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39화
이진태 교수의 두 번째 수업이었다.
활기찬 얼굴로 들어온 이진태와 달리 학생들은 울상을 짓고 있었다.
이진태가 벌써 컨셉을 확정해 중간 점검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나 성격 급한 거 알지? 체크 좀 해보자.”
“교수님…… 그, 그게.”
이진태가 팀별로 모여 앉은 강의실의 한가운데로 걸어 나오며 제 근처에 앉은 학생을 바라보자 그는 마지못해 그에게 노트를 내밀었다.
“아직 별거 없어서요.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네이밍 그까이 거 할 게 뭐가 있어. 머리에서 탁 떠오르는 거 쓰면 되는 거지. 이게 지금까지 했던 기획안이라는 거지?”
“교수님. 저기…….”
“내가 검토해 줄 테니까 다른 팀도 얼른 가져오라고. 이거 항상 해주는 게 아니야!”
이진태가 생색을 내며 아무 책상에 걸터앉았다.
“그린 이즈 퍼펙트. 이게 뭐야.”
“교수님, 그, 그렇게 큰 소리로 읽으시다니!”
기획안을 건넨 학생이 얼굴이 새빨개진 채 이진태를 말렸다.
“무슨 말 할지 알겠지?”
“네. 교수님 다시 잡아보겠습니다.”
“방향이 틀리면 뒤로 쭉 삽질이라서 지금 봐주는 거야. 빨리 고쳐.”
“네…….”
“여기, 이 팀도 보자.”
이진태는 열심히 강의실을 돌며 각 팀의 기획안을 봐주었다. 대부분 단칼에 잘리고 욕을 먹었지만.
“다시.”
“다시! 신토불이라니. 우리 농협 광고하냐? 화장품이잖아.”
그렇게 강의실을 휘젓던 이진태의 시선이 도혁에게 꽂혔다.
“우리 정의 팀은 신박한 거 하나 나왔나?”
“글쎄요. 아직 기획 준비 단계입니다.”
“보자, 어떤 준비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콧노래를 부르며 도혁의 앞에 의자까지 가져와 앉았다.
도혁이 한 장으로 요약한 기획안을 스윽 내밀었다.
“이게 뭐야! 어라, 명도혁!”
“네.”
도혁의 팀 기획안을 내려다보는 이진태의 눈이 커졌다.
“와, 이게 무슨 의미지? 다른 팀에 힌트가 될 것 같아서 말은 못 하겠는데, 궁금해 미치겠구만.”
언제부터 말을 아꼈다고 이번에는 나름 보안에 신중한 모습을 보이는 이진태였다.
아무튼 다른 팀에서처럼 큰 소리로 컨셉을 떠들지 않아 고마웠다.
이진태는 기획안을 돌려주며 도혁의 어깨를 툭 쳤다.
“이거 작품 하나 나오겠는데?”
“이제 시작인걸요.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니, 내가 광고 짬밥이 얼만데. 지금 완성될 그림이 상당히 궁금해지거든. 이런 건 100% 되는 기획이야.”
도혁의 노트를 돌려준 이진태가 단상으로 올라갔다.
“자, 주목! 대부분 갈아엎어야겠지만 될 만한 설계가 있는 팀이 나왔으니 추가로 알려줄 사항이 있다.”
이진태의 말에 학생들이 모두 그에게 집중했다.
“공모전 할 거야.”
“네? 또 갑자기요?”
“이번에 네이밍 과제에서 예쁘게 결과물이 뽑히면 캠페인 공모전으로 확대할 예정이라고 한다. 들어나 봤나. 전국 대학생 공모전!”
“세상에. 설마 그 공모전, 과제로 나오는 건 아니겠죠?”
“올~ 눈치가 빠른데?”
학생들은 경악하며 소리쳤고, 이진태가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그 반응을 내려다보았다.
“우리 광고주님께서는 캠페인 전체를 관통하는 마케팅, 그리고 CF까지 제안하는 공모전을 계획 중이야. 대단하지?”
“규모가 엄청나네요.”
“1억.”
“네??”
1억이라는 말에 학생들의 원성이 뚝 그쳤다.
미래의 기준으로 봐도 적은 금액의 공모는 아니지만, 그이 당시 대학생 공고로서는 파격적인 금액이었다.
“공모전 상금이 1억 이상일 걸로 예상된다.”
“우와.”
“일석이조 아니냐? 과제도 하고 상금도 타고. 이런 건수 떠먹여 주는 교수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이진태는 과제를 안기면서 생색까지 내며 턱을 어루만졌다.
학생들의 한숨이 다시 깊어졌다.
“자, 그럼 자랑스러운 P대 광고홍보학과 여러분. 작품 한번 만들어봅시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공모전 대상은 우리 학교에서 나와야겠지?”
“네…….”
“대답 소리가 왜 이렇게 기어들어 가! 이래 가지고 대상 탈 수 있겠나?”
“네!”
마지못해 대답하는 학생들과 달리 도혁은 오히려 안도의 숨을 몰아쉬었다.
1억이 문제가 아니라 이 캠페인 꼭 해보고 싶었거든.
네이밍만 달랑하긴 아쉽다고 여기던 차였다.
불끈, 공모전에 대한 열정이 솟구쳐 나왔다.
대학생 공모전 입상은 전생에 해보지 못해 아쉬웠던 것 중 하나이다.
광고 동아리에서는 치사하게 광고홍보학과 애들로 팀을 구성해서 도혁은 끼지 못했다.
특히 큰 공모전은 한 번도 참여해 보지 못 했었고.
주먹을 움켜쥐며 결의를 다지는 도혁을 이진태가 불렀다.
“자, 수업은 여기서 정리하고, 일단 네이밍을 잘해야 1억도 있는 거니까 열심히 한번 달려봅시다. 명도혁 학생은 학과장실로 따라오도록. 이상!”
이진태는 얼떨결에 따라온 도혁에게 믹스 커피를 타주며 조바심을 내었다.
“내가 말이지. 성질이 좀 많이 급해서 따로 불렀어.”
“원래 각 분야에서 성공하는 분들이 급하시죠. 두뇌 회전이 빠르셔서 그런가 봅니다.”
“올~ 명도혁, 그런 말도 할 줄 아나?”
“진짜니까요. 적어도 제가 봐온 분들은 그랬어요.”
올~ 명도혁.
나 역시 조금 놀라 속으로 말을 삼켰다.
입바른 소리 잘 못 하는데. 탁기준의 저주(?)처럼 이번 생에 진짜 AE라도 하려는 건가.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고 이진태를 바라보았다.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까 그 기획안 말이야. 뭘 먹는다는 건가? 화장품을 먹는다는 거야?”
“네. 피부가 먹는다는 컨셉으로 자연주의를 표현할까 합니다.”
“피부가 먹는다!”
“그렇습니다. 어떤 것 같습니까?”
“괜찮고말고. 말이라고!”
이진태가 흥분해 벌떡 일어섰다.
“캠페인으로 큰 그림 그릴 수 있겠는데? 어때? 난 막, CF가 그려지고 그러는데!”
“네. 열심히 준비해 보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네이밍을 우리가 시작했으니까 공모전 가게 되면 대상은 우리 학교에서 나와야죠.”
“그렇지! 역시 말이 통하는구만. 열심히 가서 머리 굴려봐. 나도 최대한 도울 테니까.”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일어서는 도혁의 귀에 흥분한 이진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도혁! 1억 타면 나 얼마나 줄 건가?”
“타기만 하면야 제가 업어드리겠습니다.”
“아니, 업지 말고 돈 달라고. 어, 그냥 가네! 명도혁!”
도혁의 뒤통수에 대고 끝까지 이진태가 몫을 떼달란다.
장난인지 진심인지 모르겠지만 웃으며 돌아서 학과장실을 나왔다.
학과장님을 꼭 업어드릴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충성스러운 제자 명도혁이었다.
* * *
‘피부가 먹는다. 이걸 팍 꽂히게 광고로 풀어줘야 하는데.’
열한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
도혁이 늦은 저녁 식사를 하며 컨셉을 곱씹고 있었다.
물론 도혁은 에모라 자연주의 화장품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회귀 전 알았던 광고보다 더 나은 장면을 만들기 위해 고민 중이었다.
밥풀을 씹으며 딴생각을 하는 도혁을 보며 어머니가 한마디 하셨다.
“너는 뭘 하고 다니길래 이 시간까지 밥도 못 먹었어. 표정도 어둡고, 뭐 잘 안 풀리는 일이라도 있니?”
“죄송해요. 과제 때문에 생각 좀 하느라구요.”
“쉬엄쉬엄해. 그러다 몸 상할라. 학교 공부에 태강애드 일까지 너무 바쁜 거 아니야?”
“넵! 알겠습니다! 몸부터 챙길게요.”
걱정스럽게 도혁을 보던 엄마가 인삼 달인 물을 내왔다.
따뜻하게 데워진 찻잔에서 엄마의 정성이 느껴져 새삼 감동했다.
엄마, 제가 잘할게요. 곁에서 끝까지 효도할게.
오글거리는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지만 혼자 뭉클해하고 있었는데, 이 감동은 오래가지 않았다.
술에 잔뜩 취한 누나가 현관문을 박차고 들어온 것이다.
“아니, 넌 어디서 이렇게 술을 먹고 왔어!”
“엄마, 제가 좀 늦었죠. 사랑하는 우리 엄마. 히힛.”
“아이고, 도혁아 이쪽으로 좀 와서 누나 부축해 봐!”
떡이 되도록 술을 마신 누나의 팔을 어깨에 걸치며 구박을 늘어놓았다.
“도대체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미치겠네.”
“도, 도혁아. 우웨…… 웩.”
“으! 명현진, 지금 토하는 거냐?”
“아니, 토할 것 같긴 한데 토는 안 나와. 나 멀쩡해. 우웩.”
누나가 헛구역질을 하며 도혁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놀란 도혁이 기겁을 해서 도망을 가려다 엄마에게 붙들렸다.
“나 혼자 어떡하라고 도망하는 거냐. 얘는 술에 취해서 그런가 왜 이렇게 무겁니.”
“평소에도 무거워요. 아씨, 작작 좀 마시지.”
“내가 마시고 싶어서 마신 게 아니야, 인마. 네가 사회생활에 대해서 뭘 알아! 어?”
헛소리를 지껄이는 누나를 겨우 침대에 눕히고 밖으로 나왔다.
놀랍게도 명현진이 도혁을 따라 나왔다.
“누나 좀비냐? 무섭게 왜 따라 나오고 그래!”
“오이 팩 하려고.”
“뭐??”
도혁과 엄마는 황당해 말도 잇지 못하고 누나가 하는 꼴을 바라보았다.
누나는 채 가누지도 못하는 몸으로 주방으로 가더니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러곤 오이를 꺼내 썰어 얼굴에 처덕처덕 붙였다.
목이 마른지 중간중간 얼굴에 붙은 오이를 떼어내 씹어 먹는다.
“엄마, 저거 신종 술주정 같은 걸까요?”
“하아. 내 딸이지만 가관이네. 혼자 보기 아까워!”
엄마가 누나에게 있는 힘껏 등짝 스매싱을 날렸다.
“세수는 하고 팩 하는 거야? 어? 이는 닦았고?”
“아, 맞다. 세수…… 세에…… 수.”
“으이구! 이 화상아!”
정말 더러워 죽겠다.
세수도 안 한 얼굴에 붙은 오이는 무슨 죄란 말인가.
엄마가 겨우 누나를 씻기고 도혁은 다시 쓰러지는 누나를 부축해 방으로 옮겼다.
누나는 광기 어린 눈빛으로 오이를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전생에 오이랑 원수졌냐? 그거 좀 놓고 이쪽으로 누워봐.”
“이렇게 술을 마셨을 때! 응? 도혁아! 모공이 화알짝 열린단 말이지.”
“아우, 술 냄새. 아까부터 내 후각도 활짝 열렸다, 지금.”
“이럴 때 딱!”
누나가 이마에서 떨어진 오이 조각을 다시 붙이며 강조했다.
“오이를 얼굴에 붙이면 피부가 쏴악! 오이즙을 흡수한단 말이야. 들어는 봤냐? 바이타민 씨이…… 아이 씨, 명도혁 넌 알지도 못하면서, 어! 바이타민 씨이!”
“피부가 열리고, 오이를 흡수한다고?”
“그러취이! 이제 말이 통하네.”
누나가 툭 침대 위로 쓰러지며 유언처럼 말을 뱉었다.
“피부가 먹는다고요, 밥처럼 오이를.”
“잠시만 다시 말해봐. 뭐라고?”
“오이, 밥…… 먹는다…….”
“!!”
누나의 헛소리가 극에 달하는 순간이었다.
도혁의 머릿속에 한 줄의 문장이 스쳐 지나갔다.
여러 개의 CF 장면까지 동시에 펼쳐지며 후드득 카피가 떠올랐다.
“이거다. 이거야!”
머릿속을 빙빙 돌던 생각들이 정리되어 마무리되는 느낌이었다.
도혁은 누나를 덥석 끌어안으며 아이디어를 획득한 기쁨을 만끽했다.
역시 인간의 정신은 극한의 상황에서 힘을 발휘하는 모양이었다.
“누나, 고마워! 명현진 진짜 고맙다.”
“피부가…… 먹는…….”
여전히 제정신이 아닌 채로 술주정을 하는 누나가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도혁은 바닥에 널브러진 오이 조각을 주워 누나의 양 뺨에 곱게 붙여주었다. 그리고 제 얼굴에도 한 조각 붙여보았다.
누나와 나란히 오이 팩을 하며 오이를 한입 베어 물었다.
아이디어가 입속에서 번져가는 오이 향처럼 시원하게 풀려가고 있었다.