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46화
“우리 CF 콘티 3개로 가자.”
“뭐?? 명도혁!”
“나 귀 안 먹었다. 왜 이렇게 소리를 질러.”
귀를 틀어막은 도혁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자, 잠시만요. 저기 제가 수업 끝나고 들어오느라고 늦었는데요. 콘티가 몇 개라구요?”
“진우 왔구나. 우리 콘티 기술자 생각을 못 했네.”
출입문을 열며 들어오던 이진우가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며 도혁을 바라보았다.
이진우한테 미안하긴 하다. 그려줘야 할 그림이 3개로 늘었으니까.
심지어 이진우는 애드포인트 공익광고에 참여 중인 데다 광고홍보학과도 아니지 않은가.
“3개가 너무 많긴 하지? 내가 최대한 쉽게 그릴 수 있도록 카피로 커버를 쳐볼게.”
“그게, 강태오 선배도 공익광고 공모전 콘티를 하루에 몇 개씩 그려보자고 하셔서요. 제가 만화과로 진로를 틀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습니다만?”
“아이고, 우리 진우 지문 다 닳겠네.”
“정말 그렇습니다.”
“미안하다 진짜. 근데 이건 정말 3개 안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흠. 선배님께서 안 되는 건 당당하게 말하라고 하셨죠?”
그걸 지금 말한다고? 인생의 진리를 설파하며 이끌어준 명도혁에게?
도혁이 씁쓸하게 이진우를 바라보았다.
이진우가 당당하게 자신의 뜻을 밝혔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공모전 두 개의 콘티를 그려야 해서 자신은 없습니다. 다만 우선순위를 정해주시고 수정을 줄이면 가능할 것도 같아요.”
“수정을 줄여라?”
“네. 가급적이면 초안에 손을 안 대는 방향으로 가야 한 장이라도 더 그리니까요.”
이진우 그렇게 안 봤는데 똑똑한 크리에이터네.
초안보다 수정이 오백 배는 빡빡하거든.
기획자 입맛에 맞추어 고치는 게 카피 백 줄 쓰는 것보다 힘들었던 과거의 기억이 저절로 떠올랐다.
도혁은 속으로 웃으며 이진우의 말에 동조했다.
“그래. 수정 최소한으로 줄일게. 컨셉 브리핑도 확실히 해주고. 그럼 오케이? 해주는 거다?”
“넵! 알겠습니다. 참 그리고, 이 공모전 상금도 나누는 거죠?”
“당연하지 인마. 지문이 닿도록 그리라고 하고 돈 떼 먹겠냐?”
어차피 최철우 자식도 없으니 이진우와 상금을 나누어도 손해는 없었다.
‘그나저나 분위기 많이 바뀌었네. 이진우 이제 아싸에서 좀 벗어나는 느낌인데?’
할 말도 또박또박 잘하고 쉽게 팀원들과 융화되는 모습이었다.
도혁은 새삼 그가 죽지 않고 함께한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그리고 훌륭한 콘티를 슥슥 재빨리 그려내는 이진우의 솜씨에는 크게 감탄했다.
“이런 식으로 인물은 한두 명 정도만 들어가게 구성하려고 합니다.”
“샘플로 그려 온 거야? 와, 잘 그렸네. 구도도 완전 좋아.”
이진우가 칸을 나누고 콘티 그릴 준비를 시작했다.
“그럼 다시 회의 시작하자.”
“콘티 그릴 사람이 옆에 앉아 있으니까 뭐랄까, 좀 고려하게 된다. 그림이 산만하진 않은지, 그려냈을 때 어떤 느낌일지.”
“맞아. 도혁아, 아까 했던 말 이어서 해봐.”
한수철이 펜을 들며 도혁이 제안했던 3가지 CF에 대해 물었다.
“아직 생각이 완벽하게 정리되진 않았지만 아이데이션 단계니까 대략적으로 말해볼게. 일단 첫 번째, 자연주의 화장품의 주요 타깃인 2030 여성을 위한 광고는 대학생 모델을 써야겠지. 아주 스탠더드한, 그러면서도 자연주의를 강조하고 깔끔한 이미지로 갈 생각이야. 화장품을 예쁘게 떠먹는 거지.”
“좋아. 다음은?”
“두 번째는 에모라 화장품의 기존 메인 타깃인 중년 여성. 갱년기에 쓰는 순한 화장품 컨셉으로 가면 어떨까 해.”
“한방 라인도 출시하는지 내가 다시 확인해 볼게. 아마 진행할 것 같아. 에모라에서 동양 허브 엄청 키우더라고.”
“좋았어.”
도혁이 한수철의 말에 동조하며 다음 타깃을 설명했다.
“마지막은 그러니까 서서브 타깃이 되겠지? 2030 남성이야. 나이 많은 남자분들은 이미 쓰는 화장품이 있을 거고, 솔직히 말하자면 중년 남성들은 소비의 권한이 없어.”
“와이프가 골라주는 대로 쓴다는 거야?”
“빙고. 제품에 대한 관심도 없고 권한도 없어. 아, 말하면서도 슬프네.”
돈 벌기 바쁜 아버지들이 아내가 골라주는 대로 입고, 바르던 시대였다. 특히 패션 쪽은 더 그랬고.
“근데 2030 남성도 화장품에 관심 없기는 매한가지야.”
“수철아. 지금도 관심 없어? 피부 나이 30대라는 말 듣고도?”
“잠시만요, 한수철 선배님 얼굴 나이 30대입니까?”
“삼십 대? 어머!”
팀원들의 시선이 한수철의 얼굴로 모이자 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주제에 집중하잔다.
“자자, 내 얼굴 그만 보고 회의 계속합시다. 솔직히 그날 에모라 화장품 견학 다녀오고 피부에 관심이 생겼어. 이러다가 몇 년 지나면 마흔 되는 거 아닌가 싶어서 경각심이 생기더라고.”
“그리고 20대 남자들은 사춘기 때 남은 여드름 고민도 있고, 군대에서 피부가 푹 삭아서 오는 경우도 많거든?”
“나 불렀냐?”
“부르셨습니까?”
한수철과 이진우가 동시에 대답했다.
도혁이 망가진 둘의 피부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아무튼 그래서 젊은 남자들에게도 자연주의 컨셉이 통하지 않을까 싶어.”
“이거 잘 풀어내면 괜찮겠는데?”
“그래, 우리 진우가 콘티 잘 그려줘야지.”
“맨입으로요?”
“뭐 먹고 싶냐!”
“파르페요, 선배님. 그림 그리다 보면 당이 떨어집니다!”
“또 당 떨어지는 사람!”
당연히 모두 손을 들었다.
저혈당을 이겨낼 달달한 음료를 입에 물고 다시 회의가 시작되었다.
아이디어가 무르익고, 들국화 영토의 밤 역시 깊어가고 있었다.
* * *
[광견 주의. 동아리방에 화나면 무는 개 있음.]
“이게 뭐냐?”
며칠 뒤 공강 시간에 동아리방에 들른 도혁과 한수철이 망연자실 문 앞에 서 있었다.
문 앞에 이상한 문구가 붙어 있었던 것이다.
동아리방 가운데 테이블에 앉아 있던 이진우가 강태오를 가리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태오 선배 폐인, 아니, 광견 됐어요. 다른 선배들이 놀리느라고 붙여놓은 거예요.”
“하아, 선배.”
“왔냐? 도혁아……. 수철아…….”
이게 웬 거지인가. 도혁은 눈을 의심했다.
텁수룩하게 기른 수염에 며칠은 안 씻은 듯한 얼굴이 까칠했다.
머리는 더벅더벅 까치집을 지었고.
영락없는 노숙자의 행색이었다.
도혁이 강태오에게 다가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우리 선배가 은근 잘생긴 얼굴인데. 하아, 어쩌다가 광견이 됐어요.”
“그, 그래?”
“빨리 수염도 밀고 세수하고 오세요. 회의 시작하게.”
도혁은 동아리방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는 인쇄 광고 시안을 보고 감탄했다.
“이야, 시안 끝내주네.”
“괜찮냐?”
“그럼요. 역시 선배는 비주얼 감이 좋아. 컨셉만 듣고도 딱, 잘도 뽑아냈네요.”
“다행이네. 이거 뽑으라고 밤새웠다, 야.”
세수를 마치고 돌아온 강태오가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기뻐했다.
강태오의 포토샵과 일러스트 수준은 대학생의 그것을 넘어선 것이었다.
도혁은 속으로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강태오 선배 계속 광고했으면 좋았을 텐데. 이번 생에는 디자인 쪽으로 계속 진로를 이어가면 좋겠다.
아무튼 감탄이 절로 나오는 인쇄 광고 시안이었다.
다만 CF 쪽은 난항을 겪고 있었다.
명쾌하게 이거다 싶은 인쇄 광고와 달리 CF는 각이 나오지 않아 고생 중이었다.
둘은 머리를 마주 대고 앉아 회의를 시작했다.
“팍, 꽂히는 게 없어. 아…… 인쇄물은 감이 딱 오는데”
“원래 인쇄 광고가 그래요. 팍, 한 번에 와닿는 게 있죠.”
“맞아. 즉각적으로 창의적이라고 느꼈던 광고는 거의 인쇄나 옥외였어.”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으며 카피와 어우러지는 인쇄 광고는 강태오의 말처럼 즉각적인 효과를 선사한다.
도혁 역시 같은 이유로 지면 광고를 가장 선호했고.
“그렇다고 CF 콘티 쪽을 포기할 거예요? 기회가 있는데, 좀 아깝지 않아요?”
“그렇지? 아직 시간 있으니까 좀 더 고민해 보자. 너네 중간고사는 잘 준비하고 있냐?”
“우리야 뭐, 기말 잘 봐야죠.”
한수철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학생의 본분에 맞지 않게 공모전 준비 중간중간에만 공부를 하는 실정이었다.
그나마 이진태 학과장이 에모라 공모전 수상자에게 성적과 상관없이 A+를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선배 그래서 폐인 됐구나. 중간고사 준비에 공모전까지 하느라고.”
“어. 집에 갈 여유가 없어. 우리 집 파주잖아.”
“하긴. 언제 왔다 갔다 해요. 그나저나 이 CF 방향이 빨리 잡혀야 우리 선배가 사람 꼴로 돌아올 텐데.”
“하아…… 잠시만!”
강태오의 눈동자에 순간 광기가 서렸다.
아, 저 눈빛 좀 무서운데.
모두 긴장한 눈으로 강태오를 바라보았다.
“안 되겠다. 우리 그냥 부딪혀 볼까? 직진으로 그냥 박아버리자고.”
“네? 선배, 그게 무슨 말이에요?”
“CF 그냥 찍어보자. 찍어봐야 감이 올 것 같아.”
“갑자기요?”
콘티만 내면 되는 공모전에 CF까지 찍어보자니.
그것도 확정안도 아닌데 무작정?
역시 직진하는 또라이 강태오다웠다.
“이게 머릿속으로 그림이 딱 안 잡히잖아. 이런 식이면 진우만 죽도록 삽질해야 돼.”
“맞습니다. 선배님! 저는 촬영, 찬성입니다!”
“그냥 화질 구려도 폰으로 찍어보자. 대충 찍어서 편집해 보면 각이 나오겠지.”
“흠, 나쁜 방향은 아닌데 연기는 누가 해요?”
“뭐?”
구체적으로 연기자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강태오가 머리를 긁적였다.
“즉흥적으로 몰아붙이지만 말고 생각을 좀 해봐요. 누가 연기를 할 거예요. 아무리 아이디어를 위한 거라지만 연기가 안 되면 머리에서 생각이 더 엉켜 버릴 수도 있어요.”
“아니, 아니지.”
한수철이 도혁의 말을 급히 끊으며 소리쳤다.
“아주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아니, 좋은 연기자를 알고 있다고 해야 하나?”
“그래? 좋은 연기자라니, 누구?”
한수철이 도혁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어라, 이거 좀 불길한데?
“야! 너 왜 나 보고 웃냐? 어?”
“내가 명배우 한 명을 알고 있는데 말이지.”
“야! 보지 마. 야! 꿈도 꾸지 마, 한수철.”
“아주 딱 맞는 배우야. 샘플 촬영에 특화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고.”
“야!”
강태오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러곤 한수철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누구야. 누구길래 이렇게 뜸을 들여.”
“그게 언제나 정답은 가까이에 있잖아요. 그쵸, 선배?”
“그렇지. 어! 설마!”
도혁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수철이 손가락으로 도혁을 가리켰다.
“태강애드에서 배출한 대배우를 소개합니다! 명도혁 배우님!”
“야이, 씨.”
“샘플 광고 연기의 달인입니다.”
“그래? 우리 명도혁이 연기를 그렇게 잘한단 말이야? 태강애드에서 해본 거?”
“선배까지 왜 이러십니까!”
“도혁아. 얼마니. 얼마면 되겠냐?”
거지꼴을 한 강태오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생긴 배우의 명대사를 흉내 내며 다가왔다.
“몇 번만 찍어보자. 우리 진우 손목 나가겠어.”
“아, 진짜. 발 연기 그 자체라고요. 한수철 저거 진짜 너 죽었어.”
“도혁 선배님 저 좀 살려주십시오. 저도 중간고사 준비해야 하는데 공모전 두 개 그림 그리느라고 토할 것 같습니다.”
강태오는 겨우 물리쳤지만, 이진우의 말에 도혁은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콘티 그리느라 매일같이 고생하고 있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방향이 확실하지 않으면 제작팀이 정말 고생 심하게 하거든.
도혁은 한숨을 내쉬며 마지못해 수락했다.
“그럼 딱 세 번만 찍어봅시다. 일단 제대로 CF안 짜고 찍어봐요. 아 정말. 한수철 너, 딱 각오해라.”
졸지에 두 번째로 광고에 출연하게 생겼다.
이번에는 명실상부한 주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