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42화
“저도 끼워주시죠.”
동아리방 문을 박차고 들어온 건 이진우였다.
들어오자마자 공모전 멤버로 끼워달란다.
태어나서 처음 하는 공모전이라고 벌써 들떠 있었다.
“그럼 이진우까지 넣어서 막강 애드포인트 팀 스타트하는 건가!”
“다른 애들은 모르겠고 일단 우리 넷이서 한 팀 만들어 버리죠. 멤버 늘어나면 상금 나눠야 해서 별로야. 올해는 상금이 얼마래요?”
“기다려봐. 대상은…… 어! 오천! 올해 후원 터졌나 보다. 상금이 많네.”
이진태가 주관하는 에모라 대학생 공모전은 사기업이다 보니 상금이 더 많았다.
에모라가 일억, 공익광고 오천. 그리고 많지는 않지만 태강애드에서 받는 월급까지.
이 당시로서는 제법 많은 금액이었다.
‘계획했던 시드 머니 최소 금액은 모을 수 있겠어. 일억은 있어야 뭐라도 시작해 보지.’
태강애드에 영원히 충성할 건 아니었기에 대학생 신분일 때 최대한 사업 자본을 모아볼 생각이었다.
회귀까지 했는데 내 스타일대로 한번 광고판 뒤집고 싶었거든.
국내외 크고 작은 공모전은 많고 경험과 아이디어도 충분하다.
들어가는 자본 없이 돈이 벌리는 황금 거위라고나 할까.
혼자 사업 자금 구상에 머리를 굴리고 있는 도혁을 이진우가 유심히 바라보았다.
“선배님. 상금 타면 저는 안 주셔도 됩니다.”
“그래. 부잣집 도련님은 안 받아도 돼.”
“예? 저 그런 거 아닌데요. 가난합니다.”
“아…….”
곧 IT 재벌의 외아들이 될 이진우였지만 아직은 때가 오지 않았는데 실수하고 말았다.
깜빡깜빡하는 건 여전한 걸 보니 뇌세포만큼은 젊은이로 돌아오지 못한 모양이었다.
도혁은 주섬주섬 말실수를 주워 담았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얼굴도 하얗고 재벌집 막내아들같이 생겨서 한 말이야.”
“그 말씀은 기분 좋습니다만, 아무튼 저는 상금 받지 않을게요. 그저 끼워주시기만 해도 영광입니다.”
‘얜 또 이러네, 이번엔 진짜 말해야겠다’
이진우는 그저 고맙다는 듯 고개를 숙였지만, 그 모습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이진우. 따라와 봐. 나하고 커피 좀 사러 가자.”
도혁이 정색하며 이진우를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진우야.”
“말씀하십시오. 선배님이 그렇게 부르시니 무섭습니다.”
“자신을 너무 낮추지 마. 사람들이 만만하게 보잖아.”
“아! 그런가요.”
“그렇게 고개 숙이지도 말고. 팀 위해서 백데이터 모으고 필요하면 발표도 하는 거야. 알겠어?”
“예? 선배님들이 계신데 제가 어떻게…….”
“아니, 아이디어 앞에서는 모두가 동등해. 그러니까 열심히 참여하고 정당한 대가를 챙겨가. 네 실속은 직접 챙기는 거라고. 내 말 알아듣지?”
“아까는 상금 가져가지 말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재벌집 막내아들 아니라며. 그래. 지금처럼 그렇게 토도 달고 네 할 말 다 하라고.”
도혁의 말에 이진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왜, 나 꼰대 같냐?”
“아니요. 감동입니다. 저한테 이런 말 해준 사람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제부터 어깨 펴고 다니겠습니다!”
“그래, 커피 사서 들어가자. 지금부터는 카페인 없이 견디기 힘들 거야.”
아이데이션이라는 걸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이진우에게 미리 경고했다.
아니나 다를까 강태오 선배가 강하게 나왔다.
“커피 땡큐! 자, 모두 앉아봐. 내가 미리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말씀하십시오. 태오 선배.”
“나 이번 공모전에 목숨 걸었다. 아마 대학 생활의 마지막 공익광고 공모전이 될 확률이 높겠지?”
“네. 선배님.”
“한수철, 내 별명이 뭐냐?”
강태오의 말을 들은 한수철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제 입으로 말씀드려야 합니까?”
“어. 괜찮아. 내 입으로 말하는 거보다 낫지 않냐?”
“네……. 강또…… 입니다.”
“무슨 뜻이야?”
“강태오 또라이요.”
“맞아. 우리 신입 잘 들었겠지? 내가 또라이, 그러니까 미친놈이라고. 건수 하나 물면 놓지를 않아요. 근데 이 공익광고 공모전은 항상 물다가 놓쳐 버린단 말이지.”
강태오의 눈동자에 짧은 광기가 서렸다.
언제 봐도 좀 섬뜩한 느낌이 드는 새까만 눈동자가 도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명도혁, 한수철! 광고홍보학과 쪽 공모전도 중요하겠지만, 역시 타이틀은 공익광고 아니겠어?”
“네. 명예롭죠. 대한민국에서 제일 권위 있는 공모전이니까요. 무조건 대상 갑니다. 저 역시 공익광고에 완전 진심입니다.”
“좋았어. 시작하자.”
그렇게 미친개와 죽음의 아이데이션이 시작되었다.
이진우가 공강 시간을 맞춰서 회의 시간표를 짜는 동안 큰 틀부터 잡기로 했다.?
CF 콘티냐, 인쇄냐.
“그까짓 거 둘 다 내버리죠.”
“어! 명도혁, 가능하겠어?”
“콘티 구현하기가 힘들지만, 올해는 진우가 있잖아요.”
“그렇지! 그림쟁이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긴데 어디서 이런 놈이 나타났냐?”
“기억하십시오! 제가 달고 온 겁니다.”
도혁이 이진우의 목에 팔을 두르며 친한 척을 했다.
이진우가 칭찬에 조금 민망해했다.
“제가 도움이 된다니 기쁩니다. 선배님.”
“도움이 되는 정도가 아니라 핵심 인재다. 인마.”
커피를 한번 쭉 들이켜고 도혁이 이어 말했다.
“그럼 팀도 완성됐고, 계획표 나올 거고, 주제 정해야겠네.”
“그래. 그놈의 자유 주제. 힌트라도 좀 주지. 공익광고 협의회는 항상 자유 주제야.”
“이슈가 되는 걸 해보는 게 어떨까?”
“이슈라면?”
다른 건 몰라도 대상만큼은 그해에 가장 화두가 되는 주제로 선정한다.
도혁이 예를 들어 설명했다.
“국정 운영이나 여론의 방향을 봐야 해. 포인트를 짚어야지. 노인 문제가 될 수도 있고 어느 해에는 다문화가 될 수도 있겠지.”
“올해는 어떤 기사가 제일 이슈가 됐지?”
“이슈도 중요하지만, 정책 방향에 국민들의 인식이 따르지 못하는 주제가 제일 좋아.”
?
팀원들이 서둘러 기사를 훑어보았다.
“여성 문제, 아동 학대, 인터넷 예절…….”
“잠시만. 수철아. 방금 뭐라고 했지?”
“인터넷 예절.”
“어! 악플 때문에 자살한 연예인, 사이버 폭력으로 학폭당하는 아이들 기사 위주로 좀 찾아보자.”
“명도혁 뭐냐, 이거 감이 온 표정인데?”
따라올 테면 따라오라던 인터넷망이 전국으로 확대되며 네티즌이 늘어나던 시절.
?더 이상 하이텔 나우누리 감성은 없다고 한탄하던 딱 그 무렵이었다.
기술이 국민 의식보다 서너 배 앞서갔던, 바로 그 분야.?
한수철의 말대로 팍, 아이디어 한 줄이 도혁의 머릿속을 스치고 있었다.
“이렇게 주제를 잡아가면 어떨까?”
도혁이 사인펜을 꺼내 들었다.
* * *
회귀 전과 가장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여유였다.
예전 같으면 태강애드를 다니면서 대학 강의에 공모전 두 건까지 진행하는 건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사람의 창의성이란 한계가 있거든.
다행히 전생에서 겪은 십수 년의 경험으로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과정이 짧아졌다.
이번 생의 나는 익숙한 히트 광고와 카피를 조합해 새로운 창조물을 만들고 있었다. 그것도 빠른 속도로 말이다.
다만, 도혁과 이 모든 것을 함께하는 한수철에게 과부하가 걸린 건 문제였지만.
“이제 몸은 정말 괜찮은 거지?”
“지금은 괜찮은데 도혁아. 우리 이러다 죽는 거 아니냐? 수업에, 태강애드, 공익광고 공모전, 심지어 에모라도 공모전 할 수도 있다면서.”
“죽는다라……. 돈에 파묻혀서 죽게 될 거니까 걱정 마.”
“뭐?”
“그런 게 있어, 인마.”
지금도 허덕거리는 그에게 굳이 수십 개의 공모전으로 사업 자금을 만들 거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으니까.
아무튼 한수철은 다 죽어갔다.
그 속도 모르고 이진태 학과장이 둘을 따로 불렀다.
“예상대로 에모라 대학생 공모전 확정됐다. 우리 과에서는 명도혁의 정의팀이 참여한다.”
“네. 혹시 몰라서 나름대로 기획 방향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역시! 명도혁. 든든하구만. 이런 인재가 전과해서 넘어오다니, 내 영어과 학과장한테 밥이라도 사야겠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한번 열심히 해보자고. 이번에 에모라에서 제대로 할 모양이야. 상금도 1억 걸었어.”
“1억이면 국내 최대 규모 아닌가요?”
다 죽어가던 한수철의 눈동자가 생생해졌다.
역시 자본주의의 힘은 돈인가 보다.
놀라는 한수철과 달리 도혁은 그 정도 규모를 예상하고 있었다.
에모라 입장에선 브랜드 네이밍을 대학생 과제로 선정했으니 마케팅 비용이 이마 엄청나게 절감되었을 거다.
“참, 그리고 공익광고 공모전 있는 건 알고 있나?”
“네. 들었습니다.”
“내가 드림팀을 짜서 대학생부를 노려보려고 하는데 말이지. 물론 내용적인 면을 도와주진 않을 거야. 그건 반칙이니까.”
“네, 교수님.”
“학부생 중에 실력 있는 친구들 모아서 밥이나 사주고 장소 제공해 줄 건데, 둘 다 드림팀에 들어오지?”
“이런. 죄송합니다. 저희는 이렇게 될 줄 모르고 동아리에서 팀을 짜버렸어요.”
이렇게 될 줄 알고 미리 팀을 짠 거였지만 도혁이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진태는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이런. 명도혁이 빠지면 너무 서운한데. 한수철도 마찬가지야?”
“네. 저도 애드포인트에서 하기로 해서요. 신청서를 이미 내버렸습니다.”
“뭐? 신청서까지? 젊은 친구들이라 그런지 동작이 빠르구만.”
이진태가 눈썹을 찡그리고 손에 쥔 명단에서 명도혁의 이름에 두 줄을 그었다.
아마도 공모전 팀 확정자 명단인 듯했다.
보려고 본 건 아닌데. 최철우의 이름이 있는 것을 얼핏 보았다.
‘광고판 좁으니까 어느 교수한테 추천받았나 보네. 우리 학과장님 머리 좀 뜯으시겠는데?’
도혁의 생각처럼 이미 이진태는 머리카락을 뜯고 있었다.?
“그럼 명도혁이도, 한수철이도 빠지고. 아이고 답답하다.”
“죄송합니다.”
“죄송은. 빠릿빠릿하지 못한 내 탓이지. 공모전 공고 뜨고 바로 불렀어야 했는데. 그럼 가봐.”
둘은 교수실을 나오자마자 태강애드로 이동했다.?
태강애드에서도 나름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는데, 매체팀이 널널할 거라고 여겼던 건 착각이었다.
일단 매일같이 광고 공사에 가야 했고, 행랑(베타 테이프 등의 광고 소재를 공사, 혹은 매체사로 전달하는 것) 심부름을 하기도 했다.
“신입들! 이거 들고 HBC 방송국으로 튀어 가!”
“네?”
“CF 소재가 급하게 바뀌었어. 소재 변경 신청은 내가 할 테니까 바로 방송국으로 들고 튀어. 지금 바로!”
“넵! 알겠습니다!”
공사와 방송국을 방문하는 일은 번거로웠지만, 도혁에게는 신선한 경험이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광고 바닥에서 인맥이 넓어진다는 점이 고무적이었다.
제작부에만 처박혀 있던 카피라이터 시절과 달리 광고 공사 직원과 부장, 각 방송사의 영업부 직원들과 안면을 틀 수 있었다.
“아씨, 차를 사든가 해야지. 공사에 방송국까지 뛰어다니려니까 못 할 짓이다.”
?
“그래도 피가 되고 살이 될 거야. 사람이 재산이잖아.”
“사람? 우리 소재 갖다주고 온 거 아니었어?”
아직은 도혁의 말뜻을 실감하지 못하는 한수철이 눈을 크게 떴다.
의아한 그의 앞에 매체팀 선배가 다가왔다.
그 선배의 말을 들은 한수철의 눈은 더 커졌다.?
“매체 계획을 수립하라구요?”
하아, 그럴 여유까지는 진짜 없습니다만? 이 회사 신입한테 너무 여러 가지 시키는데?
도혁이 난감한 눈으로 선배를 바라보았다.
“우리도 학기 중인 거 감안해서 공사나 데리고 다니려고 했는데, 담당 AE가 명도혁 씨를 지목했어. 그러게 왜 그렇게 일을 잘했어요.”
선배가 전해준 기획안에는 떡하니 담당 AE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기획자 탁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