”
캠페인을 진행하는 모든 제품을 먹고 마시고 쓰면서, 정말 그 속에 푹 빠져서 카피를 쓰곤 했었다.
전생에 듣던 소리를 현생에서 들으며 명도혁, 천생 광고쟁이다 싶어 피식 웃고 말았다.
오랜만에 듣는 팔불출 소리, 참 반가웠다.
이진우가 포스터를 유심히 바라보며 신기해했다.
그러곤 조금 의아한 듯 물어보았다.
“요즘은 소주 광고를 저렇게도 하나 봅니다?”
“다른 술 광고랑 많이 다르지?”
“네. 그런데 저는 이쪽이 훨씬 더 좋습니다.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얼굴이에요. 전서윤이라고 했던가요?”
“왜, 좋아하는 스타일이야?”
“네. 청순하고 설레는 얼굴이에요. 아, 연예인 보고 이런 거 처음인데, 막 두근두근합니다.”
역시, 모델 선정 하나는 확실히 잘된 것 같다.
도혁은 소주잔을 채우며 전서윤의 포스터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역시 포스터를 바라보던 강태오가 시안 디자인에 대해 물어왔다.
“광고 아이디어도 좋지만 시안도 정말 잘 뽑혔는데? 태강애드 디자인팀 수준이 좀 높나 봐?”
“저거 신입이 만든 시안 조금 손본 거야. 우리 팀에 최민아라고 어마어마한 신예가 있거든,”
디자인에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는 강태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걸 신입이 그렸다고?”
“맞아. 미래가 더 기대되는 디자이너지. 선배도 그렇고.”
“에이, 난 저 정도 되려면 멀었지.”
“태오 선배도 만만치 않아. 선배 디자인은 선이 굵은데 섬세해. 그만큼 아이러니하면서 집요하고 아무튼 또라이 같아.”
“야! 또 또라이냐?”
“진심인데. 칭찬이고.”
“으이구, 술이나 먹자.”
극찬이라는 걸 알아챈 강태오가 술잔을 채웠다.
민망해하는 그를 보고 도혁이 웃으며 화제를 돌려주었다.
“대학가 술집에서 이런 분위기인 거 보면 전체적으로 반응이 좋겠지?”
“그렇겠지. 캠페인 대박의 냄새를 맡았다니까?”
“확인해 봐야겠네.”
도혁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왜, 전화 올 데라도 있어? 올~, 여자 친구?”
“깨끗한 참소주 광고 풀렸으니까 반응 좀 보려고.”
“어? 핸드폰으로 반응을 어떻게 봐?”
이런, 스마트폰이 아니구나.
민망해 다시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으려 할 때였다.
-따르릉
“어! 에모라 화장품 홍보팀인데?”
“받아봐! 도혁아, 빨리!”
모두의 시선이 핸드폰에 꽂히고 도혁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명도혁 씨죠?
“네. 그렇습니다만. 네, 네. 알겠습니다.”
간단한 통화를 마친 도혁에게 질문이 쏟아졌다.
“뭐래?”
한수철이 침을 꿀꺽 삼키며 도혁을 바라보았다.
“본선 통과래. 사흘 뒤, 에모라 화장품 본사에서 발표하란다.”
“와!!! 대박. 진짜 다행이다!”
“축하합니다. 선배님!”
“축하한다. 이야, 너네 진짜 1억 타 오는 거 아니냐? 대상이 1억이지?”
“네! 상금 타면 크게 한턱 쏘겠습니다!”
축하의 인사가 쏟아지고 한수철은 감격해 날뛰었지만, 도혁은 담담했다.
뭐, 예상한 결과 아닌가? 본선 탈락 같은 건 아예 그의 머릿속에 있지도 않았다.
강태오가 방방 뛰는 한수철을 진정시키며 걱정스레 물었다.
“근데 일정이 빡빡하네. 공익광고는 그래도 여유가 좀 있잖아. 한 달 반 정도는 시간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사기업인 데다가 론칭 캠페인의 일환으로 진행하는 거라서요.”
“하긴. 관공서 공모전 기간이 좀 긴 편이긴 해.”
“그만큼 피도 마르죠. 저는 빨리 해치워 버리는 게 속 편하고 좋더라구요.”
“그래서 해치울 준비는 되어 있고? 사흘 뒤라고 했나?”
“네!”
도혁의 자신감 넘치는 대답에 한수철이 숟가락을 얹었다.
“우리는 출격 준비 완료입니다. 장전 빵빵해요.”
“올~ 자신감 터지는구만. 좋아! 그럼 한잔할까? 우리 전서윤 배우 소개받을 막내, 폭탄주 한 잔씩 더 말아봐!”
“넵! 선배님.”
이진우가 번개와 같은 손길로 폭탄주를 만들었다.
“크, 술이 착착 입에 감기는구만. 기분도 좋고 전서윤 배우 얼굴 보니까 더 좋고!”
“중간고사 망쳐서 또 좋고!!”
“야! 명도혁!”
도혁이 장난을 치며 빈 술잔을 다시 채웠다.
“중간고사도 제물로 바쳤는데 공모전 두 건 모두 우승해야지.”
“아우, 듣기만 해도 좋네. 그럼 우승합시다!”
“더블 우승할 준비 됐습니까!”
“됐습니다!”
깨끗한 참소주 폭탄주로 승리를 다짐했다.
깨끗하게 이겨줄 것 같은 예감이 몰려드는, 중간고사의 마지막 날이었다.
* * *
삼 일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에모라 화장품 경쟁 PT 대기실.
최종 결선에 오른 대학생 4팀이 광고주 앞에서 직접 발표할 기회를 얻었다.
팀원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대기실에 모여 앉았다.
PT 시나리오를 검토 중인 한수철에게 다가가 격려의 말을 건넸다.
“준비됐지?”
“응. 이번 발표는 도혁이가 했으면 했는데.”
“아니. 지금 이 순간,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 1등 프레젠터는 한수철이야. 그리고 난 다른 역할이 있잖아?”
도혁은 한수철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
한수철이 대한민국 1등 프레젠터라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전생이든 현생이든, 도혁의 가슴속에 최고의 발표자는 한수철이었다.
그리고 도혁은 오늘의 역할이 정말 따로 있었거든.
“지원아. 나 떨고 있냐?”
“명도혁 하나도 안 떠는데?”
아니, 떨리는데?
도혁은 오늘 연기를 할 예정이었다.
발표 중간에 연극처럼 직접 CF를 시연할 계획이다.
아마 대학생만이 할 수 있는 재기발랄한 발표일 것이다.
프로 광고대행사에서 연극처럼 CF 시연을 한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일 테니까.
연기를 누가 하느냐 옥신각신하다가 제비뽑기를 했는데, 또 도혁이 걸려 버렸다.
‘이번 생은 연기자를 할 팔자인가.’
탄식할 정도로 연기를 계속하고 있건만, 이놈의 연기는 하나도 늘지를 않는다.
아무튼 오늘도 발 연기를 시전하며 에모라 화장품 관계자들을 깜짝 놀래킬 작정이었다.
도혁이 표정과 대사를 연습하며 혼자 오글거리고 있을 때였다.
대기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최철우 팀이 들어왔다.
“…….”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도혁은 선배를 보고 인사조차 하지 않고 눈을 돌리는 최철우를 노려보며 3학년 선배들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그래. 도혁이랑 수철이 팀도 결선에서 붙었다고 하더라. 고생 많았지?”
“아닙니다.”
“근데, 야 인마. 최철우. 너는 선배들 보고 인사 안 하냐?”
최철우 팀의 3학년 선배가 그를 보고 지적했다.
그 목소리에서 무언가 삐그덕, 불협화음이 느껴졌다.
‘저 자식 공모전 준비하면서 밑천 드러났나 보네. 선배들 고생 좀 했겠다.’
도혁이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최철우에게 말했다.
“인사는 뭐, 받은 걸로 하고. 준비는 잘했냐?”
“네. 브랜드 네이밍 컨셉대로 잘 반영했습니다.”
“잘했네. 그럼 파이팅해라.”
최철우가 도혁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입꼬리를 억지로 비틀어 올리는 찜찜한 저 표정.
순간 훗날의 최철우 국장이 지었던 비열한 웃음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하여간 이래저래 거슬리는 자식이 아닐 수 없었다.
도혁은 일단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개의 공모전 중에 첫 번째 대결이네. 이거부터 먼저 접수해야지.’
거슬리는 최철우 팀을 뒤로하고 대회의실로 발을 옮겼다.
문을 여는 순간, 도혁 팀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저게 뭐야? 지금 내가 뭘 본 거지?”
쏟아지는 조명에 부신 눈을 끔뻑이며 시야를 정돈해 봤지만 이건 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