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43화
기획안에 적힌 담당 AE의 이름을 보고 도혁은 기겁했다.
[기획자 탁기준]
“저기 오네. 우리 탁기준 대리. 어이, 이쪽이야!”
“아, 잘 지내셨습니까, 선배님!”
“그래. 내가 준 선물은 잘 받았고?”
특유의 느물거리는 말투로 탁기준이 다가왔다.
그러더니 매체국 회의실로 신입들을 우르르 데리고 들어갔다.
역시 평소처럼 제 카드를 지갑에서 뽑더니 커피 심부름을 시켰다.
“아무나 커피 좀 사 오고. 이야, 오랜만이네. 잘들 지냈지?”
“네.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매체국은 좀 할 만하지 않아? 공사 같이 들어가는 정도만 시키고 있다던데.”
“태강애드보다 학교 때문에 바쁩니다. 과제로 공모전까지 하게 생겼거든요.”
“아우 과제. 나 그거 싫어서 조기 졸업했잖아. 진짜 너무 싫지 않냐? 광고홍보학과는 수업이 빡빡한데 과제도 너무 많아.”
“조기 졸업이요? 선배님 조기 졸업 하셨습니까?”
“3학년 2학기 때 취업해서 재껴 버렸지. 참, 너네 학교는 지금 전공 빡세게 듣고 취업계 내도 되잖아.”
“4학년만 가능한 줄 알았는데 3학년 2학기에도 취업계가 가능합니까?”
“학교마다 다르긴 한데 내 친구도 이진태 교수님한테 얘기해서 3학년 때 취업계 냈어.”
도혁은 귀가 번쩍 뜨였다.
솔직히 이진태의 수업을 제외하곤 고루한 이론 수업이 많았다.
건방진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그냥 도혁이 강의하는 게 나을 것 같은 과목도 있었다.
실전을 오래 하다 보니 이론과 실제의 괴리감에 찡그려질 때도 많았고.
그래도 학위는 필요하니 꾸역꾸역 다니고 있었는데,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공모전 한다면서. 거기서 상 좀 타고 과제 실적 좋으면 교수님 따라서 3학년 때도 취업계 받아주는 경우 많아. 학과장님이 이진태 교수님이지? 그분 엄청 실적주의자 아니야?”
“네. 그러신 것 같습니다.”
“공모전 대상 타버려. 명도혁 한수철 조합이면 바로 쌈 싸 먹겠네.”
희망이 샘솟는 기분이었다.
원래도 공모전에 진심이었지만, 완전 올인 해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도혁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일 년 안에 전공 필수 다 듣고 본격적으로 광고판에 뛰어들어야지.
물론 공모전에 당장 올인 할 팔자는 못 되는 듯했지만.
심부름 갔던 신입이 커피를 가져오자 탁기준이 브리핑을 시작한 것이다.
“자, 그럼 커피도 왔으니까.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저기, 선배님. 혹시 이거 급한 겁니까?”
일단 시간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도혁이 마감 기한부터 물었다.
“아, 이 건은 천천히 해도 돼. 경쟁 PT 아니고 제안 들어갈 거거든. 내가 뺏어오고 싶은 먹이가 하나 생겨서 말이지.”
“정말 다행이네요.”
“너네 바쁜 거 뻔히 아는데 설마 급한 거 주겠냐? 나도 양심이 있지.”
탁기준이 딱히 양심이 있진 않았지만 천만다행이었다.
“나도 경쟁 피티가 산더미라 급한 불부터 끄고 들어갈 거야. 너네 놀까 봐 배 아파서 일은 싸 들고 왔지만 말이지.”
“하여간 사악하십니다.”
“후배 양성에 열정적인 거라고 해주겠냐?”
“일단 대략적으로 설명만 해주십시오. 틈틈이 생각이라도 해놓게요.”
탁기준은 간략한 광고주 브리핑과 기획안 설명을 해주곤 일어섰다.
“수고하고 몸들 챙겨가면서 일해라.”
“넵! 그럼 선배님. 4주 뒤에 뵙겠습니다.”
신입들은 이 당시 성황리에 방송하던 이혼 프로그램의 유행어를 남기고 탁기준에게서 서둘러 도망쳐 버렸다.
* * *
“아우, 홀아비 냄새. 이게 다 뭡니까!”
공익 광고 공모전 준비를 위해 새벽같이 동아리방을 찾은 도혁은 코부터 틀어막았다.
“어, 도혁이 왔네. 해도 뜨기 전에 웬일이냐?”
“수업 전에 공모전 준비 좀 하러 왔죠. 선배 어제 여기서 잔 거예요?”
강태오 선배가 폐인의 꼴로 동아리방 구석에서 자고 있었다.
동아리방에서 밤을 새운 모양이었다.
물을 벌컥이는 강태오 옆에 맥주캔이 나뒹굴고 라면 국물까지 엎어져 있었다.
“애들 오기 전에 환기부터 해야겠어요. 아우, 밤새 술은 얼마나 마신 겁니까!”
“미안. 자료 조사하다가 막차도 끊기고 의식의 흐름이 끊기고. 아, 죽겠네.”
“술을 이렇게 마셨으니 그렇죠.”
“늙었나 보다. 이제 머리가 팍팍 안 돌아가. 아아!!”
“늙다니요…….”
서른도 안 된 젊은 친구가 진짜 늙은이 앞에서 별소리를 다 한다.
아무튼 둘은 대충 동아리방을 치우고 노트북을 열었다.
“어제 밤새워 좀 찾아봤는데, 사이버 불링에 의한 사건 사고가 많기는 하더라고. 왕따에 자살에, 청소년 사고도 많고 말이지.”
“그렇죠. 수법도 교묘해요.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주위 사람들도 눈치채지 못하고 혼자 앓다가 나쁜 선택을 하고. 저도 마음이 안 좋았어요.”
“특히 연예인들 공격하는 악플은 도를 넘었어. 나 어릴 때는 말이야, 천리안, 나우누리. 아름다웠는데. 왜, 인터넷 통신으로 연애하는 영화도 있었잖아.”
강태오가 그 당시에는 없던 유행어인 ‘라떼는 말이야’를 시전하며 한숨지었다.
“얼굴 보고는 못 할 말인데, 댓글은 글자 몇 개 갈기는 거니까 죄책감이 안 드는 모양이에요.”
“가족이면 그렇게 했겠어? 아무튼 너무 심하더라고.”
조사할수록 눈살이 찌푸려지는 사례가 쏟아졌다.
사이버 폭력은 이맘때쯤부터 시작해서 오랫동안 한국 사회를 괴롭히는 사회적 문제 중 하나로 대두된다.
도혁은 회귀 전 CF 모델로 함께 광고를 진행했던 모 가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이돌 출신인 그녀는 배우로 전향하며 연기력 논란에 휩싸였다.
드라마 시청률은 폭망했고 유례없을 정도로 많이 욕을 먹었다.
더불어 상대 남자 배우와 스캔들이 터지고, 지나친 악플에 시달리다가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맑고 순수한 미소가 참 예쁜 친구였는데.
도혁은 그 가수가 자살했다는 장례식 기사에도 달린 악플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었다.
-왜 죽고 난리임. 저따위 멘탈로 연예인이라니.
└사실 드라마 혼자 다 말아먹었잖아. 아직도 그 발 연기가 잊히지 않아. 아, 내 눈.
-난 얘가 왜 인기가 많았는지 항상 의문이었어. 밋밋하게 생겼잖아.
-너무 말라서 뼈다귀 같지 않았냐? 이제 감자탕집 고고-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어야 하나? 자살자한테?
-재산이 어디로 갔는지가 제일 궁금 ㅋㅋㅋ
인간은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 걸까.
아무리 연예인이 공인이나 다름없는 시대라지만 선을 넘는 악플이 이어졌다.
죽은 사람에게까지 악담을 퍼붓는 네티즌의 행태를 보고 인간으로서 회의까지 들었던 사건이었다.
도혁이 한숨을 내쉬며 눈빛을 단단히 굳혔다.
“선배, 어쩌면 한 페이지의 광고로 사람을 살릴 수도 있어요.”
“악플러의 마음을 돌려서? 하긴, 그게 캠페인의 힘이지. 사람의 마음을 설득하는 거.”
“헌혈 캠페인 광고가 성공하면 그해 헌혈자가 눈에 띄게 늘어난다고 하잖아요. 우리도 그렇게 임팩트 있는 놈으로 한번 만들어봅시다.”
“오케이!”
두 남자가 마음을 다잡고 오케이를 외치며 마주 앉기는 했는데, 막상 조금 막막했다.
도혁은 캠페인 경험이 많았지만 주로 상업 광고 위주로 진행해 왔다. 무엇보다 왕따 같은 걸 당해본 적이 없었다.
피해자의 심리나 고통을 정확히 알 수 없어 접근이 쉽지 않았다.
강태오 역시 마찬가지의 고충을 토로했다.
“왕따, 사이버 폭력. 넌 그런 거 당해본 적 있냐?”
“아니요. 저야 적당히 묻어가는 성격이라. 선배도 그런 경험 없으시죠?”
“그렇지. 이거 당해본 적도, 해본 적도 없는 일에 감정을 이입하려니 쉽지 않네. 경험자에게 인터뷰라도 따야 하나.”
이 당시에는 없었던 말이지만 소위 ‘핵인싸’인 강태오는 동아리 회장뿐 아니라 과대표까지 맡고 있었다.
정의감 넘치는 성격이라 누군가를 괴롭히는 가해자였을 리도 만무했고.
고민이 깊어갈 때, 동아리 문이 열리며 이진우가 들어왔다.
“어! 제가 1등으로 온 줄 알았는데, 선배님들 부지런하십니다!”
“나야 동아리방 붙박이장이고, 도혁이는 공익 광고 때문에 일찍 나왔대. 넌 새벽같이 어쩐 일이야.”
“저도 공익 광고 방향이라도 잡아볼까 하고 일찍 나왔습니다.”
“크으, 우리 신입, 태도가 마음에 드는구만!”
도혁은 조금 망설이다 이진우를 보고 물었다.
“혹시,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 내 말 오해하지 말고 들어. 우리가 회의하다가 좀 막혀서 물어보는 거니까.”
“그럼요! 저도 같이 아이디어 내보려고 일찍 온 건데요. 부담 없이 말씀하십시오.”
“우리 부대에 있을 때 말이지. 박성철.”
“아…….”
이진우가 말끝을 흐리자 강태오가 둘의 눈치를 살폈다.
“불편하면 난 나가 있을까?”
“아닙니다. 선배님. 다 지난 일인데요.”
“아니야. 상처를 들추는 것 같아서 꺼려진다. 그만 말하자.”
도혁의 조심스러운 말에 이진우가 옅게 웃었다.
“에이, 박성철 그 자식 사회에서 만날 것도 아닌데요. 참, 강태오 선배님은 모르시니까 제가 설명을 드리자면 군대에서 제가 왕따를 당했습니다.”
“아. 군대에 나쁜 놈들 많지. 만만해 보이면 괴롭히는 찌질이 새끼들.”
“그중에서 박성철이라는 놈이 대놓고 괴롭히곤 했는데, 도혁이 형이 저를 감싸주시고 상담도 해주셨어요. 그리고 병장님 제대하고 난 뒤에는 박성철이 전출 가서 지내기 편했습니다.”
다행히 큰 트라우마가 남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도혁은 속으로 안심하며 이진우에게 물었다.
“그래. 사이버 테러, 왕따 문제를 다루려고 하니까 박성철 생각이 나서 물어본 거야.”
“아, 저 학교에서도 왕따는 많이 당했습니다. 거의 혼자 다녔거든요.”
도혁이 머리를 긁적이는 이진우의 어깨를 툭 치며 격려했다.
“이제 질리도록 우리랑 붙어 다니게 될 거다. 아이디어 나올 때까지 우리가 너 물고 안 놓을 거거든.”
“맞아. 애드포인트 들어온 이상 너는 우리 패밀리라 이 말이지.”
강태오 선배가 웃으며 이진우의 앞머리를 헝클었다.
“문제는 우리 패밀리의 머리가 지금 정지해 있다는 거야. 사이버 테러 방지까지 방향성은 확실한데 경험이 부족해서 말이지.”
“아무거나 물어보세요. 제가 오랜 학폭의 피해자 입장에서 제대로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진우야. 힘들면 굳이 말 안 해도 돼. 우리가 사례를 더 찾아볼게.”
“에이, 이제 진짜 괜찮다니까요. 군대 다녀오면서 많이 극복했어요. 진심입니다!”
이젠 정말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진우가 어깨를 추어올렸다.
도혁은 깊게 한숨을 한번 뱉곤 이진우를 바라보았다.
“그래. 그럼 딱 한 가지만 물어볼게. 친구들이나 박성철이 괴롭힐 때 어떤 기분이 들었어?”
“일단 머릿속이 하얗구요. 수치스럽고 고통스럽기도 하죠. 쪽팔리고.”
“그래. 그럴 것 같아.”
“그리고.”
이진우가 말을 끊고 심호흡했다.
“저는 칼에 찔리는 것 같았습니다.”
“뭐?”
“말이 심장을 찔러서 피가 흐르는 기분 말입니다.”
“칼, 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